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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사도행전(새벽)

누가복음 7장 1-17절

누가복음 7장 1-17절
찬송가 206장 ‘주님의 귀한 말씀은’

4.15 총선에서 미래한국당의 비례대표로 당선된 시각장애인 김예지 당선인은 ‘장애인 안내견의 국회 회의장 출입 논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18일에 밝혔습니다.

"안내견은 시각장애인의 눈이자, 동반 생명체 역할을 하는 존재이지 해가 되는 물건이나 음식물이 아니다”

그동안 국회는 국회 본관 내 본회의장과 상임위원회 회의장 등에 안내견이 출입되는 것을 관례적으로 금지해왔습니다. 2004년 17대 국회에서 시각장애인으로는 처음으로 국회의원이 된 정화원 전 한나라당 의원이 안내견 동반을 시도했지만, 국회사무처에서 허락하지 않아서 보좌진의 안내를 받아 출입했었습니다. 이 기사에 대한 댓글들 중에 한 댓글이 제 주목을 끌었습니다.

“개만도 못한 것들도 출입하는데, 개가 왜 못들어가나! 그것도 안내견이!”

민생을 외면하고 파행을 일삼던 국회에 대한 국민들의 부정적인 정서를 대변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수가성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 청하자 그 여인은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라며 화들짝 놀랐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의 잡혼으로 혼혈이 된 사마리아인들을 개만도 못하다고 경멸했으니, 예수님의 요청에 사마리아 여인이 놀란 것은 당연했습니다.
세리였던 레위(마태)의 초청을 받은 예수님이 그들 무리와 함께 식사하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 타당하냐며 비난했습니다. 세리는 로마제국을 대신해서 세금을 수탈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세리를 이방인이나 창기와 같이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습니다. 세리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이 이 정도인데, 로마 제국의 군인들에 대한 유대인의 반감은 더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에 대해서는 반감은커녕 칭찬 일색입니다. 백부장 또는 백인대장은  로마군의 80여 인원으로 구성된 부대의 지휘관으로, 제1백인대장의 경우 일반 백인대장들이 지휘하는 병력의 2배인 160여 명을 지휘했습니다. 백부장은 최소 15년 이상의 복무경험과 뛰어난 실력을 겸비했기 때문에 로마군의 실질적인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은 잔인하고 포악하기로 유명했습니다. 이런 로마군인들을 거느리는 백부장의 위세야 말로 대단했을 것임은 자명합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백부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잔인무도한 군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놀라신 백부장의 믿음 (1-10)

(2) “어떤 백부장의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었더니”

고대 시대에 종은 재산이나 재물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종을 사랑할 정도로 아끼고 있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새번역은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고 해석했습니다. 아마도 일을 잘하는 종이었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고, 그를 잃은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손해였기 때문에 살리고자 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백부장이 죽어가는 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에게 보낸 사람이 다름 아닌 유대인의 장로들이었습니다.

(3-4)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청한지라 /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아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점령당한 유대인과 점령군의 지휘관 백부장은 물과 기름과도 같이 어울릴 수 없는 사이입니다. 게다가 유대인들이 개보다 못하게 여기는 이방인의 부탁, 그것도 하찮은 존재에 불과한 종을 살려달라는 요청을 받아들였다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유대인들이 존경해마지 않는 장로들이 청년 예수에게 백부장의 종을 구해달라고 간절하게 간구했다는 사실 앞에서 백부장은 우리가 생각했던 포악하고 잔인한 인물과는 전혀 다른 인품의 사람임이 틀림없습니다.

(5) “그가 우리 민족을 사랑하고 또한 우리를 위하여 회당을 지었나이다 하니”

백부장은 로마 식민지의 유대인을 핍박하지 않고,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종교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회당을 지어주기까지 했습니다. 백부장의 사람됨을 파악하신 예수님은 그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멀지 않은 그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부장은 바로 벗들을 보내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6b-7a) “... 주여 수고하시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극구 사양했습니다. 마치 떨기나무에 현현하신 하나님 앞에서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한 모세와 같이 백부장은 자신은 예수님을 감히 대할 자격조차 없는 비천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이어서 “...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 나도 남의 수하에 든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병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7b-8) 라고 고백합니다. 메시아를 소망하던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백부장의 입에서 나온 주님을 향한 놀라운 믿음의 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주님을 죽어가는 병자를 말씀만으로도 치유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고 있습니다.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믿음은 들음에서 시작합니다. 가버나움의 점령군 신분인 백부장은 가버나움에서 일어나는 온갖 소식을 보고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청년 예수의 소식을 보고받았습니다. 가버나움을 사역의 거점으로 정한 청년 예수가 회당을 다니면서 전한 말씀과 예수께로 나온 많은 병자들이 치유되었다는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 믿음이 성장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들음을 통해서 시작할 수 있지만, 믿음은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의탁해야지만 비로소 성장하게 됩니다. 백부장의 신분과 시골 청년 예수의 신분은 현격한 차이가 있습니다. 백전노장의 위풍당당한 백부장이 남루한 차림의 시골 청년 예수에게 “주여”(6)라고 존칭한 것도 놀라운데, 계속해서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6-7, 새번역) 하면서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며 주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의탁했습니다. 예수님은 백부장의 믿음을 놀랍게 여기시고,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9)라고 하시면서 백부장의 간구대로 말씀만으로 죽어가는 종을 치유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모든 말씀을 백성에게 들려 주시기를 마치신 후에 가버나움으로 들어가시니라”(1)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가버나움에 오시기 전에 예수님은 평지수훈을 통해 제자들에게 “4복과 4화”에 대해서, 원수를 사랑할 뿐 아니라 미워하는 자를 오히려 선대하라고 말씀하셨으며, 악한 마음을 버리고 선한 마음으로 살라고 말씀하신 후에 지금까지 들은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흘려보내지 말고, 삶속에서 반드시 행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평지수훈 말씀을 그대로 삶속에서 실천하며 살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로 예수님을 “주여 주여” 하며 추종하고 있는 무리들 중에서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신 열두제자들 중에서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개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이방인인 백부장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백부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유대인을 선대하고 회당을 지어줄 정도로 유대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 그리고 예수님이 놀랍게 여기실 정도의 굳건한 믿음의 소유자가 되었는지 성경을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점은 그가 자비로운 사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평지수훈 중에 주님께서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 6:36)”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자비로우심”은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 6:27-28)“는 주님의 말씀에 축약되어 있습니다.
점령군으로 가버나움에 진입한 로마군을 유대인들은 원수로 대하며 적대감을 표출했지만, 로마제국의 백부장은 자신을 미워하고 저주하는 유대인들을 폭력으로 억압하지 않고, 그들의 종교와 문화를 존중했고 그들에게 회당까지 지어줄 정도로 자비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짐승과 동일하게 취급하던 노예를 사랑으로 품고, 죽어가는 종을 살리려고 청년 예수에게 자신을 한없이 낮춘 자비한 인품의 소유자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백부장을 통해 우리가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점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믿음의 바탕이 될 때만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속에 자비함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의 소유자가 아닙니다.


과부의 아들을 살리시다 (11-17)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와 많은 무리와 함께 가버나움에서 남서쪽으로 약 40km 지점에 위치한 나인성을 방문하셨습니다. 성문에 거의 도착했을 때 운구행렬과 마주쳤습니다.

(12)“ ...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 그것도 남편을 잃고, 독자도 잃은 과부의 슬픔과 아픔이 얼마나 클지 감히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작가 박완서씨는 1988년 남편을 잃은지 세 달 만에 전도유망한 외아들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부산 큰 딸집에 가 있는 동안 겪은 고통과 분노, 절망감에 내뱉은 신에 대한 저주와 항의, 그러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을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눈물겹게 묘사했습니다.

”수도원의 십자가 상 아래 엎드려 데굴데굴 구르며, 신에게 대든다. 왜 내 아들을 데려가셨소. 한 말씀만 하소서“

중국 고사에 의하면 새끼 원숭이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내장을 갈라보니 너무 애통한 나머지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독자를 잃은 과부를 보시고 예수님은 불쌍히 여기셨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불쌍히 여기셨다”고 해석된 헬라어는 “스플랑크니조마이”입니다. “스플랑크니조마이”를 원어의 뜻대로 해석하면 “애간장이 떨리고 끊어질 것처럼 아프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독자를 잃고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진 듯한 고통 속에서 데굴데굴 구르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과부의 슬픔을 그대로 느끼시고 그녀를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 주님은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고통과 슬픔과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 우리를 주님께서는 ‘스플랑크니조마이’ 하십니다.

예수님은 관에 가까이 가서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에서 19절은 죽은 사람이나 그의 뼈 혹은 무덤을 만질 경우 부정해진다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죽어가는 종을 살리신 주님께서 굳이 시체가 있는 부정한 관에 손을 대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말씀만으로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었을 것인데 말입니다. 한센병자가 예수님께 나왔을 때 예수님은 부정한 한센병자에게 직접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고,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하시면서 그를 치유해주셨습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말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적인 만남은 말과 함께 터치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관에 손을 대시고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14)고 말씀하시자,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15). 그리고 살아난 아들을 과부에게 주었다고 본문은 증거합니다. 과부는 죽었던 아들이 살아서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오는 기쁨에 어쩔 줄 몰라했을 것임을 자명합니다.
죽은 외아들을 다시 살린 장소가 바로 나인성입니다. 나인(Nain)은 성의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 단어의 의미는 “즐거운 곳”입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직접 그들의 아픔에 손을 대어 터치하면서 그들의 아픔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주셨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주님의 터치를 받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터치가 한 주일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주님의 말씀 속에서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서 내가 죽어야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됩니다. 말씀 안에서 무릎을 꿇을 때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통해서만 나의 삶은 비로소 기쁨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주님 안에서 온전히 무릎을 꿇을 때, 온전히 죽을 때, 하나님의 터치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터치를 통해 기쁨을 회복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받을 때만 우리의 삶이 비로소 즐거운 곳(Nain)이 됩니다.

하나님의 터치를 받을 때만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품는다는 것은 이웃의 아픔과 슬픔과 약함에 우리가 공감하고 기꺼이 손을 내밀어 터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웃을 섬긴다는 것은 말 또는 물질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말 또는 물질로 섬기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선교지에 선교비를 보낸 것으로 사역을 다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아픔과 약함을 우리가 공감하고 터치해야 합니다. 그때 바로 나병환자가 깨끗하게 치유된 기쁨, 죽어가는 종이 치유된 기쁨, 죽은 아들이 부활하게 된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게 됩니다.

이 시간 말씀 안에서 무릎 꿇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며 오늘 하루를 시작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기쁨의 터치가 가득한 복된 시간들로 채워져갈 것임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무런 의미 없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을 우리를 구원해주신 주님의 자비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자비하심을 온전히 품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베풀며 살아갈 것을 소망합니다. 말씀을 듣는 것으로만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 안에서 무릎을 꿇고 온전히 죽게 해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내가 죽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 안에서 살아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코로나19로 인해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을 위해 간구하오니, 이들이 건강하게 치유되는 기쁨을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사태로 인해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회사들을 위해 간구하오니, 힘든 이 순간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앞으로도 헤쳐나가야 할 수많은 난관이 있음에 주님 앞에 겸손히 무릎 꿇고 주님의 자비하심을 구하며 서로를 위로하며 주님의 기쁨을 나누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주시옵소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누가는 신앙의 모범생으로 왜 이방인인 백부장을 택했을까요? (눅 1:1-4 참조)
2. 이방인인 백부장이 유대인들로부터 인정받게 된 이유를 나열해보세요.
3. 백부장의 입장에서 내 주변을 살펴보면 나는 어떤 점을 반성하게 되나요?
4. 이웃의 슬픔과 고통에 얼마나 함께 하고 있습니까?
5. 과부의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켜주신 주님의 터치를 경험해보았습니까? 경험해보지 못했다면 이유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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