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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사도행전 28:16-31

사도행전 28:16-31
찬송가 445장 ‘태산을 넘어 험곡에 가도’



로마로 온 이유(16-20절)
보디올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다가 출발한 바울 일행은 마침내 제국의 심장 로마에 도착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며 사도행전의 막이 내려옵니다.
(16) 우리가 로마에 들어가니 바울에게는 자기를 지키는 한 군인과 함께 따로 있게 허락하더라

당시 로마 시민으로 황제에게 상소한 미결수는 로마에 도착하면 황제의 근위대장에게 인수인계되어 황제근위대 감옥에 감금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장은 바울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고, 감옥 밖에, 가택연금의 형태로 따로 지낼 수 있도록 허락해주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은 황제의 명령을 철저하게 준수하는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왜 바울에게 이렇게 관대하게 대해주었는지 그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손길이 역사하셨다고밖에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복음도 전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할 수 있었습니다. 30절에서 증거하듯이, 이때부터 바울은 2년 동안 자기 ‘셋집’에 머물렀습니다. ‘셋집’은 돈을 주고 빌린 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지, 실제로 공간적으로는 ‘싸구려 헛간’ 같은 곳이었습니다.

(17a) 사흘 후에 바울이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로마에 도착한 바울은 가택연금 상태에서 가장 먼저 초대한 사람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얼핏 표면적으로 생각하면, ‘높은 사람들에게 잘 보이기 위함인가?’ 하는 생각도 들고, 그리스도인들을 먼저 초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제국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에는 처음 왔기 때문에 로마에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이 가택연금을 당할 셋집을 얻었다는 것은 누군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그리스도인이 도와주었고, 그들이 곁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흘이 지나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을 초대했던 것이었습니다. 왜 자신이 로마까지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려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죄수의 신분인 바울이 일일이 높은 사람들을 찾아다닐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17b-19) 그들이 모인 후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이나 우리 조상의 관습을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준 바 되었으니 로마인은 나를 심문하여 죽일 죄목이 없으므로 석방하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반대하기로 내가 마지 못하여 가이사에게 상소함이요 내 민족을 고발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바울을 배교자로 여겨 어떻게 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2년에 걸쳐서 벨릭스 총독과 베스도 총독에게 거짓된 내용으로 바울을 고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동맹한 사람이 40여 명이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말 굶어 죽었는지 궁금합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바울에게 적대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황제에게 상소한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기 전에, 로마에 있는 유대교 공동체에 바울을 모함하는 편지를 보냈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왜 자신이 왜 황제에게 상소했는지 그 이유를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그 상소는 바울이 자기 민족, 유대인을 고발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0) 이러므로 너희를 보고 함께 이야기하려고 청하였으니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말미암아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 바 되었노라

바울이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가택연금 상태로 구금되어 있었다고 해서, 그 안에서 자유로웠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쇠사슬’은 ‘쇠사슬에 매인 것과 같은 억압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 ‘쇠사슬_chain’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황제의 근위대장이 바울에게 감옥 밖에서 살 수 있도록 배려해주면서도, 미결수인 바울이 도망칠 수는 없도록 쇠사슬로 묶어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감옥 밖에서 머무는 미결수에게는 그 미결수의 한쪽 팔과 그 미결수를 지키는 군인의 한쪽 팔을 쇠사슬로 연결해 두곤 했습니다. 도망갈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왜 쇠사슬에 매여 있는지에 대해 해명하는데, 그것은 자신이 로마법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소망’으로 인함이라고 합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간절히 기다려온 그 소망,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소망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복음에 대한 반응(21-29절)
그에 대한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1)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유대에서 네게 대한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누가 와서 네게 대하여 좋지 못한 것을 전하든지 이야기한 일도 없느니라

바울의 변론을 들은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예루살렘으로부터 바울에 관한 편지를 받은 적도 없고, 누가 와서 바울에 대해 험담한 사람도 없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정말 바울을 전폭적으로 지지했기 때문에 한 말은 아니라 다소 사탕발림이었습니다.

(22) 이에 우리가 너의 사상이 어떠한가 듣고자 하니 이 파에 대하여는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기 때문이라 하더라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어디서든지 반대를 받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는 지금과 같은 정보가 빨리 오가던 때가 아니니까, 누군가가 그들에게 바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를 전해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을 무작정 배척하지는 않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들어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만날 날짜를 정했습니다.
(23) 그들이 날짜를 정하고 그가 유숙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에 대하여 권하더라

약속한 날짜가 이르자, 바울을 처음 방문했던 유대인 중 높은 사람들만이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관심이 있는 유대인들까지, 많은 사람이 바울이 가택 연금되어 있는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모였습니다.
본문의 ‘강론하다’는 ‘자세히 설명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은 ‘구약성경’을 일컫는 표현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증언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나사렛 예수님이심을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을 찾아온 유대인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 ‘하루 종일’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특히 ‘아침’이라는 말은 ‘새벽’ 또는 ‘동트는 시각’을 뜻하는 말입니다. 즉 유대인들은 바울과 약속한 날이 밝자마자 바울을 찾아왔던 것이었습니다. 그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물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울은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제가 30대 중반이었을 때, 공산권 국가에서 성경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주일을 가르친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제 체력은 왕성했음에도, 밤이 되었을 때는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인생 말년에 접어들었고, 지병에도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팔에는 쇠사슬도 있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것은 로마에 있는 유대인들을 위해서, 주님 안에서 그들을 살리기 위해,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던진 것과도 같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이러하였습니다.
(24)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동일한 공간에서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었음에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성경에서뿐만 아니라, 우리의 신앙 경험에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와 동일한 마을에 있는 교회에서 동일한 목회자로부터 동일한 복음을 들으며 신앙생활 했음에도, 우리는 지금 주님 앞에 있지만, 지금 주님과 등지고 있는 사람도 참 많지 않습니까? 오직 주님의 은혜라는 말 외에는 설명이 불가합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그 말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아니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때 바울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25-28) 서로 맞지 아니하여 흩어질 때에 바울이 한 말로 이르되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우둔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오면 내가 고쳐 줄까 함이라 하였으니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 그들은 그것을 들으리라 하더라

이 말씀은 이사야 6:9-10을 인용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는 것뿐만 아니라 삶으로 들으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영원히 구원해 주시려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을 자처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예 귀로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이 구원이 이방인에게로 보내어진 줄 알라”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방인은 이스라엘 백성과는 달리,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을 들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부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에게까지 전해지게 되었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다는 것입니다. 참 신비하고도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연금 생활 2년 요약(30-31절)
28장으로 구성된 사도행전은 이렇게 막이 내리고 있습니다.
(30-31) 바울이 온 이태를 자기 셋집에 머물면서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것을 담대하게 거침없이 가르치더라

바울은 싸구려 헛간 같은 셋집에 2년 동안 연금되어 있었는데,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했다고 합니다. ‘영접하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사람들이 계속해서 찾아왔고, 바울을 계속해서 그들을 영접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찾아온 사람들에게 전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라고 질문하면서 사도행전의 막이 올라갔습니다. 물론 이때 제자들이 꿈꾸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달랐습니다. 하지만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신 후에, 제자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의 막이 내리면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의 주인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고 증거합니다. 즉 사도행전의 주제, 우리 그리스도인이 꿈꾸고 살아야 할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온전히 임하는 곳입니다. 즉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다스림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도행전의 주역입니다.

또 사도행전은 사도인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님을 기다리며 기도했고, 마침내 성령님께서 임하신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한 사도들은 자신들이 한 번도 배우지 않았던 언어로 말하게 되었고, 또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말씀을 듣고 믿게 된 사람들이 3,000명, 5,000명이나 되었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에는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만 같습니다. 로마제국이 복음화가 되었다든지, 사도들이 다 대교회를 담임하게 되었다든지로 마침표를 찍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도들은 순교를 당했고, 바울도 가택 연금된 것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어가셨고, 지금까지 이어오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세상의 나라나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이며,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워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가치관을 추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힘이 되심을 삶으로 증명하는 사람이고, 그런 사람은 변질의 인생이 아니라 변화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의 삶이 각자의 사도행전으로 엮어지기를 소망하고,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두 달여 동안 새벽기도회 시간을 통해서 사도행전과 더불어 말씀의 여행, 믿음의 길을 걷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이 걸었던 그 길을 확인했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 길을 걷게 하여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데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많은 믿음의 사람을 통로로 삼아주셨듯이, 이제는 우리 각자가 그 역할로 써 주시기를 소망합니다.
사도행전의 사람들이 온전해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온전하지 않은 상태로 부름을 받아서 점점 더 온전하여 갔듯이, 허물투성이인 우리도 그렇게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우리가 언제나 세상의 나라나 나의 제국을 꿈꾸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고, 그 나라를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우리의 매일 매일을 각자의 행전으로 엮어가게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의 인생길은 크게 소명을 받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과 고난을 겪은 ‘예루살렘으로 길’, 그리고 소명을 보여주는 ‘로마로 가는 길’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인생에는 어떤 길이 있었습니까?
2.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였고, 어떤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까?
3. 바울은 가택 연금된 셋집에서도 하나님의 나라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삶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4. 자신의 삶을 사도행전으로 가꾸고, 변화의 인생을 살며, 하나님을 자신의 힘으로 삼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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