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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9:1-18

로마서 9:1-18
찬송가 546장 ‘주님 약속하신 말씀 위에서’



이스라엘의 특권 (1-5절)
신구약 성경 66권 중에 중요하지 않고, 의미가 없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지만, 그중에서도 ‘로마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할 때, ‘성경 중의 성경이다’ 또는 ‘성경의 핵심이다’라고 말합니다. 또 성경이 금반지라고 한다면, 로마서는 그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와 같다고 말합니다. 로마서는 모두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한 장을 뽑으면, 8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만 있어도 구원의 진리를 깨우치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8장에서 죄와 사망의 법의 지배를 받던 우리가 그 법보다 더 상위법인 생명의 성령의 법의 지배를 받게 됨으로 해방되었다고 선포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또한 세상의 그 어떤 것이나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법에서 끊을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은혜를 만끽하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에게는 그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다고 말합니다.
(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이 말씀부터 11장 마지막절까지는 ‘유대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에 관해 증거합니다.
본문 1~2절이 한 절처럼 되어있는데, 그것은 헬라어 성경으로 1-2절이 한 문장으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생각하면, 그 신비함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에 깊이 감사하게 되지만, 자기 동족 이스라엘을 생각하니까 ‘큰 근심_심한 짓눌림’과 ‘그치지 않는 고통_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처럼 깊어지기만 하는 고뇌’를 느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자기 동족이 함께 누리지 못하는 것을 가슴 아파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느 도시를 가든지,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 자기 동족들로부터 반대를 당했고, 위협을 당했습니다. 심지어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았는데, 유대인들은 돌에 맞은 바울이 죽었다고 생각하고 도시 밖으로 내다 버릴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큰 근심과 깊은 고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울이어야 말로, 8장에 나오는 성령의 사람의 표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구원의 기쁨, 성령 충만 등을 자기 욕망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바울은 자기 동족이 구원받는 것을 얼마나 원하고 있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라도 원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자신이 실제로 저주를 받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만큼 간절하게 동족의 구원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만 하나님의 은혜의 대상이 아니라 동족 이스라엘 백성도 동일하다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동족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세세에 찬양을 돌려야 할 정도로 누렸던 특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4-5)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

바울은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찬양을 돌려야 할 내용을 9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①이스라엘 사람 :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김’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야곱이 얍복 나루 체험에서 얻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그렇게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그에게 이전과는 다른 삶을 살라고 주신 이름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을 뜻하는 말이 되었고, 하나님께 특별한 의미를 주는 존재라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②양자됨 : ‘이스라엘 사람’이 ‘집단’을 지칭한다면, ‘양자’는 ‘개개인’을 뜻합니다. 성경에 말하는 ‘양자’는 ‘친자식이 없어서 데려왔다’라는 의미보다 ‘유산을 상속받을 자녀’로 사용됩니다. 부모의 유산은 자녀가 받는 것이지 아무리 신실해도 종이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특별하다는 의미입니다.
③영광 : 본문에서 말하는 ‘영광’은 ‘기이하게만 보이는 하나님의 역사의 신비함과 장엄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세상에 그 어떤 나라 사람이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목도하고, 구름기둥과 불기둥의 인도하심을 경험했습니까? 또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를 먹고, 반석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를 마신 민족이 있습니까? 이스라엘 자손들이 유일합니다.
④언약들 : 하나님께서 당신의 긍휼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일방적으로 맺으신 약속입니다. 아브라함 언약, 시내산 언약, 다윗 언약 등등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언약들을 잊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잊지 않으셨습니다.
⑤율법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율법을 주시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양심만 주셨습니다. ㄹ
⑥예배 : 예배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 주시는 현장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라고 하지 않으시고, 찾아가 주셨습니다. 대통령과 악수하기를 원하는 시민이 직접 찾아가서 만나려고 하면, 중간에 여러 곳에서 제지를 당해서 그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가 정말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재래시장을 찾아와서 상인에게 손을 내민다면, 그때는 그 상인이 손만 내밀면 됩니다.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대통령을 찾아가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참 엄청난 특권입니다.
⑦약속들 : 영원한 왕과 제사장, 선지자로 오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입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의 오심에 대해 수백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⑧조상들 :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등등의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에게는 영적인 조상들이지만, 이스라엘 자손들에는 핏줄의 조상입니다. 학교에서 역사 교과서를 읽어가다가 자기 할아버지나 할머니의 이름을 발견하면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다른 학생들의 느낌과는 결코 동일하지 않을 것입니다.
⑨그리스도 : 앞의 모든 특권을 다 합한 것보다 이것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큽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우리가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고, 언약, 율법, 약속의 완성이십니다.

이러한 은총을 유대인들이 누렸지만, 그들은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고, 배척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그들에게는 특권이 특권 되지 못했습니다.


참 이스라엘-이삭, 야곱 (6-13절)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은 폐하여진 것인가 하는 질문이 들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이 이러합니다.
(6)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폐하여지다’는 ‘실패하다’는 뜻입니다. 즉 이스라엘 자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에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신 것이 실패이거나 실수가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말씀의 성취는 인간의 신실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마치 선생님이 애정을 가지고 수업에 임했음에도 딴짓만 하고, 공부하지 않던 학생이 시험에서 낙제점을 받았다고, 선생님이 낸 시험문제가 무효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선생님은 그런 학생이라 할지라도 바르게 인도해 갈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시겠습니까?

(7-8)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에게는 두 아들-이스마엘과 이삭-이 있었습니다. 그 둘 중에서 이삭만 약속의 자녀로 여겨주셨습니다. 이것은 단지 서자와 친자의 차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여겨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총명하고, 더 선한 사람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아직 여겨주심을 받지 못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9)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

이삭이 약속의 자녀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 그의 선함이나 능력 때문이 아님이 아주 또렷하게 증명됩니다. 사라가 임신했거나, 이삭이 태어났기 때문에 이삭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이삭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해도 또렷합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오고 하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받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시고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을 얻으며,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삭이 그러했다면, 그 아들들도 마찬가지입니다.
(12-13)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이스마엘과 이삭은 서자(庶子)와 적자(嫡子)라는 차이도 있고, 출생 시간의 차이도 있고, 어머니도 다릅니다. 그러나 에서와 야곱은 부모가 동일할 뿐만 아니라 동일한 장소, 거의 동일한 시간에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야곱을 택하셨다고 하십니다.
야곱이 택함을 받은 것은 선하기 때문도, 신실하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출생 이전에 택함을 받는 일방적인 은총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심에도 이유가 없습니다. 일방적인 은총을 받은 결과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14-18절)
하나님께서 이삭과 야곱은 택하시고, 이스마엘과 에서는 택하지 않으셨다면, 불공평한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에 대한 답변입니다.
(14-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하나님께서 결정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우리가 결정한 것입니다. 이 옷이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것인가? 가장 최근에 산 것인가? 색깔이 가장 곱기 때문인가? 아닐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이 옷을 입고 있는 것은 내가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신 것도 세상 사람들보다 낫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긍휼과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죄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예수님 편에서 보면 정말 불공평하기 짝이 없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16-17)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긍휼의 대상이 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예로 모세와 바로를 들고 있습니다. 사실 모세는 오늘날로 하면 결코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40년 동안 이스라엘 자손을 학대하는 애굽의 왕자로 살았습니다. 또 40년 동안 목자로 살던 사람이 갑자기 민족의 지도자로 부상(浮上)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40년 동안 지도자로 살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불쌍히 여기심의 결과였습니다. 노예 신분인 이스라엘 자손들보다는 대제국의 백성이었던 애굽 민족이 훨씬 더 나아 보였고, 모세보다 바로가 훨씬 더 교양 있고, 총명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권력도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지 않으시니까, 바로는 연이어 재앙을 당하다가 장자까지 죽는 비극을 맛보아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사람과 완악하게 여기시는 사람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이렇게 증거합니다.
(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저 사람을 왜 완악하게 여기시는가’가 아니라 ‘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는가’입니다. 우리 사람이 모두 중립적인 곳에 있다가 그중에 절반은 긍휼히 여김을 받고, 절반은 완악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은 모두 완악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중에 긍휼히 여겨주시는 사람이 있는 것압니다. 그 긍휼히 여김을 받는 사람 속에 우리가 속해 있다면, 그것은 ‘감사할 수밖에 없는 불공평’입니다.

야곱이 하란을 향해 집을 떠날 때 그에는 의지할 것이라고는 머리맡에 있는 돌멩이가 전부였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어 주셨습니다. ㄷ도한 야곱같은 우리에게도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힘이 되어주시고, 우리 삶의 길에서 해가 진 것처럼 앞이 보이지 않을 때도 주님은 우리의 빛이셨습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 주시고, 일방적이고도 측량할 수 없는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과 동행하시는 한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이 가진 동족의 구원을 위한 애끓는 마음을 우리도 갖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은총을 입었고, 그들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그것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을 반면교사로 삼아,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주시고,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신묘막측하고도 불가사의한 은총을 잊지 않는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하나님께서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택하셨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것도 하고자 하시는 사람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도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런 신비한 은총을 베풀어 주신 주님을 우리의 힘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한날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에게는 자기 동족의 구원을 위한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지금 당신에게 있는 거룩한 근심과 고통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는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을, 에서가 아니라 야곱을 은혜로 택하셨습니다. 당신이 입은 하나님의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은총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께서는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불공평하게 보이는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이 받은 불공평하게 보이는 은혜는 무엇입니까?
4. 일방적이고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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