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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9장 18-29절

창세기 9장 18-29절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홍수 이후의 노아와 그의 아들들 (18-23절)

창세기 9장은 홍수 이후에 노아의 가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아담에게 주신 것과 동일한 복을 주셨습니다. 그 복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복이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8-19절입니다.

(18-19)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여기서 노아의 아들들의 이름이 모두 나오는 것은 이들이 살아서 방주에서 나온 것 자체가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큰 은혜였으며, 이렇게 구원받은 노아의 가족 하나하나가 육적으로 인류의 조상이 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노아의 자손들과 같이 우리 개개인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자리로 보내신 믿음의 자손들입니다.
과거 노아의 가족들을 통하여 믿음의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듯이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통하여 생명의 흩어짐이 일어나길 바라고 계십니다. 19절의 ‘퍼지니라’로 번역된 히브리어 ‘나파츠’는 ‘산산히 조각나다’, ‘흩어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흩으시는 것에 대한 성경 속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로 우리의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하나는 창세기 11장에서 후대에 바벨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하늘에 이르는 탑을 만들려 했던 사람들을 흩으신 일이고, 또 다른 하나는 사도행전 8장에서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신자들을 흩으신 일입니다. 바벨에서 일어난 흩어짐이 인간의 죄로 인한 육적인 흩어짐이었다면, 사도행전의 흩어짐은 복음의 전파를 위한 영적인 흩어짐입니다. 그러한 점에서 오늘 우리 각자의 삶의 자리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퍼트리시기 위해 복음으로 흩으신 자리임을 기억해야합니다. 그렇기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담에게만, 노아에게만 주어진 명령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방주 삼아 새 생명을 얻게 된 모든 신자에게 부여된 명령입니다.
노아 홍수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지만, 이 심판이 지니는 의미는 역설적이게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거룩한 ‘재창조’였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과거 악한 세상을 심판하신 후, 새롭게 재창조하신 땅에 먼저 오셔서 노아와 그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미리 거룩한 작업을 해 두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일하심의 방법은 오늘 우리를 각자의 삶의 영역으로 파송하실 때에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부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무작정, 또 무책임하게 흩으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가 가야할 곳에 먼저 가셔서 은혜와 능력의 작업들을 해 놓으신 후 우리를 보내시고, 흩으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매일 하나님에 대한 강한 신뢰와 함께 주님의 말씀을 능력삼아 담대히 각자의 삶의 영역으로 퍼지고, 흩어질 필요가 있습니다. 20-21절입니다.

(20-21)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홍수 이후 노아의 자손들은 하나님께서 일하심의 결과로 번성하기 시작하였고, 노아는 농부가 되어 포도를 경작하였습니다. 이는 창세기 5장 28-29절에 나타나는 노아의 아버지 ‘라멕’으로부터 시작된 노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의 성취였습니다.

(창세기 5:28-29) 라멕은 백팔십이(182) 세에 아들을 낳고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라멕은 노아가 때어날 때, 노아에게 ‘안식’과 ‘위로’이라는 뜻의 이름을 주며 하나님께서 노아를 통하여 저주 받은 이 땅에 큰 복과 안식, 위로를 주실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대의 결과로 새롭게 재창조된 새로운 땅에서 노아의 가족들에게 포도를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긴 시간 수고한 노아의 가족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과도 같은 은혜였습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포도와 포도주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식과 풍요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풍요에 대해 이사야 25장 6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사야 25: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

노아 홍수 이전에도 사람들은 포도주를 마셨겠지만, 성경에서 포도주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것은 오늘 이 본문이 처음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은혜는 특별했습니다. 하지만 이 특별한 은혜를 노아는 잘못 사용하여 범죄 하였습니다. 노아의 죄는 포도주를 마시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것입니다. 고대 종교 속 이방민족들은 술을 마시고 취하고, 성적으로 부끄러운 행동을 하는 것이 그들의 종교 행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죄 된 욕망에서 나오는 행동을 매우 싫어하셨습니다. 그래서 레위기 10장에 의하면 제사장은 술을 마시고 성막에서 활동하는 것이 금지되어있습니다. 레위기 10장 9절 말씀입니다.

(레위기 10:9)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명령하시는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질서 있게 행동해야 하며, 특별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파송하신 땅에서 깨어 말씀을 기준삼아 ‘거룩하고 속된 것’과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해야했기 때문입니다. 또 제사장은 성전에 들어갈 때 긴 옷을 입어야 했습니다. 이는 하체가 다른 사람에게 노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는데 이를 어기고, 제사장이 하체가 드러나는 것과 제사장의 하체를 보게 되는 것 모두를 하나님께서는 매우 엄히 다스리십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술에 취하고, 벌거벗은 몸을 드러낸 것이 무슨 그렇게 큰 잘못인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이는 노아가 그 당시 온 민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직접 예배하는 제사장적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노아의 이러한 행동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저지른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제사장에게 술 취하지 않음과 의복과 행실의 정결함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교의식에 한번 참여함으로 저절로 믿음의 생활이 이루어지는 존재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나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과 함께 ‘현실을 직면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존재임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방 민족들은 종교의식이라는 허망한 시간 속에서 자신들의 추악한 욕망을 드러냈으나, 신자들의 예배는 그 처음부터 예배의 자리가 곧 생활의 자리가 되고, 생활의 자리가 곧 예배의 자리가 되어야함을 하나님께로부터 명령과 가르침으로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곧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과 신앙의 모범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노아는 하나님의 이러한 가르침을 망각하였고, 그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방주의 일을 완성한 후, 그 이후의 삶의 목표와 방향성이 약해져 영적인 나태함에 빠지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어지는 22-23절입니다.

(22-23)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이어지는 노아의 이야기는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와 닮아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먼저 아담과 하와에게는 세 명의 아들이 있고, 그 중에 셋째 아들 ‘셋’을 통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이 이어지고, 첫째 아들인 ‘가인’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와 유사하게 노아에게도 세 아들이 있고 그 중 ‘셈’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이 이어지고 ‘함’과 ‘그의 자손’은 저주를 받게 됩니다.
이뿐 아니라 ‘노아의 죄악’과 ‘아담의 원죄’는 여러 부분에서 대비를 이룹니다. 먼저 의로웠던 아담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고 스스로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처럼, 의로웠던 노아도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먹고,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 채 잠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원죄 후, 서로 벌거벗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감추려고 하였습니다. 반면에 함은 자신의 아버지 노아가 벌거벗은 것을 보고 다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여기서 함의 행동은 단순히 아버지를 부끄럽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를 아담의 경우와 비교하여 보면 조금 더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뱀, 즉 사탄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를 먹게 하여 서로가 벌거벗은 것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와 부부의 관계가 망가지고, 파괴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담과 하와는 수치심으로 서로 가리게 되었고, 하나님에게까지도 피하며, 숨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노아가 벗었다는 것을 알린 (원어적의미로는 사람들에게 폭로한) 함의 행동은 과거 사탄과 죄의 결과와 같이 아버지와 아들들과의 신뢰와 권위의 관계를 파괴시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창세기 3장 14절에서 모든 관계를 파괴시킨 뱀, 즉 사탄이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는 것과 같이 함의 이 행동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게 된 것입니다. 24-27절입니다.


아들들에 대한 축복과 저주 (24-29절)

(24-27)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조롱거리로 여기고, 이를 다른 이들에게 폭로한 함과 다르게 셈은 야벳과 함께 노아의 벗은 몸을 보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쳐서 들어가 옷으로 노아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었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 또한 아담에게 일어났습니다. 창세기 3장 21절을 보면 벌거벗은 몸을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리고 에덴에서 쫓겨나던 아담과 하와의 몸을 하나님께서는 직접 가죽 옷을 만들어 입혀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렇기에 셈과 야벳은 옷으로 노아를 덮어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준 하나님과 같은 선한 일을 한 사람으로 기록된 것이며, 이에 대한 축복의 결과로 뱀 후손과 싸우게 될 여자의 후손 즉 예수님의 계보가 셈의 자손을 통해 이어지게 됩니다. 이를 종합해 보았을 때 아담과 노아의 이야기는 우리의 원죄라는 부끄러움을 가려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친히 동물의 피를 흘려 만드신 가죽 옷과 노아의 부끄러움을 가려준 셈의 선한 일과 연결되어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은혜를 예표합니다. 이에 대해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갈라디아서 3:26-27)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덮어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게 됨으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큰 그림으로 보았을 때,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함의 저주와 샘에 대한 축복은 개인의 범위를 넘어 하나님의 재창조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이 땅으로 들어온 사탄적인 죄의 모습을 저주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시대나, 오늘날 신약의 시대나 아담의 자손으로 난 사람 가운데 죄에 오염되지 않은 자는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이를 달리 말하면, 사람 가운데는 완전한 자가 아무도 없음을 의미합니다. 오늘 본문은 이와 같은 인간의 비참한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결국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덮어주었던 셈과 같이 죄를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구원을 얻게 된 신자들은 하나님의 장막 안, 즉 종국에 완성될 거룩한 예루살렘 안에 들어와 영원히 거하게 될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함과 같이 사탄의 일을 따르던 사람들은 최후 심판의 날 종과 같이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3-4절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우리를 괴롭히는 모든 고통과 눈물, 그리고 죄와 그 결과인 사망은 이 땅에 다시없을 물 심판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를 위해 친히 돌아가신 예수님의 은혜를 힘입어 영원한 생명의 길이 방주와 같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확실한 생명의 길, 즉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기에 종말에 있을 최후의 심판은 우리에게 두려움이 아닌 영원한 평안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28-29절입니다.

(28-29)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아멘

위대한 신앙의 사람 노아도 이전에 살았던 조상들과 마찬가지로 죽었습니다. 노아는 그 큰 홍수 심판에도 죽지 않고 살았으나 그도 결국 자신의 죄의 결과인 육체의 죽음 앞에서는 자유롭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죽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는다고 하여 모든 사람의 죽음이후가 똑같은 것은 아닙니다. 신자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예수님과 함께 할 영원한 은혜의 삶이 기다리고 있기에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죽을 때까지 신실하게 이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예수님께서 허락하신 구원의 은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시는 죄사함의 은혜를 기억하며, 앞으로의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영적으로 나태해지지 않도록, 또 예수님과 동행함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어려움을 믿음으로 직면하는 삶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는 모든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모든 죄를 덮어주시고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의 한계와 죄를 알고,
하나님을 찾고, 거룩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고백합니다.
우리에게 만약 예수님이 없었다면
나는 세상의 욕망과 똑같거나 더 추악한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노아보다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언제나 흔들리기 쉽고, 영적인 나태함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니,
오늘의 나의 믿음의 삶과 기도가
하나님께 더욱 매진하는 사명자의 삶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 결과 오늘 현실로 찾아오는 모든 어려움을 믿음으로 직면함으로.
하나님께서 맡기신 오늘의 사명을 넉넉히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노아와 같이 영적인 나태함이 나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경험이 있나요?
2. 오늘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영적인 나태함을 벗고, 직면해야할 믿음의 일은 무엇일까요?
3. 우리의 모든 허물과 부족함을 덮어주시는 예수님의 은혜를 우리는 어떻게 누리고 이해해야 할까요?
4. 예수님의 은혜와 함께 영적인 나태함을 극복해 나아갈 스스로에게 격려와 다짐의 메시지를 적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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