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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레위기(새벽)

레위기 26:14-39

레위기 26:14-39 


찬송가 433장 ‘귀하신 주여 날 붙드사’

레위기 26장은 레위기 전체를 마무리하며 율법을 순종하는 자들에게 임하는 복과 율법에 순종하지 않는 자들에게 내리는 저주를 정리하는 부분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언약을 따르지 않았을 때 내리실 징벌을 다룹니다. 언뜻 봐도 어제 살펴본 복의 목록보다는 저주의 목록이 더 길고 상세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로부터 우리는 삶을 지지하고 있는 여러 기둥이 당연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우리는 평안하고 문제없이 살아갈 때 은연중에 그 모든 조건을 내가 조성했거나, 원래 삶이 그래야만 하는 것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 많은 조건 중 단 하나만 어긋나면 우리는 당황하며 삶이 실제로는 우리의 손에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적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이때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 원망하면서 하나님을 멀리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삶의 모든 것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조건 없이 호의로 주신 것임을 깨닫고 오히려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저주 목록이기 때문에 소화하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어찌 이런 무서운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의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포악하고 잔인하게 다루신다고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삶에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죄의 결과를 선언한다고 보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건강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대부분 알고 있습니다. 건강한 음식을 먹고, 적당히 운동하고, 잠을 충분히 자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아야 한다 등등입니다. 건강하지 않은 습관을 지속할 때 이런저런 병이 생길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건강하기에 건강 자체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이런 권고가 우습게만 들립니다. 저도 예전에 어르신들이 살기 위해 운동한다고 하시면 무슨 말인가 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실 때 일어나는 두려운 결과들을 살펴보며, 어떠한 의미로는 우리가 살기 위해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겸손하게 믿음의 길을 걷기로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언약 배반의 결과(14-26)

(14-17) 그러나 너희가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여 이 모든 명령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멸시하며 마음에 내 법도를 싫어하여 내 모든 계명을 준행하지 아니하며 내 언약을 배반할진대 내가 이같이 너희에게 행하리니 곧 내가 너희에게 놀라운 재앙을 내려 폐병과 열병으로 눈이 어둡고 생명이 쇠약하게 할 것이요 너희가 파종한 것은 헛되리니 너희의 대적이 그것을 먹을 것임이며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3절부터 13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청종했을 때 임하는 복을 다뤘습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을 때 따르는 결과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음이란 하나님이 주신 명령, 규례, 법도, 계명을 싫어하여 지키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며, 결국 언약 파기로 귀결됩니다. 여기서 명령, 규례, 법도,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과 명령을 총체적으로 표현한 단어라고 본다면, 이 구절은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부하고 경멸하며 하나님께 저항하는 마음 상태를 묘사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나는 실패, 즉 놀라운 재앙입니다. 주의할 점은 그들이 언약을 배반하였다고 해서 언약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언약에 진술된 대로 그 징벌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언약에 따르는 저주를 받음이 아직 언약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가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청종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먼저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간단히 말해 우리는 무거워지고 하나님은 가볍게 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거운 영광 아래 거하기 싫어 빠져나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는 바람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인정하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너무나 두렵게도 우리는 때로 하나님을 우리의 찬양과 예배를 기다리는 응석받이 취급을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의지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전도현상이 일어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시며 뒤흔드십니다. 그것이 우리를 두렵게 하는 놀라운 재앙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수밖에 없도록 절박하게 만드십니다. 폐병과 열병이 임하여 눈이 어두워지고 생명이 쇠약해집니다. 또한 대적에게 패배하여 심은 것을 원수가 차지하며 압제자에게 시달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쫓는 자가 없어도 쫓기는 듯한 삶, 약속의 땅을 누리지 못하는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재앙은 양면성을 지닙니다. 우리를 징계하시는 처벌인 동시에 우리의 잘못을 돌이키기 위한 훈련이라는 점입니다. 놀라운 재앙으로 인해 영적인 폐병과 열병으로 시달려 제대로 호흡하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우리가 가장 먼저 찾아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치셨다면 하나님만이 거두실 수 있습니다. 욥의 위대한 고백처럼 나를 치시는 분도, 나를 싸매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고백해야 할 것입니다.

(18-20) 또 만일 너희가 그렇게까지 되어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면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일곱 배나 더 징벌하리라 내가 너희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을 꺾고 너희의 하늘을 철과 같게 하며 너희 땅을 놋과 같게 하리니 너희의 수고가 헛될지라 땅은 그 산물을 내지 아니하고 땅의 나무는 그 열매를 맺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지경에 처해서도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으면 일곱 배나 더 징벌하신다고 하십니다. 여기서 징벌이라는 단어는 심판 또는 처벌이라기보다는 훈계 또는 단련의 의미를 지닙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재앙을 내리시는 목적이 그들을 멸망하는데 있지 않고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는데 있음이 드러납니다. 특히 앞으로 몇 차례 반복되는 일곱 배라는 표현은 완전수를 상징하는 일곱으로서, 그 재앙의 정도가 강할 것이며 그들이 순종하지 않더라도 하나님은 확고하게 그들을 고치실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들이 지은 죄가 무엇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9절을 보면 그들의 죄가 그들의 세력으로 말미암은 교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그 교만을 꺾기 위해 하나님이 일하실 때 하늘은 철과 같이, 땅은 놋과 같이 변합니다. 이전 경고에는 수확은 있었는데 대적이 수확물을 뺏어갔다면, 이제는 땅과 하늘이 농업에 필요한 물을 내지 않기에 아무리 수고해도 헛되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교만하여 하나님을 가볍게 여길 때 하나님께서 그 알량한 근거 자체를 앗아가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서 스스로 농사하여 만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 때, 그리고 세력이 강해져서 하나님 없이도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을 때 교만이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만의 위협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데이비드 웰스의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책을 보면 오늘날 교만이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는지 잘 설명합니다. 그는 오늘날 교만함 또는 오만함이란 하나님께 대한 순종과 하나님 중심주의에 대한 대안의 형태로 주어지는, 보호받고 각광받는 자기 중심성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현대에 교만함이란 자아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집착이며, 자기 몰두요 자기 사랑으로 진단합니다. 특히 현대성은 하나님을 왜소하게 만드는 동시에, 자아를 하나님의 대용품으로 높임으로써 인간의 이런 오만함에 불을 지펴 왔는데, 현대의 자아는 무엇이 궁극적으로 옳은가를 하나님께 묻지 않고 그것을 아예 생각하지도 않으며, 전혀 구애받지 않고 운명을 선택할 완전한 자유의 흥분을 맛보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다수 영역에서 이런 흥분은 곧 사라지고 맙니다. 그리고 자아가 오늘날 감당하도록 요구받는 역할의 무게 아래서 삐걱거리는 탓에, 영혼의 고단함이 밀려들게 됩니다. 따라서 으레 뒤따르는 긴장, 불안, 당혹감은 현대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표시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주어로 올려놓고 살아갈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불안함, 두려움을 호소합니까? 하나님이 될 수 없는 자아를 하나님의 지위로 격상함으로써 인간은 그 간극을 메꾸다가 좌절하고 맙니다. 이러한 인간에게 이 땅은 출구가 막힌 미로와 같아서 약속한 그 무엇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교만함을 꺾어버리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1-22) 너희가 나를 거슬러 내게 청종하지 아니할진대 내가 너희의 죄대로 너희에게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릴 것이라 내가 들짐승을 너희 중에 보내리니 그것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키고 너희 가축을 멸하며 너희의 수효를 줄이리니 너희의 길들이 황폐하리라

하나님은 이제 그들이 청종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거스른다고 말씀합니다. 거스른다는 말은 반대로 걷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곱 배나 더 재앙을 내리실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 재앙이라는 단어에는 부상, 학살 등의 뜻이 있는데, 이제는 훈계의 단계를 지나 형벌의 의미가 있습니다. 6절 말씀에서는 하나님이 사나운 짐승을 그 땅에서 제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이제는 오히려 들짐승을 보내어 그들의 자녀를 움키고 가축을 멸하여 수효를 줄인다고 하십니다. 또 그 길이 황폐하다는 말씀은 인구가 줄고, 도보 여행이 어려워 도성이 전체적으로 쇠락함을 말합니다. 특히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별과 같이 많게 하셨던 언약이 뒤집혔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언약에도 제한되지 않으신다는 무서운 말씀입니다.

특별히 들짐승들이 너희의 자녀를 움킨다는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자식들의 번성과 안녕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수고의 근본적인 이유는 자식들의 행복과 번영에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집중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채로 자식들에게 아무리 좋은 것들을 남겨주려고 한들 자녀를 이미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에게 자녀에게 물려줄 가장 소중한 유산은 믿음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전수하기 위해 애쓰지 않고 믿음 외에 무언가를 남겨주기 위해 노력하고 골몰하는 순간 자녀를 빼앗기게 됩니다.

(23-26) 이런 일을 당하여도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나 곧 나도 너희에게 대항하여 너희 죄로 말미암아 너희를 칠 배나 더 치리라 내가 칼을 너희에게로 가져다가 언약을 어긴 원수를 갚을 것이며 너희가 성읍에 모일지라도 너희 중에 염병을 보내고 너희를 대적의 손에 넘길 것이며 내가 너희가 의뢰하는 양식을 끊을 때에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워 저울에 달아 주리니 너희가 먹어도 배부르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도 돌아오지 않고 그들이 오히려 대항하여 맞선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들에게 대항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참고로 대항한다는 구절은 21절 거스르다는 구절과 동일합니다. 즉 하나님도 그들과 반대로 걸어가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막아주시던 칼이 오히려 하나님의 손에 의해 그들을 향하게 됩니다. 그들은 언약의 파트너에서 언약을 어긴 원수로 전락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읍에 모여 대적들을 이겨내려고 하겠지만 오히려 염병이 그들에게 임하고, 원수의 손에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주시지 않으시면, 인간에게는 전쟁의 공포가 언제나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생활은 이때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정교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기적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가 모르는 영역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26절을 보면 그들이 의뢰하는 대상은 바로 양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먹고 마실 충분한 자원이 있다고 믿지만, 그것 역시 곧 끊어지고 말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한 화덕에 열 여인이 떡을 구울 정도로 궁핍하게 될 것이고 저울에 달아서 동일하게 배분해야 할 정도로 그 양이 부족하여 먹어도 배부르지 않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의 양식보다 이 땅이 주는 떡을 더 의지할 때 이러한 비참한 현실은 언제든지 재현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10대 경제 대국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게 되었습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쓸 것이 풍성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습니까? 언제까지 우리가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도 우리는 여러 경제 환경의 변화로 인해 경제 위협을 실시간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많은 금과 외화와 원유와 식량 비축분이 있다고 한들 하나님이 그것을 끊으신다면 그 모든 것은 순식간에 동이 나고 허상에 불과한 것이 됩니다. 보릿고개라는 말이 사라진 지 불과 반세기가 지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의 빈곤함과 순종의 가난함은 언제든지 또 다른 보릿고개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파멸과 추방(27-39)

(27-33) 너희가 이같이 될지라도 내게 청종하지 아니하고 내게 대항할진대 내가 진노로 너희에게 대항하되 너희의 죄로 말미암아 칠 배나 더 징벌하리니 너희가 아들의 살을 먹을 것이요 딸의 살을 먹을 것이며 내가 너희의 산당들을 헐며 너희의 분향단들을 부수고 너희의 시체들을 부숴진 우상들 위에 던지고 내 마음이 너희를 싫어할 것이며 내가 너희의 성읍을 황폐하게 하고 너희의 성소들을 황량하게 할 것이요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를 내가 흠향하지 아니하고 그 땅을 황무하게 하리니 거기 거주하는 너희의 원수들이 그것으로 말미암아 놀랄 것이며 내가 너희를 여러 민족 중에 흩을 것이요 내가 칼을 빼어 너희를 따르게 하리니 너희의 땅이 황무하며 너희의 성읍이 황폐하리라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청종하지 않을 때 주어지는 마지막 저주로 전쟁의 끔찍한 양상이 묘사됩니다. 하나님은 이제 그들에게 진노로 대항하신다고 언명하십니다. 들짐승이 자녀를 물어가는 것을 넘어 부모가 직접 자녀를 잡아먹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던 산당과 분향단이 무너지며, 그들의 시체가 우상들 위에 내던져져 그곳을 철저히 부정한 곳으로 만들 것입니다. 특히 너희의 성읍, 너희의 성소, 너희의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심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을 위해 만든 모든 대상이 사실은 그들을 위한 그들의 것에 불과하다고 선포하십니다. 두려운 말씀입니다. 그들에게 성읍과 성소와 제사가 없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정기적으로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지만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예배가 어떠한지 돌아봐야 할 지점입니다.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은 채 드리는 형식적인 예배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대상입니다.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저열함과 죄악됨을 견디실 수 없는 분이시라는 점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너무 약화되어 친근한 하나님, 언제든지 우리 맘대로 부릴 수 있는 하나님으로 오해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구별이라는 하나님의 거룩함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결국 하나님의 그 철저한 거룩하심이 그 땅을 황무하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을 열방 중에 흩어지게 만듭니다. 이러한 묘사는 단순히 전쟁으로 인한 비극적 결과를 넘어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에 내재된 모든 요소가 부정될 것임을 말합니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지 거기 거주하는 원수들이 놀라게 됩니다.

(34-39) 너희가 원수의 땅에 살 동안에 너희의 본토가 황무할 것이므로 땅이 안식을 누릴 것이라 그 때에 땅이 안식을 누리리니 너희가 그 땅에 거주하는 동안 너희가 안식할 때에 땅은 쉬지 못하였으나 그 땅이 황무할 동안에는 쉬게 되리라 너희 남은 자에게는 그 원수들의 땅에서 내가 그들의 마음을 약하게 하리니 그들은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기를 칼을 피하여 도망하듯 할 것이요 쫓는 자가 없어도 엎드러질 것이라 그들은 쫓는 자가 없어도 칼 앞에 있음 같이 서로 짓밟혀 넘어지리니 너희가 원수들을 맞설 힘이 없을 것이요 너희가 여러 민족 중에서 망하리니 너희의 원수들의 땅이 너희를 삼킬 것이라 너희 남은 자가 너희의 원수들의 땅에서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쇠잔하며 그 조상의 죄로 말미암아 그 조상 같이 쇠잔하리라

마침내 그들은 약속의 땅에서 추방되어 원수의 땅에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 민족 중에 멸망하여 원수들의 땅이 그들을 삼키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땅은 그들을 토해내고, 이방의 땅은 그들을 삼켜버리며 그들에게 주어진 언약은 완전히 그 가능성을 잃고 맙니다. 그들은 원수들의 땅에서도 마음이 연약해져 바람에 불린 잎사귀 소리에도 놀라 도망하고, 서로 짓밟혀 넘어지기에 원수들과 맞설 힘이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희망의 빛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바로 땅이 안식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주인은 하나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땅을 자기의 것이라고 여기며 악착같이 학대하여 최대의 이익을 쥐어 짜냈습니다. 희년의 명령도 지키지 않았고, 안식년도 제대로 준수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쇠잔할 때에도 그 땅은 보존하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에서 그 언약의 재개 가능성을 말하십니다. 우리에게는 가능성이 없지만 하나님은 가능성을 만들어내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죄의 무시무시한 결과를 생생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있을 일을 선포하는 동시에 앞으로 이스라엘이 겪게 될 모든 일을 예견하며,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실패할 때 겪게 될 삶의 모든 실패를 말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길을 독단적으로 판단하고 우리 먹을 것의 풍성함이나 우리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주님의 뜻이 있다고 믿고 살아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가 세력을 확장하고 양식을 풍성하게 만들어 스스로 자족하고 높아지는 일에 소망을 두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우리를 징벌하시고 치시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계속해서 되돌리시며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이 신실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께 돌이키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하나님께 청종하지 않을 때 임하는 여러 징벌과 재앙을 살펴봤습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보호하시기에 가능한 기적임을 깨닫게 하시고 오늘도 하나님께 거스르지 않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상세한 저주 목록을 성경에 담으신 목적이 무엇인지 묵상해 보십시오.
2.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의 죄라고 지목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자아는 무거워지고 하나님은 가벼워진 이유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3. 거룩하신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식하고 계십니까? 거룩하신 하나님께 바른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4. 저주의 말씀 중에서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희망의 불빛은 무엇입니까? 오늘날 땅을 안식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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