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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8:1-14

창세기 8:1-14절
찬송가 623장 ‘주님의 시간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그를 신뢰하고 순종하는 자들을 소수의 남은 자라 할지라도 구원하시고 구출하신다는 진리를 설명합니다. 세상에 내려진 구원의 놀라움과 은혜는 세상에 내려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배경을 이해할 때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홍수로 나타난 하나님의 심판은 인간의 행동과 관련 없이 일어나는 맹목적이고 맹렬한 폭력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 때문에 의도적으로 계획되어 나타난 현상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사실은, 인간의 상태는 홍수 심판 이전과 이후에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심판이 인간의 마음 상태를 개조하거나 바꾸지 못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홍수심판으로 인간의 모든 세대를 쓸어버리셨어도 하나님의 심판은 정당했을 것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와 긍휼을 베푸셨습니다. 인간의 회복 불능상태에도 불구하고 땅은 유지되었으며, 노아와 맺어진 언약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하는 역사의 견고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심판에서 회복(1-5)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에게 맡기신 생명들을 기억하셨다는 문장이 앞선 홍수의 시작과 반대로 심판의 일시적 정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한글 성경에는 없지만, 원문과 영어 성경에서는 ‘그러나 하나님이’라고 1절이 시작합니다. ‘기억하사’라는 단어는 단순히 ‘머릿속에 떠올리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뚜렷이 새겨 항상 마음에 깊이 간직한다’는 의미가 더 원어적 해석에 가깝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하나님께서 홍수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노아의 가족과 방주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마음에 새겨 놓은 것처럼 한시도 잊지 않고 늘 생각하며 지켜 주셨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에서 바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다양한 용례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의미는 공기의 운동으로 생기는 바람을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용어가 하나님과 관련되어 쓰일 때는 구약에서 등장하는 ‘성령’을 언급할 때 쓰입니다. 이 용어가 인간에 대하여 쓰일 때는 호흡, 마음, 정신, 생명 등을 가리킬 때 쓰입니다. 이 많은 용례 중에, 오늘 본문에서는 성령의 활동과 공기의 운동을 나타내는 바람을 동시에 나타낼 수 있는 이중적 의미로 쓰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본절의 바람의 모습을 토네이도, 태풍 정도의 규모로 생각할 수 있지만, 홍해 바닷물을 가르고 바다가 마른 땅이 되게 하였던 출애굽기에 나타났던 바람의 크기와 세기와 비교할 수 없는 정도의 위력이라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2-5)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문이 닫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치매 물이 땅에서 물러가고 점점 물러가서 백오십 일 후에 줄어들고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 물이 점점 줄어들어 열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산들의 봉우리가 보였더라

2절은 같은 이미를 사용하여 창세기 7장 11-12절의 반대적 현상을 서술하는데, 이는 땅이 ‘큰 깊음의 샘들’을 터뜨린 것과 ‘하늘의 창문들이’ 열린 것과 ‘비’가 쏟아진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이 깊음과 수문은 닫혔고, 비는 멈췄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3절부터는 중요한 시간 길이와 일자가 자주 언급되면서 물이 지속적으로 마르게 것을 서술하는 일에 이정표 같은 역할을 합니다. 마침내 방주는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 이렛날’에 머무르게 되어, 방주가 땅에 잠시 머무를 때까지 처음 비가 내린 때로부터 5개월이 걸렸음을 짐작할 수 있게 알려줍니다. 4절에 ‘방주가..머물렀으며’라고 표현된 구절에 ‘머물렀으며’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누아흐’라는 단어인데, 편안히 휴식을 취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방주의 밑바닥이 아라랏 산에 안전히 닿아 머물게 된 것은 홍수 심판 이후 세상이 맛보게 된 첫 안식이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안식(누아흐)’ 하게 됨으로써 노아의 이름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자는 ‘노아(노아흐)’에 대한 언어유희에서 노아가 가장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그 아버지 라멕의 소망을 성취했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배가 착륙한 후에 대략 73일 동안 물이 충분히 줄어들어서, 노아가 아라랏 산의 봉우리들을 볼 수 있었다고 5절은 증언합니다. 이것이 처음 나온 땅의 징표였고, 지친 노아와 가족들에게는 의심할 바 없는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비가 땅을 잠기게 한 것은 40일밖에 안 되었지만, 물이 완전히 빠지기까지 기나긴 다섯 달이 걸린 것입니다.

여름마다 홍수를 경험하며, 비슷한 현상을 볼 때가 있습니다. 피해는 순식간에 발생하지만, 복구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때가 있습니다. 인생에서 펼쳐지는 많은 문제와 환난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지 않았는지 반추해 보게 됩니다.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방주의 움직임 그리고 그와 비슷한 성도의 구원 여정도 아라랏산에 안착한 방주의 모습처럼, 주님의 은혜 가운데 안식을 찾기를 소망합니다.

기다림의 시간(6-14)

(6-9) 사십 일을 지나서 노아가 그 방주에 낸 창문을 열고 까마귀를 내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 그가 또 비둘기를 내놓아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발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안 자기에게로 받아들이고

노아는 까마귀와 비둘기를 7일 간격으로 내보내 물이 감하는 것을 측정했습니다. 산봉우리가 드러난 지 사십일이 지난 후에 노아는 처음으로 ‘까마귀’를 내놓습니다. 비둘기와 달리 까마귀를 내놓은 이유가 전혀 진술되지 않지만, 까마귀도 같은 임무를 받은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까마귀는 맹금류이자 썩은 고기의 포식자로서 비행 상태를 더 오래 유지하면서 떠다니는 동물 사체에서 음식물을 얻느라 왕래했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까마귀를 먼저 소모품으로 내보낸 것은 음식으로서나 제물로서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이런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볼 때, 까마귀가 방주에서 떠난 것은 과거의 부정한 것들이 제거되고 새로운 세상의 창조가 새 출발을 했음을 의미했다고도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8절에서 노아는 비둘기에게 물이 더 ‘줄어들었는지’ 알아내기 위해,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것처럼 보라고 지시합니다. 노아는 방주에 갇혀 있고, 나중에 직접 마른 땅을 볼 때까지는 배에 함께 있는 동물을 의지해야 했었습니다. 그중에, 비둘기는 땅의 표면에 물이 있으면 서식하지 못하는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 사용된 ‘땅’이란 단어는 ‘마른 땅’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원문에 가까운 해석입니다. 이로 짐작해 보면, 노아는 비둘기를 통해서 인간이 살 수 있는 마른 땅을 찾고자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9절까지의 상황을 보자면, 비둘기는 발을 디딜 곳을 찾지 못하고 지친 날갯짓을 하며 다시 방주로 돌아왔고, 노아는 손을 내밀어 비둘기가 돌아온 것을 맞아 주었습니다.


(10-12) 또 칠 일을 기다려 다시 비둘기를 방주에서 내놓으매 저녁때에 비둘기가 그에게로 돌아왔는데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가 있는지라 이에 노아가 땅에 물이 줄어든 줄을 알았으며 또 칠 일을 기다려 비둘기를 내놓으매 다시는 그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더라


다시 칠 일을 기다린 후에 비둘기를 두 번째 날려 보낸 것에 기대를 한 것은 비둘기가 생명의 첫 증거인 ‘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새 잎사귀는 새로 난 것이어서 땅이 다시 초목을 내고 있음을 확인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징표로 노아는 물이 줄어든 것을 알았습니다.

사복음서 모두 예수님의 세례에 성령이 하강하는 ‘비둘기’의 형체로 예수님에게 임했던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통한 첫 번째 창조를 홍수로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고 오늘 본문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비둘기를 통해, 다시 창조된 세계에 대해서 알려주듯이, 신약에 나타난 비둘기 형상의 성령이 예수님께 임한 사건을 통해, 성도들에게 임할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날 것이며, 그분의 사역을 통해 확장되고 완성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또 한 번의 칠 일이 있고 난 뒤에 세 번째로 비둘기를 보내고, 마침내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로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은 비둘기에게는 새 보금자리를 찾았다는 의미가 되며, 노아에게는 생명과 안전이 지속될 것이라는 안심을 주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과 12절에 ‘기다려’라는 단어는 홍수와 재앙을 만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 시대 성도들의 자세가 어떻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10절에서 사용된 ‘기다려’의 히브리어 의미는 ‘비틀다’는 의미가 있는 말로 출산하는 여인이 고통을 참지 못해 몸을 비틀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볼 때 노아는 땅이 말라 방주에서 나가기를 간절히 바라며 고통 가운데 7일간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느끼며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을 의미했던 10절의 ‘기다려’ 라는 단어와 대조적으로, 12절에 나온 ‘기다려’라는 히브리어 단어의 뜻은 ‘바라다’, ‘앙망하다’로 번역되는 용어로서 기쁨과 소망 가운데서 앞날을 기대하는 것을 표현합니다. 10절에서 나타난 고통에서 신음하는 기다림에서 12절에 표현된 기쁨으로 기다리는 노아의 자세 변화는 비둘기가 가지고 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오늘 본문 11절 ‘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는 표현 앞에 히브리어 감탄사 ‘자! 보아라’라는 단어를 두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아 보이는 코로나의 상황은 우리에게 노아가 고통 속에 소망없이 기다려야 했던 그 기다림의 의미가 무엇인지 공감하게 했습니다. 비둘기를 통해 가져온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통해 노아의 기다림이 고통과 절망을 넘어 소망과 기쁨의 기다림으로 바뀌었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의 인생 가운데도 보여주시는 새 희망의 작은 표징을 통하여, 우리가 직면하고 아파하는 고난과 환난도 기쁨과 소망을 품는 기다림으로 바뀌길 기도합니다.

(13-14)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며, 모든 생명체를 죽음 가운데로 몰아넣었던 물이 모두 사라지고 땅이 말라 다시 옛날 모습을 되찾은 것은 노아에게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운 일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1개월 동안 굳게 닫혔던 방주의 뚜껑을 노아는 마침내 열었습니다. 그러나 노아는 즉각 방주에서 내리지 않고, 둘째 달 스무이렛날까지 기다립니다. 다시 시작하는 노아에게 주어진 상황과 환경이 어떠했겠습니까? 노아에게 펼쳐진 새 세상을 마치 에덴동산처럼 착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비록 새싹들이 나기 시작했겠지만, 산과 들판은 그 엄청났던 홍수로 인해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여기저기 있었을 것이며, 짐승의 시체, 사람들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을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홍수가 시작되기 전에 그가 보았던 세상, 비록 인간 사회는 죄악으로 가득했지만, 자연환경으로 따지면 더없이 좋았던 그 세상은 사라지고 없으며 폐허가 된 그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막막한 현실을 또 일궈가며 살아가야 했을 노아와 가족들에게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작업 또한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벗어나는 우리 역시도, 전혀 다른 현실과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이 쉬운 과정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 노아에게 하나님은 여전히 말씀하시며, 그가 다시 일어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은 계속 말씀으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을 정리해 보면, 홍수라는 피할 수 없는 심판 속에서, 은혜를 입은 노아를 하나님께서는 기억하여 주시고, 홍수를 멈추게 하시며, 또한 홍수로 인해 물이 가득 찬 육지 또한 회복시켜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 펜데믹으로 힘들어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에게도, 노아가 받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은 우리가 희망과 소망 중에 기다릴 수 있는 ‘감람나무 새 잎사귀’라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긴 기다림으로 어렵고 힘든 과정의 연속을 살아가고 있지만, 말씀으로 말씀하시는 주님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말씀 위에 굳게 세우실 것이라는 그 믿음을 붙잡고, 오늘도 소망 없이 살아가며 낙심한 우리 주위에 주님의 은혜를 전하는 통로로 살아가시는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을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홍수심판에서도 베푸셨던 그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준행하며, 그 말씀 위에 굳게 서는 은혜 있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저희의 삶을 통해 주의 영광과 주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는 귀한 은혜의 통로 되게 하옵소서. 대림절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주님의 성탄과 다시오심을 깊이 묵상하는 기간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하나님께서 홍수심판 속에서 노아를 기억하신 은혜를 생각할 때, 죄악의 홍수에 살아가고 있지만, 주님께서 잊지 않으시고 나를 기억하신다는 의미가 얼마나 감사한지 생각해 봅시다.
2.홍수가 멈추고, 물이 마를 때 하나님께서는 바람을 이용하셔서 회복시키셨습니다. 내 삶에도 기다리는 성령의 바람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면 무엇이 있습니까?
3.지면에 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렸던 노아의 긴 기다림처럼, 내 삶에도 기다리는 긴 기다림이 있다면 무엇이 있으며, ‘감람나무 새 잎사귀’ 같이 나타난 하나님의 소망 징표가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4.심판이 지나갔던 황폐한 자리에서 다시 살아야 했던 노아의 현실처럼, 막막한 현실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지금 말씀 앞에서 어떻게 주님 앞에 순종하며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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