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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로마서(새벽)

로마서 9:19-33

로마서 9:19-33
찬송가 292장 ‘주 없이 살 수 없네’


사도 바울은 9장을 시작하며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였습니다. 그에게 큰 근심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누리고 있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동포 유대인들이 누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비록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족에 대한 애끓는 사랑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믿음과 구원에 대한 타는 심정을 토로하면서, 자신이 버림받음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겠다는 절실함을 내비쳤습니다.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능동적이신 분이며, 인간은 수동적입니다. 구원은 그 근원 자체가 전적인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인한 것이라면(15, 18절),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계획하심에 저항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모든 결정을 내리시면서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고 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19-29)
(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을 비난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드는 사람과 만들어진 물건의 관계를 통해서 설명합니다. 만들어진 물건이 만드는 사람에게 따질 수 없듯이, 피조물인 인간은 온 우주만물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 따질 수 없습니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한 존재를 이해하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바울은 오히려 이렇게 되묻고 있습니다.

(20-21)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네가 감히 누군데 그런 질문을 하느냐?” 세상 만물의 창조주 되신 하나님께서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또 일부는 천하게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있으십니다. 그릇이 자기를 만든 토기장이에게 “왜 나를 이렇게 만드느냐?”라고 되물을 수는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관계도 이와 같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토기장이 이야기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 구절은 반역하는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에게 올바른 태도를 보여줍니다.

(이사야 64:8)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주님께서는 부활을 믿지 못하는 도마에게, 구멍난 옆구리에 손을 넣어 만져보고 믿는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우리의 진정한 의문에 따스히 다가와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에 반발하는 자들에게는 의문을 제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에는 그럴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지혜와 능력보다 훨씬 더 크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하는, 그분의 피조물 된 존재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는 우리를 지으신 분명한 목적과 계획이 있으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그 계획과 목적에 맞게 각자의 자리에서 해야 할 책임을 다하여야 하겠습니다.

22절과 23절 역시 하나님의 주권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22-23)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을 하리요

22절의 진노의 그릇은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었던 불신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오래 참으심의 관용으로 기다려주셨습니다. 17절에서 바로를 향하여 하신 말씀의 의미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거역하는 자들을 상대로 역사하시는 것은 그분의 성품과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출애굽 당시 바로를 세우심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이름이 널리 전파되었습니다. 바로의 강퍅한 마음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이적을 통해 그분의 목적을 더욱 확실히 이루게 하였습니다. 진노의 대상을 향한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목적은 그의 백성으로 선택하신 자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으로 나아올 수 있는 기회를 주시려는 데 있습니다. 심판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조차도 그분의 오래 참으심으로 완화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패역한 세상 가운데 진노를 보이지 않으시고 기다리신 것은, 오직 그분의 사랑의 계획을 완수하기 위한 오래 참으심 때문입니다.

반대로 23절에 긍휼의 그릇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기로 예비하신 이방인 신자들을 의미합니다. 미리 아심과 미리 정하심의 대상(8:29), 즉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자들에게 그의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주권적인 자유가 사용되는 것에 대해 피조물은 할 말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선택하시고, 어떤 사람은 선택하지 않으셨음에 집중하기보다는,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경외함으로 감사하며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사람은 구원의 선물을 받습니다. 이 구원이 아무런 자격 없는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결코 교만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같은 사람들까지도 긍휼히 여기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하게, 또한 신실하게 반응하여야 하겠습니다.

계속해서 바울은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긍휼’에 있음을 증거합니다.

(25-26) 호세아의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하지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호세아의 상황과 그의 자녀들의 이름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섰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릴 수 없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자들, 존재하지 않은 자들, 허물과 죄로 죽었고, 세상에서 소망 없이 하나님을 잃어버린 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께서는 이 상황을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이들이 다시 긍휼히 여기심을 얻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와 바로의 이야기처럼 결국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적인 자유를 사용하시어 더 많은 사람들을 부르시고, 구원하시는 긍휼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바울이 주장하는 핵심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의 주권적인 자유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지만, 그분은 선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우리를 멸망의 길로 이끄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원리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에게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을 이사야서의 말씀을 통해 확증하고 있습니다.

(27-28)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고 속히 시행하시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 모든 이스라엘에게 적용되는 보증서는 결코 아닙니다. 이사야는 단지 소수의 유대인,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복음은 먼저 유대인들에게 갔지만, 받아들이는 이는 많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당수가 등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선택된 남은 자를 보호하시고, 그 남은 자들은 하나님께 끝까지 신실하게 반응합니다. 이들의 역할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라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신실한 남은 자들을 남겨 두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은 멸망하였을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때는 반드시 올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그 심판을 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신실한 남은 자는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남은 자로서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바울은 9장을 시작하며 큰 근심과 마음에 큰 고통이 있음을 호소하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 왜 이스라엘이 구원받지 못하고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난 의(30-33)
(30-3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가지지도 않았고, 하나님조차 알지 못하였으며, 의로워지려고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은 율법을 준수하여 의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실패합니다. 그들은 행위의 관점으로 잘못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의에 이르는 올바른 방법을 취하지 못하였습니다. 의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

(32)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칠 돌에 부딪쳤느니라

믿음으로 번역된 헬라어 ‘피스티스’는 신실함으로 번역해야 그 뜻이 살아납니다. 믿음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계승되어 온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부딪칠 돌, 즉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걸려 넘어지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이 기대한 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분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잃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전히 믿음으로 얻는 구원을 이해하지 못하여 예수님께 부딪쳐 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만의 방법으로, 나의 어떠한 무언가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아무것도 아닌 야곱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되어 주셨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그분은 하나님이 되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하심으로, 부족하고 연약하여 아무런 자격이 없는 우리에게 긍휼이 흘러 넘친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며 오직 말씀과 기도로 살아가는 신실한 주님의 제자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인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고, 자격 없는 저희를 불러주시어 자녀 삼아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쓸모없다 깨어 버리셔도 아무 할 말 없는 저희들이었으나, 주님의 사랑의 계획으로 오늘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그 구원의 은총의 감격하여 늘 복음으로 가슴 뛰는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 자격 없는 저희에게 긍휼이 흘러넘침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영원한 반석이신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는 주권적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고 계십니다. 삶 가운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있으셨습니까?
2. 바울은 사람이 완악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반론에 어떻게 대답하고 있습니까?
3. 우리는 그리스도의 ‘남은 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4. 힘이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믿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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