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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레위기(새벽)

레위기 25장 39-55절

 레위기 25장 39-55절 


찬송가 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출애굽은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결정짓는 절대적인 사건입니다. 애굽의 바로 치하에서 노예로 살았던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해방시키셨습니다. 애굽 치하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첫 번째로 경제적 노예에서 해방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착취당하고 고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두 번째는 애굽에 대해 그 어떤 목소리도 낼 수 없는 정치적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 번째는 이방신을 섬기는 애굽의 종교 노예에서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애굽에서 경제적, 정치적, 종교 노예 신분이었던 그들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에 힘입어, 노예에서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이라는 약속의 땅을 선물로 받게 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애굽의 노예 신분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으며, 그들에게 주어진 토지 역시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과거 자신들이 노예였다는 사실을 잊지말라고 하신 이유는 착취당하고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말고, 베푸는 삶을 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토지를 특정인에게 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공동체에 주셨다는 것은 토지는 공동체의 필요를 위해 사용되어야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이 뜻을 인정하지 않는 순간 토지는 개인의 권력과 부를 위한 도구가 되며, 이는 그들의 시선이 더 이상 하나님을 향하지 않게 만듭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안식년과 희년 제도를 명하신 것은 애굽의 세계관을 추구하는 세상을 향한 그들의 시선을 다시 하나님께로 돌리게 하시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노예 해방제도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으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입니다.
(1)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삼은 경우 (레 25:39-43)
(2) 이방인을 종으로 삼은 경우 (레 25:44-46)
(3)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종이 된 경우 (레 25:47-55)

(1)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삼은 경우 (레 25:39-43)
(39-41)   너와 함께 있는 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네게 몸이 팔리거든 너는 그를 종으로 부리지 말고 / 품꾼이나 동거인과 같이 함께 있게 하여 희년까지 너를 섬기게 하라 / 그 때에는 그와 그의 자녀가 함께 네게서 떠나 그의 가족과 그의 조상의 기업으로 돌아가게 하라 

이스라엘 사람이 노예가 되는 경우는 경제적인 어려움에 빠져 부채를 갚을 능력이 없거나 자신 또는 자녀들을 담보로 빚을 졌는데 갚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또 본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도둑질 한 후 변상할 능력이 없는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같은 종족인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삼게 인정하신 이유는 그가 이방인에게 팔려가서 학대를 받거나 영원히 이방인의 종이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몸을 팔아야 하는 절박한 그를 보호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종으로 삼도록 허락하셨지만, 주인은 그를 영원히 종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희년이 되면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습니다. 물론 희년이 되기 이전일지라도 그 사람이 종인 된지 6년이 지나 7년째가 되면 그는 물론 그 가족까지도 함께 해방시켜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가난 때문에 종이 되었다고 해서 그를 함부로 대하지 말고 품꾼이나 함께 하는 식객처럼 대우하라고 하십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엄하게 부리지 말고 네 하나님을 경외하라(43)”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종(42)으로 단지 가난하게 된 내 형제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주인이 종에게 상전이라 할지라도 그의 위에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에 종을 함부로 취급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종이 된 동족에게 노동력을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의 인격을 무시하지 말라는 이 말씀은 노예를 인격체로 대하지 않고 재물과 같은 재산으로 여기던 당시 사회적 통념을 완전히 깨트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 이방인을 종으로 삼은 경우 (레 25:44-46)
44-45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을 종으로 삼는 경우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이방인을 종으로 삼는 첫 번째 경우는 돈을 지불하고 외국인을 종으로 사는 것이며, 두 번째 경우는 전쟁 포로를 종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방인 종들은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받아들여 할례를 받고 여러 가지 특혜를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46절에 의하면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노예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어 상속되었습니다. 고대의 노예제도와 이방인 종에 대한 본문 말씀을 오늘 날의 관점으로 보면 부당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말씀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신분상으로 구별하는 이유는 언약적 관점에서 보아야 합니다. 즉 언약의 백성과 불신자 사이에는 엄연한 신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즉 하나님을 믿지 않은 불신자는 하나님의 믿은 언약 백성과 동일한 혜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3)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의 종이 된 경우 (레 25:47-55)
(47. 새번역)  너희와 함께 사는, 나그네 신세 된 외국 사람이나 임시 거주자 가운데는 부자로 사는 사람이 있는데, 마침 그 이웃에 너희의 동족이 살고 있다가 가난하게 되어서, 그 외국 사람에게나, 너희와 같이 사는 임시 거주자에게나, 그 가족 가운데 누구에게, 종으로 팔렸다고 하자. 

앞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이 이스라엘 백성의 종이 되면 영원히 종이 되었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난으로 인해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려간 경우에는 언제든지 몸값만 지불하면 주인은 그 이스라엘 사람을 해방시켜주어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동족이나 이방인이든지 사람의 종으로 영원히 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유는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입니다(55).
하나님께서는 종으로 팔려간 이스라엘 자손은 ‘속량 받을 권리가 있다’(48)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방인에게 종으로 팔려가는 경우, 일가친척들에게 고엘의 의무를 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고엘 제도는 친족 및 혈연 공동체를 중심으로 서로의 생명과 재산 그리고 가문을 보호해주기 위한 상호 보호 제도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난한 형제가 빚 때문에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을 경우에 ‘... 그의 형제 중 하나가 그를 속량하거나 /  또는 그의 삼촌이나 그의 삼촌의 아들이 그를 속량하거나 그의 가족 중 그의 살붙이 중에서 그를 속량하라’(48b-49)고 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가 빚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재산을 모았다면 ’스스로 값을 치르라‘(49)고 하십니다. 그때 지불해야 하는 몸값의 기준은 희년입니다.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많으면, 남은 햇수만큼 많이 내고, 희년까지 남은 햇수가 얼마 되지 않으면, 그 햇수를 따져서 그만큼 적게 치르면 됩니다. 그는 일한 햇수와 남은 햇수를, 자기를 종으로 산 주인과 함께 계산하여, 무르는 값을 정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산 이방인 주인에게 ’주인은 그를 매년의 삯꾼과 같이 여기고 네 목전에서 엄하게 부리지 말지니라‘라고 명하십니다. 즉 주인은 그를 해마다 고용하는 품꾼으로 대접하라고 하시면서. 어떤 주인이라도 그 종을 심하게 부리지 못하도록 명하셨습니다.  또한  종으로 팔려온 이스라엘 사람이 몸값을 지불하지 못하고 희년을 맞이하게 된 경우에는 그는 물론 그 자녀들도 함께 해방시키도록 명하셨습니다(54). 하나님께서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종으로 산 이방인에게 명령하신 이유를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55)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의 하나님이심을 천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은 물론 이방인들도 주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 본문은 물론 성경 전반에 걸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애굽의 종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과거를 잊은 민족은 미래를 잃은 것이며, 과거를 잊은 교회에 미래는 없다’(1909년 휴버트 칼턴, St. Andrew's cross)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종의 신분으로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인 억압 속에서 헐벗고 굶주렸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종의 입장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위치에 있기에 가난하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베풀 수 있는 위치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 소개합니다. 그는 로마 치하에서도 자유인 신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후, 자발적으로 주님의 종으로 살아가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신의 삶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일평생 주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는 선포이기도 합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자유인이 되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나의 종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이 땅에서 존재할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종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난으로 인해 종의 신분으로 전락하게 될 지라도 주인에게 그들을 인격체로 대해 줄 것과 때가 되면 그들을 자유인의 신분으로 해방시키라고 명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할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당연한 말씀 같지만 과연 나는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고 있습니까? 며칠 전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토트넘과 첼시의 경기에서 첼시 팬이 손흥민을 향해 눈을 찢는 인종차별적 제스처를 한 것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동양인이라고 인종차별을 받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떻습니까? 외국인 노동자를 얼마나 함부로 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힘을 가진 정치권, 대기업, 사법부, 언론 등과 같은 권력집단은 물론 직장 상하관계나 본사와 협력업체등 일상 속에 내재되어 있는 소위 ‘갑질 문화’로 인해 개인의 인격이 침해당하고, 성희롱이나 성추행 등은 물론 사생활이 침해당하고, 경제적 불이익을 받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나라 ‘갑질 문화’의 뿌리는 유교의 차등적 윤리규범에 기초한 형식적.위계적 권위주의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즉 연공서열, 직업귀천, 남녀차별, 노소차별 등과 같은 위계.차별적 문화가 사회 전반에 걸쳐있습니다. 한국학 학자인 최봉영 교수는 이로 인해 '존비어 체계'가 한국 사회에서 발전되었고, 이 존비어 체제는 무의식 속에 수직적 인지구조를 형성하고 모든 사물을 수직관계로 파악하려는 경향을 갖게 된다고 합니다. 그는 존비어 체제 속에서 한국 사람은 언제나 존대 받지 않으면 하대 받아야 하는 극단의 선택을 강요받는 까닭에 모두들 존대 받는 사람이 되어보려고 목숨을 걸고, 권력, 출세, 학벌, 권위에 매달리게 되었다고 진단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타인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지 않고 ‘차별적 과시’를 통한 ‘구별 짓기’를 하는 경향에 익숙해져 있다고 주장합니다. 정부는 ‘갑질 문화’를 근절하고자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결국 우리의 인식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의 종임을 고백하며,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43). 즉 내 삶의 주인은 내가 아닌 주님이시라는 고백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면, 내가 어떤 위치에 있다할지라도 내 이웃을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게 됩니다. 제가 제네바 한인교회에 다닐 때, 교회 입구에서 주보를 나누어주시다가, 예배가 시작하면 예배당 뒷자리 앉아 예배를 드리던 집사님이 계셨는데, 그분은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의 대사로 근무하고 계셨습니다. 교회는 물론 직장에서도, 한결같이 낮은 자세로 섬기는 그 집사님은 평생 주님을 경외하는 신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번 주일 설교에서 살펴보았듯이, 주님은 세속적 가치관을 추구하던 야고보와 요한을 내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고 내치지 않으시고 그들을 끝까지 믿고 품어주셨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에게도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바라셨고, 멸망의 길을 가는 그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즉 창조주이신 주님께서 피조물인 우리 위에 서서 강제로 통제하며 군림하려 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자유의지를 지닌 인격체로 대해주십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한량없으신 은혜 입은 우리 역시 내 이웃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인격체로 여기며, 나와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사랑과 인내로 섬길 때, 그들을 향한 주님의 섭리하심을 우리의 순종과 섬김을 통해 역사하실 것임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사람의 생각과 다르고, 하나님의 길은 사람이 길과 다르며, 하나님은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분이기기 때문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출애굽 이후에도 끊임없이 애굽으로 돌아가려는 이스라엘보다 더 고집이 세고 어리석은 우리를 주님의 섭리하심으로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우리 삶의 주관자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일평생 주님을 경외하는 주님의 종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어려운 이웃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며 섬길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작은 섬김을 통해 이 땅을 향하신 주님의 뜻이 아름답게 펼쳐지는 은혜를 베풀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같은 동족인 이스라엘 사람을 종으로 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이유는?
2. 주님께서 종으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다르게 대하게 하셨는데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3. 하나님께서 고엘 제도를 말씀하신 이유는?
4. 우리 사회에 ‘갑질 문화’가 만연한 이유는 무엇이며, 어떻게 없앨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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