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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8:18-30

로마서 8:18-30
찬송가 182장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바울은 지금까지 로마서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에게 심판에서 구원에 대한 소망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본문을 이어왔습니다. 그는 이제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망에 대한 구체적인 근거와 놀라운 사실을 우리 앞에 펼쳐 놓습니다. 그리고 지난 본문 17절을 통해 먼저 영광을 나누려면 그리스도인의 고난을 같이 나누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맥락에서 오늘 본문(18-30)은 그리스도인들의 장래의 영광에 대해 설명합니다. 그리고 이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18)”으로 시작해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0)”로 마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장래에 있을 일입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을 통해 바울은 고난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미래의 영광에 대해 기대하면서 살아갈 것과 이 모든 과정을 위해 성령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독려합니다.


장래의 영광에 대한 기대(18-25절)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영광에 대한 언급에 앞서 고난이 따를 것임을 언급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에게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가치를 덮으시기 위해 오셨던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고, 그 분과 같은 길을 걷는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분이 몸소 겪으셨던 거부와 고난을 따르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우리가 감래할 수 있는 것은 그 고난이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바울을 권면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장래의 영광을 피조물들과 연결시킴으로써 이 영광이 나타나는 일의 중요성을 강화시킵니다.
(19-21)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그런데 본문에서 매우 인격적인 존재로 설명되고 있는 ‘피조물’에 대해 해석자들의 의견이 나뉩니다. 어떤 학자들은 오로지 사람, 또는 불신자들을 가리킨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어떤 학자들은 여기서 언급된 피조물에 대해 사람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 안에서 피조물이 경험하고 있는 허무가 그들에게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타락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본문에서는 사람이 아닌 다른 모든 하부 피조물을 가리키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가장 타당해보입니다.
전체 창조된 세계는 창조주의 창조목적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사람의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의도했던 것을 그들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에 이르면 반드시 창조된 세계를 사람들로 인해 손상된 상태에서부터 해방시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피조물의 타락이 사람들의 손에 의해서였던 것과 같이 이제 그들의 해방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자녀들을 통해서 될 것입니다.
타락으로 인한 피조물이 느끼는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고통은 아이를 낳는 여인의 출산일 것입니다. 사람이 육체적으로 느끼는 극심한 고통이 해산이라고 하지만, 타락한 모든 피조물이 겪어야 하는 고난, 곧 하나님과 멀어져야 하는 심리적인 불안감 또한 가히 감래하기 가볍다고 말하기를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난의 끝에 이르는 영광스러운 회복은 그 어느 기쁨과도 비견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그 기쁨을 위해 고난의 자리를 기꺼이 감당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피조물들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 역시 이 고난을 탄식하며, 구원을 기대한다고 말합니다.
(23)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는 성령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음한다'는 표현보다 ‘우리는 성령을 갖고 있기 때문에 신음한다’는 표현이 더 나은 해석으로 보입니다. 성령이 우리의 삶에 들어오시고, 그래서 우리는 이전에 느끼지 못했던 타락의 아픔을 느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결국 성령으로 인해 하나님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한 우리들의 탄식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바람, 곧 양자 됨, 몸의 속량을 바라며 살아가는 소망을 더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양자됨을 바란다는 표현은 어딘가 어색함을 줍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양자가 되었다고 말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 곳곳에서 구원을 과거와 현재, 미래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고, 이는 그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됩니다. 또한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는 것과 같이, 우리는 구원을 이미 받았으나, 아직 완전히 받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는 것입니다.
바람, 즉 소망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불가피한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에서 구원을 받고 있지만, 이 소망의 본질에는 기다림이 따릅니다. 쉽게 말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양자됨의 은혜를 입고 특권을 누리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더 크고 완전한 양자됨의 특권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양자됨의 특권까지 거론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주는 이 기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미친 고난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지속적으로 인내하라는 권면 또한 잊지 않았습니다.
(25)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는 참음으로 그것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미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은 그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게 영광의 날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리고 다시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입니다. 주님이 오시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여전히 베고 있는 돌베개 하나에 기대어 살아가는 허무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나심으로 인해 우리에게 양자됨은 선물로 주어졌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다시오심은 피할 바위마저 필요가 없는, 곧 고난의 위협이 없는 완전한 회복으로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이 날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날을 모든 피조물들까지 손꼽아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영광스러운 날을 기다리며 살아갈 때, 우리를 막아서는 어떠한 고난도 우리의 믿음의 노정을 막아세우거나 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기다리는 우리를 도우시는 성령(26-30절)
피조물이 탄식하고 그리스도인들이 탄식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성령도 탄식합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러나 성령의 탄식은 피조물들의 탄식과는 다릅니다. 피조물의 탄식은 고난에 의한 탄식이었지만, 성령의 탄식은 고난의 시간에 있는 우리를 위한 탄식이었습니다. 소망이 고난의 시간을 견디게 하듯,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의 시간을 견디도록 돕고 계신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면, 우리는 마땅히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탄식이 반드시 우리를 위해 함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성령님의 탄식이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일치한다는 27절의 증언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됩니다.
(27)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성령님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바라는 것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조차 하나님의 완전하신 뜻을 따라 행하는데 우리의 삶에서 방해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주어진 상황에서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지만 성령님은 아십니다. 그리고 그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주님의 뜻과 완전하게 조화를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의 보증을 위해 기도하신 것과 같이, 성령도 구원을 위해 우리를 준비시키시면서 우리의 마음 속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의 고난 가운데 성령님의 간구하심은 큰 위로가 됩니다. 그와 함께 우리에게 위로가 되는 또 다른 한가지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 본문에 대한 다양한 번역이 존재하는데, 종합해서 해석한다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목적에 따라서 부름 받은 사람들의 선, 곧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정하신 마지막 영광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며, 따라서 우리에게도 이 영광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29-30)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이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하나님의 예정에 대한 설명을 담고 있는데, 이러한 본문들을 근거로 예정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지만, 그 의견들을 따지기보다는 예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자 각자를 소중하고 귀하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맞는 완전한 구원을 계획하시며, 반드시 이뤄가시는 분이라는 점으로 이해되는 것이 예정에 대한 우리 믿음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화롭게 하신다”는 이 동사는 부정과거로 사용되었습니다. 부정과거는 과거의 행위를 언급하는 시제입니다. 바울이 미래에 있을 영화로움에 대해서 과거시제로 언급한 것에 대한 분명한 결론이 없습니다. 다만, 이전의 본문인 예정과 연결지어 하나님의 관점으로 생각해 볼 때, ‘하나님은 의롭게 하신 모든 사람들을 영화롭게 할 결정을 이미 하셨다’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본문은 많은 기독학자들로 하여금 의견을 분분하게 하는 본문입니다. 선택과 예정, 영원한 보증 등과 같이 정확한 결론이 나지 않는 다양한 의견들을 주는 본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본문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계획을 갖고 계시고 우리 미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온전히 제공하시는 분임을 고난 받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시켜주기 위해 쓴 내용이었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캄캄한 밤을 맞아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방황은 다른 피조물에게까지 허무를 선사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우리의 방황을 성령은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고, 기도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우리는 비로소 믿음의 여정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따스한 성령님의 온기가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계속해서 인도해주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가 횃불이 되어 길을 밝혀주시며 동행해주심으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더 선명히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한걸음의 내딛음이 확신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걸어가는 우리의 믿음의 발걸음 끝에 영화로움의 날을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믿음의 여정을 걷는 기대이자, 그 걸음의 원동력입니다.
죄악으로 인해 어그러진 세상을 살아가기에, 우리 앞에 고난과 시련은 정해져 있는 듯, 당연히 예고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환난이 닥쳐온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가운데로 우리의 삶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이 보이지 않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로 맡겨드릴 때, 구원의 뿔이신 하나님께서 강력히 우리의 삶을 인도하사,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며 우리를 완성된 영화로운 자리로 인도해 가실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지쳐 잡은 손을 놓으려고 할 때에도 힘이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잡으신 손을 결코 놓치 않으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저희들 가운데 영화롭게 될 그 날에 대한 큰 기대를 주시니 감사합니다.그러나 그 날까지 살아가야 하는 저희들의 삶의 걸음은 한걸음 한걸음 버겁기도 합니다. 그래도 성령님께서는 저희들을 위해 함께 간구하신다는 말씀이 큰 용기가 됩니다.
저희들에게 주어진 이 믿음의 여정을 아버지께 맡기며 걸어가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해주시고, 쥐려고 하나 놓치는 저희들은 손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붙잡아주시옵소서. 그래서 모진 풍파를 겪는 인생 속에서도 영화로운 그 날까지 믿음의 여정을 고이 걸어갈 수 있는 저희들 모두가 되게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사람들의 죄로 인해 다른 피조물들이 고난을 받는다고 합니다. 우리로 인해 피해를 입은 환경을 위해 섬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묵상해봅시다.
2.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도 몰라 당황하던 당신을 위해 기도하시는 성령으로 인해 영적인 감각이 살아난 경험이 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3. 모든 일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이 들던 때, 궁극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신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적이 있는지를 묵상해봅시다.
4. 고난의 자리가 아무리 크다고 할지라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을 자기 힘으로 삼기 위해 어떤 결단을 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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