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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레위기(새벽)

레위기13:1-17

레위기13:1-17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오늘 본문은 한센병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본문에서 ‘나병’으로 번역된 ṣāraʿaṯ 이란 히브리어 단어는 사실 한센병만을 지칭하는 단어라기보다 살이 벗겨지는 악성 피부병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나병’으로 번역된 이유는 히브리어 성경이 헬라어로 번역되면서 ṣāraʿaṯ이라는 단어를 lepra 라는 헬라어 단어로 번역했고, 이는 한센병을 지칭하는 영어 단어 leprosy의 기원이기 때문입니다.

제사장(1-2)
(1-2)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만일 사람이 그의 피부에 무엇이 돋거나 뾰루지가 나거나 색점이 생겨서 그의 피부에 나병 같은 것이 생기거든 그를 곧 제사장 아론에게나 그의 아들 중 한 제사장에게로 데리고 갈 것이요

피부에 한센병 증상이 나타나면 제사장에게 데리고 가야 합니다. 그럼,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 정한지 부정한지를 결정합니다. 환자를 제사장에게 데리고 갔다는 것은 처음부터 치료가 목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레위기에서 한센병에 대해 비중있게 다루고 있지만 어디에도 치료에 대한 이야기는 언급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본문은 한센병 환자의 병을 낫게 하는 것과 그 병이 다른 사회 구성원들에게 퍼지지 않도록 조치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레위기 초반에 나와있는 사람을 정하게 만드는 제사들이나14장에 나오는 예식 등도 한센병 환자의 증상이 사라졌을 때 드리는 것이지 그 자체가 어떠한 능력이 있어서 환자를 낫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피부병 증상이 나타나면 한센병이 아니기만을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한센병의 원인도 알 수 없었기에 자신의 죄나 조상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리신 저주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제사를 통해 한센병을 정하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 자체가 한센병의 원인이 죄가 아니란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맥락의 이야기가 신약의 시각장애인 이야기인데, 제자들이 시각장애인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예수님께 묻자, 예수님께서는 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 하십니다. 한센병의 목적도 주님이 하신 일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이와 같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서도 내가 저주받은 것 같은 때가 있습니다. 나만 겪는 것 같은 불행과 고난 때문에 내가 무슨 죄를 지어 하나님을 노하시게 만들었을까 고민하신 적이 다들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교만입니다. 내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원인을 나로 상정하여 내 죄에 대한 대가를 내가 치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내 인생의 주관자가 나라는 착각에서 온 허상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 죄의 대가를 우리에게 직접 짊어지게 하셨다면 우리는 지금 즉시 전부다 지옥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죄의 대가가 아닌,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즉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해 허락된 일입니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한 것입니다. 무엇이 선입니까? 돈이 선입니까? 명예, 건강이 선입니까? 심지어 가족 사랑도 절대적 선은 아닙니다. 절대적 선은 오직 예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고 심지어 나의 실수나 죄 때문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성도의 삶에서는 모든 것들은 결국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한 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고난과 역경이 있을 때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기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증거한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영적 한센병자임이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나의 가능성은 점점 삭제되고 십자가만이 유일한 희망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멋들어지게 행함으로서 십자가가 증거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임이 드러날 때 주님께서 증거되는 것입니다.

피부병(3-8)
(3-8)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부의 털이 희어졌고 환부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나병의 환부라 제사장이 그를 진찰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 피부에 색점이 희나 우묵하지 아니하고 그 털이 희지 아니하면 제사장은 그 환자를 이레 동안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그를 진찰할지니 그가 보기에 그 환부가 변하지 아니하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제사장이 그를 또 이레 동안을 가두어둘 것이며 이레 만에 제사장이 또 진찰할지니 그 환부가 엷어졌고 병색이 피부에 퍼지지 아니하였으면 피부병이라 제사장이 그를 정하다 할 것이요 그의 옷을 빨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리라 그러나 그가 정결한지를 제사장에게 보인 후에 병이 피부에 퍼지면 제사장에게 다시 보일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병이 피부에 퍼졌으면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라 이는 나병임이니라

본문을 보면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피부에 생긴 증상에 털이 하얘지고 상처 부위가 파여있으면 나병일 수 있지만 증상 주위 털이 희어지지 않고 상처 부위가 파여 있지 않으면 7일동안 격리한 후에 다시 경과를 보며 판단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피부보다 우묵하다’는 원어로 보면 피부보다 더 깊게, 영어로는 ‘deeper than the skin’ 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증상이 단순히 피부 위에만 있는 상태인지 아니면 피부 안으로 침투되어 있는 상태인지를 분별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센병(9-17)
(9-17) 사람에게 나병이 들었거든 그를 제사장에게로 데려갈 것이요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거기 생살이 생겼으면 이는 그의 피부의 오랜 나병이라 제사장이 부정하다 할 것이요 그가 이미 부정하였은즉 가두어두지는 않을 것이며 제사장이 보기에 나병이 그 피부에 크게 발생하였으되 그 환자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그가 진찰할 것이요 나병이 과연 그의 전신에 퍼졌으면 그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다 희어진 자인즉 정하거니와 아무 때든지 그에게 생살이 보이면 그는 부정한즉 제사장이 생살을 진찰하고 그를 부정하다 할지니 그 생살은 부정한 것인즉 이는 나병이며 그 생살이 변하여 다시 희어지면 제사장에게로 갈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1절부터 8절까지는 단순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지었다면 이제 9절부터 17절까지는 한센병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피부에 흰 점이 돋고 털이 희어지고 생살이 생겼으면 오래동안 병을 앓았던 것임으로 부정은 하지만 격리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고, 12절에서는 병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퍼졌으면, 즉, 환자의 몸이 다 희어졌으면 정하다고 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나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병이 펴져 있으면 한센병이 가장 심한 상태인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단순히 한센병의 유무로 정하고 부정하고를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세세하고 특이한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본문에 나열된 기준은 사실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에도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의학적 관점에서 본문을 읽은 시카고 대학 저널에 실린 한 논문에 따르면 본문은 한센병을 정확하게 진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여졌을 수 없으며 이것을 통해서는 하나님이 세우신 정함과 부정함의 기준, 즉 신학적 관점으로만 오늘 본문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정리하면, 오늘 본문은 한센병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센병을 통해 성도에게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쓰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경로로 움직이고 계신 지를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듯이 본문은 먼저 피부병과 한센병을 구분 짓습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가 나눠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눈길이 정한 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부정한 자에게로 옮겨집니다. 그리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제사장에게 유심히 관찰하게 하십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를 나누고 그 경계에서 부정한 자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부정한 자에게 일어난 일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 부정함 속에서 다시 정함을 찾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원리를 설명하고 계신 것입니다.

정한 자와 부정한 자는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입니다. 정한 자들은 진 안, 즉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남을 수 있고, 부정한 자들은 진 밖으로 나가야 했습니다. 천국과 지옥의 차이입니다. 우리는 흔히 내가 성도가 돼서 천국에 들어갔다고 하면 왜 내가 지옥에 가야하는 사람인지는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이미 천국 들어갔는데, 이미 나의 현실이 저주에서 복으로 바뀌었는데 과거가 뭐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주 없는 곳에 복 없고, 부정함을 경유해야만 정해집니다. 제사장이 한센병 자들의 부정함을 자세히 관찰하듯이 우리 또한 왜 내가 부정한 자임을 깊게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는 나를 정하게 만든 은혜의 십자가이기 전에 내가 부정한 자, 하나님 살해범이라고 증거하는 심판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한센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피부가 벗겨진다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살이 벗겨지고 속이 드러나는, 즉 겉을 썩게 하는 병이기 때문입니다. 겉모습이 썩어가는 것은 보기에 혐오스럽습니다. 세상은 모두 외모가 번지르하고 눈에 보기 좋은 사람을 선호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외모란 단순 생김새가 아닌, 세상에서 인정받고 높임받는 모든 것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신앙생활에 전념하란 이야기구나 하고 혹시 생각하고 계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정말 열심히 종교생활 하면 우리를 혐오합니까? 말씀대로 살면 미워하나요? 아닙니다, 존경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겸손한 사람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지키면서도 우리는 외모를 위해 하고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죄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훨씬 더 교묘하고 깊게 우리 안에 침투해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우리 외모를 위한 것들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외모를 꾸미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센병자를 생각하면 쉽습니다. 세상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센병자가 되는 것이 외모가, 즉 겉사람이 죽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누구도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려는 사람이 없듯이 인간은 절대 스스로 자신의 외모를 포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열심히 나의 외모를, 나의 겉사람을 죽이겠다는 말 자체가 스스로 한센병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처럼 말도 안되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겉사람을 죽이는 것은 그래서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내산에서 모세가 받은 율법을 재해석 하시며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만하던 유대인들에게 형제를 노하게만 해도,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기만 해도 모두 지옥에 던져질 것이라는 인간은 절대 지킬 수 없는 수준의 율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통째로 외웠을 만큼, 안식일을 지키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았을 만큼, 하나님 말씀을 열심으로 지켰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통해 하나님은 더 높은 수준의 율법을 요구하신다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듣는 모든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랐다고 마태복음 7장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리새인들도 지키기 어려운 율법을 인간들에게 제시 하시고 산에서 내려오셔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이 한센병 환자를 치유하신 일입니다. 한센병 환자들은 앞서 이야기 했듯이 율법으로 인해 부정한 자, 즉 저주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는 자로 낙인 찍힌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접촉만 해도 부정한 사람이 됐고 그들은 진 밖에 살면서 자신은 절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는 저주받은 사람이라는 고백을 입에 달고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목숨 바쳐 하나님 말씀 지키던 바리새인들에겐 오히려 율법의 정죄함이 더해지고, 율법으로는 아무런 소망이 없던 한센병자에게는 거저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그 뜻은 구원이란 “나 이렇게 최선을 다해서 율법 지켰어요” 라는 고백이 아니라 “난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은 자입니다”라는 고백 안에 있다는 말입니다. 은혜는 그렇게 항상 저주 속에, 정함은 항상 부정함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님들,

오늘 우리는 어떤 고백을 하며 살고 계십니까? ‘내가 주님을 위해 이렇게 많은 것을 했습니다’ 입니까 아니면 ‘나는 주님 앞에 설 수도 없는 부정한 자입니다’ 입니까? 이 아침에 내가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해야할까를 고민하시기 보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묵상하기 원합니다. 주님께서 주실 어떠한 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십자가 복음을 더 깊게 알고, 주님과 교제를 위한 기도를 하시는 교우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기도

참 좋으신 하나님,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우리가 영적 한센병자임이 드러나기 원합니다. 나는 부정한 자라는 고백을 주님께 드리며 거저 주시는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희망없는 자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한센병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2. 나의 고난을 통해 십자가가 증거되는 경험을 해보셨나요? 그때의 경험을 회상하며 주님의 은혜를 묵상해 봅시다.
3. 왜 정함은 부정함을 경유해야만 할까요?
4. 왜 하나님 말씀을 열심히 지킨 바리새인이 아닌 한센병자에게 구원의 은혜가 임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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