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8:15-22
찬송가 447장 ‘이 세상 끝날까지’
창세기 8장의 마지막 부분인 본문에서 하나님은 두 번 말씀하십니다. 한 번은 노아에게 말씀하시고(15-17절), 또 한 번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말씀하십니다(21-22절). 하나님이 노아에게 마지막으로 말씀하셨던 것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기 전이었습니다. 이제 노아는 방주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리고 노아가 하나님께 들은 명령은 이제 방주를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방주에서 나왔더라(15-19)
(15-17)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드디어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방주에서 나오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방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명령(창 7:1)과 평행을 이루는데, 본문에서는 특별히 가족 구성원이 언급됩니다. 이들 여덟 사람은 새로운 인류이고, 이들의 앞에는 새로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방주에 들어갔던 노아의 가족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로 온전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사실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 이전에 이미 땅이 정착할 정도로 준비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지면에서 물이 줄어들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날려 보낸 비둘기가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노아가 직접 방주 뚜껑을 열고 바깥을 보았을 때도 땅이 모두 말라 있었습니다(창 9:13-14).
그러나 노아는 스스로 방주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킨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방주 생활이 지긋지긋할 만도 했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방주에서 한 발자국도 뗄 생각이 없는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우리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앞세우는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킴으로 인류의 중시조(重始祖), 두 번째 시조가 된 노아의 삶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말씀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생물들을 방주에서 계속 살도록 방치하지 않으셨습니다. 방주는 거주지가 아니라 일시적인 피난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셨고,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방주를 떠나는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생물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창조 때에 물고기와 새에게 하셨던 축복(창 1:22)이 이제 모든 생물에게 확대됩니다. 이것은 홍수 이후 시대가 새로운 피조 세계의 시작임을 나타냅니다.
(18-19)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하나님께서 1년 17일 전에 닫으셨던 방주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노아는 가족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드디어 방주 속의 요란한 소음과 역겨운 냄새, 그리고 연일 이어진 중노동으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창세기 6장 13-22절 및 7장 1-5절에 나타난 순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노아에게 말씀하셨고, 노아는 자신에게 지시된 것을 묵묵히 준행하였습니다. 노아는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믿었고, 방주에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방주를 떠날 때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노아는 어떤 상황에서도 일관되게 행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마음가짐과 행동이 바뀌는 사람들의 행태를 꼬집은 말입니다.
우리도 이러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마음과 때때로 변하는 행동은 일관성과는 거리가 멉니다. 그래서 방주에 들어갈 때와 방주를 나올 때에 한결같이 말씀을 준행하였던 노아의 삶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일관되게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시다.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20-22)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1년 17일 만에 자유인으로 땅을 밟은 노아의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가족들끼리 서로 껴안으며 다시 땅으로 나온 것을 자축하든가, 하늘을 향해 가슴을 펴고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들이마시든가, 깨끗한 물을 찾아 목욕부터 하든가, 대지를 한번 마음껏 달려 보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순간입니다. 그러나 그 감격적인 첫 순간에 노아가 염두에 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습니다. 2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0, 새번역) 노아는 주님 앞에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집짐승과 정결한 새들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서,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물을 골라서 제사 즉 예배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방주에서 나올 때 방주 속에 있던 모든 생물도 함께 나왔습니다. 새들은 소리 높여 노래 부르며 날개 퍼덕여 창공으로 날아오르고, 짐승들은 괴성을 지르며 대지를 질주하고, 곤충들은 이리저리 마음껏 뛰어다녔을 것입니다. 그 가운데 오직 노아의 여덟 식구만 먼저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렸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 가족이 어떤 행위든 자기 자신들을 위한 행위를 먼저 하였더라면, 그 순간 그들은 다른 짐승들과 구별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새신자반’에서 보았듯이 짐승과 생령인 인간의 본질적인 차이는 예배에 있습니다. 1년 17일 만에 방주에서 나와 그 어느 때보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 해야 할 순간에 노아가 제일 먼저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부터 드렸다는 것은 노아에게는 예배가 삶이 되어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가인과 아벨 시대에도 사람들은 제단에 예물을 드렸지만, 제단이란 용어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서 등장합니다. 이것을 노아가 홍수 이전에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해석하는 일부 학자들도 있는데, 그것은 지나친 해석입니다. 방주에서 내린 노아의 첫 행동은 방주 이전의 그의 삶과 방주 안에서의 그의 삶의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어떤 상황에서도 영이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예배하였던 노아의 삶은 우리에게 귀감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 시대에도 예배의 사람을 찾으시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특히 본문은 노아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고 기록합니다. 번제는 가죽을 제외한 짐승의 모든 것을 태워 드리는 제사입니다. 이 단어 역시 성경에서 사용되기는 이곳이 처음입니다.
그렇다면 노아는 무엇을 번제로 삼았을까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왜 정결한 짐승을 7쌍씩 방주에 태웠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정결한 짐승은 번제에 사용되는 제물이었습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홍수 이후 당장 먹을 채소와 곡식을 구할 수 없는 노아와 그의 가족에게 모든 산 동물을 먹을거리로 주셨습니다(창 9:3).
만일 동물이 사람에게 먹을거리로 주어지지 않았다면 홍수로 모든 것이 망가진 세상에서 노아 가족은 생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결한 짐승을 7쌍씩 방주에 태우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였습니다. 비록 홍수는 피할 수 없는 필연적인 심판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비극적인 사건을 은혜로 마무리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은혜로 마무리하신 것은 이전 창세기 말씀에서 이미 두 차례나 나타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심판하신 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메시아의 약속을 주셨고(창 3:15), 그들의 부끄러움을 가릴 수 있는 가죽옷도 주셨습니다(창 3:21). 또 가인에게 심판을 선언하신 후에는 사람들의 보복을 두려워하는 가인에게 그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증표를 주셨습니다(창 4:15).
창세기의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우리는 준엄한 심판에서 시작하여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께서 예비하시는 은혜로 끝나는 것을 목격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고난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의 끝에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가 있습니다. 심판에서 시작하여 은혜로 마치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신뢰하십시다. 그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십니다.
(21-22)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노아가 드린 제사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성경은 그 연기를 향기라고 표현합니다. 희생제물을 태운 매캐한 냄새를 하나님은 향기로 받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예배를 받으신 후 인류와 자연에게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와 자연을 축복하며 두 가지를 약속하셨고, 이에 대한 증표를 주셨습니다.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시리라는 것과 홍수 때처럼 모든 생물을 멸망시키는 일이 다시는 없으리라는 약속이었습니다.
먼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선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 때문에 계속 땅을 벌하셨다면, 이미 예전에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사라져 버렸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속 계획은 어릴 때부터 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는 대로 모두 갚아 주시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의 악한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다고 불평할 때가 많습니다. 세상의 악한 모습은 볼 줄 알지만, 자신의 내면에 악은 들여다보지 못함에서 오는 어리석은 불평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은 그분이 우리에게 무관심하거나 혹 게을러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너무 사랑하시기에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기회가 오늘 우리에게 하루라는 이름으로 또 주어졌습니다.
다음으로 홍수는 모든 사람과 짐승을 쓸어 버렸는데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는 선언도 매우 중요합니다. 홍수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전 지구적 차원에서 사람의 죄를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차원에서 죄 문제에 대처하실 것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성경에는 홍수 이후로 민족적 혹은 국가적 심판은 기록되어 있지만, 전 지구적 심판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에는 전 지구적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최후의 심판이 가까웠다는 것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예언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가지 약속을 보장하는 증표로서 계절의 규칙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과 몇 주 사이에 온 세상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추워진 날씨에 볼멘소리가 먼저 나오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에게 계절이 제때 찾아오는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약속하신 것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신실하게 지키고 계신다는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의 삶을 밀착시킨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한결같이 준행한 순종의 사람이었습니다. 또 노아는 영이신 하나님께 신실하게 예배한 예배의 사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러한 노아를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라고 평가합니다. 노아는 삶으로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였습니다.
한편 하나님은 인류의 죄악 때문에 시작된 심판을 여호와 이레의 은혜로 마무리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노아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오늘 우리에게까지 신실하게 지키고 계십니다.
주님의 성탄을 기리고 다시 오심을 대망하는 대림절에 우리의 믿음과 삶이 어떠한지를 직면하십시다. 그 직면을 통해서 우리의 한계를 넘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의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림으로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예배의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모든 상황을 직면하는 무릎을 하나님 앞에 꿇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노아와 같이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예배의 사람으로 우리의 삶을 가꾸어 가게 하옵소서. 우리에게 약속한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날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의 말씀에 내 삶을 밀착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내 삶에 밀착된 다른 것은 무엇입니까?
2.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에 따라 하나님에 대한 태도가 매번 바뀌고 있지는 않습니까?
3. 어떤 상황에서도 영이신 하나님께 예배하고 있습니까? 예배의 생활화, 생활의 예배화가 삶의 자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4. 고난의 끝에서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5. 계절의 규칙적인 변화처럼 내 일상에 주어지는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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