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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1:1-9

창세기 11:1-9
찬송가 322장 ‘세상의 헛된 신을 버리고’



시날 평지에 탑을 쌓자(1-4절)
모두 50장으로 구성된 창세기를 크게 2부분으로 나누면 1-11장은 ‘처음 세상 이야기’라고 할 수 있고, 12-50장은 ‘이스라엘의 기원_믿음의 족장들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앞부분_1-11장에는 4대 사건이 있고, 뒷부분_12-50장에는 4대 인물이 있습니다. 4대 인물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그리고 요셉이고, 4대 사건은 천지창조, 선악과 사건, 노아의 홍수 그리고 바벨탑 사건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4대 사건 마지막으로 ‘바벨탑’의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앞부분의 4대 사건 중, 천지창조를 빼고 나머지 세 개가 모두 인간의 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과 노아의 홍수 사건에 비하면 바벨탑 사건은 작은 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 인간은 실낙원 하게 되었고, 모든 인간에게 죽음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습니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이 땅의 모은 사람은 물론 땅 위의 동물들과 공중을 나는 새들도 모두 죽어야 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탑 사건은 ‘시날’이라는 한 장소에서 일어난 그 지역 사람들이 벌인 일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이 바벨탑 사건은 죄의 몸을 갖고 태어난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즉 이 바벨탑은 그 당시의 사람들이 짓다가 완성하지 못한 건물이 아니라, 유사 이래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대항하고,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오만해 하는 것을 보여주는 그림 언어와도 같습니다.

(1)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

이때까지 사람들의 말이 서로 통했던 것은 모두가 노아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노아 가족이 한 언어를 썼을 것입니다. 그 후손들이 한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말이 통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바벨탑의 시대는 노아 이후에 아주 많은 세월이 흐른 후입니다. 노아는 홍수 이후에도 350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어제 살핀 10장은 노아의 아들, 셈, 함, 야벳의 족보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야벳은 2대, 함은 3대, 셈은 5대까지 기록하고 있지만, 그렇게 해서 온 세상 곳곳으로 사람들이 퍼져나갔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류하며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를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동쪽으로부터 떠날 때의 일이었다’입니다. 그래서 새번역성경은 “사람들이 동쪽에서 이동하여 오다가”라고 번역하고 있고, 공동번역성서도 “사람들은 동쪽에서 옮아 오다가”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동방(동쪽)’은 바로 ‘에덴동산’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에덴동산은 ‘믿음의 본향’과도 같습니다. 그곳에서 점점 이동하였던 것은 점점 믿음과 상관이 없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과거에 굉장히 신실하게 보였던 그리스도인, 다른 사람들보다 봉사하는 일에 훨씬 더 열정이 있었던 사람 중에, 지금 믿음 생활을 하지 않는 분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도 처음부터 ‘믿음의 본향’과 같은 곳에서 멀리 떨어지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처음에도 ‘믿음의 본향’에서 조금만 떨어져 있다가 돌아가자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돌아갈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 멀리 나와 그곳이 어디인지를 잃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또한 ‘동방(동쪽)_케뎀’은 ‘믿음의 본향’이라는 ‘장소(지리)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 ‘태고(太古)’라는 ‘시간적 의미’도 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짓고, 홍수가 있을 때 1년 이상을 방주 안에 있으며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방주에서 나온 후에 포도주에 취해서 옷도 입지 않고 잠들었습니다. 세월이 그의 영적인 긴장감을 떨어뜨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는 물론 우리 주변에서도 처음에는 신실했었는데, 나중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하나님을 또렷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월(시간)은 우리를 성숙으로 인도하는 오르막길이 되기도 하고, 반대로 우리를 방탕하게 만드는 내리막길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 5:16)”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께 집중하지 않고, 세속적인 가치관에 눈을 맞추면, 그 인생을 부패하고 맙니다.

‘시날 평지’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있었던 바빌로니아 지역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곳은 넓은 평지가 있었고, 물이 풍부했기에 사람은 그곳이면 자신들이 원하는 도시를 건설할 수 있을 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이전에는 돌로 건물을 만들었는데, 돌은 아주 무거운 자재이기 때문에 높은 건물을 짓는 데는 한계가 많습니다.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의 기자에 있는 대피라미드(Great Pyramid of Giza)는 높이가 약 140m나 될 정도로 높습니다. 거기에 사용된 돌의 무게가 작은 것은 2t이고, 큰 것은 50t이나 됩니다. 그렇게 무거운 돌을 어떻게 그렇게 높이 올렸는지 신비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대피라미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입니다. 그리고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됩니다.
그런데 바벨탑을 지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벽돌을 만드는 법을 배웠습니다. 이것은 당시에 획기적인 발명품과 같았습니다. 흔히 여성 가사노동 해방 3대 발명품이 피임약, 분유, 세탁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현대인의 삶의 방향과 가치를 바꾼 최고의 제품이 ‘스마트폰’일 것입니다.
바벨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만든 벽돌이 건축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 이전에는 돌을 쌓고 그 사이에 진흙을 발라서 건축물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건축에 쓸 돌을 구워서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역청(아스팔트_칠십인역)’을 채취하여 끓여서 접착력을 높였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훨씬 쉬운 방법으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사람들은 벽돌로 건축하는 방법을 알게 되고, 높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게 되자, 성읍(도시)과 탑을 건설해서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자고 모의했습니다. 그곳이 신분적으로 가장 높은 곳이고, 자신들도 신분적으로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입니다.
유럽에 가면서 대부분의 도시에 높은 곳에 성과 예배당이 있습니다. 그 예배당의 첨탑은 높이 솟아 있습니다. 높은 곳에 성과 예배당을 지은 이유는 그곳이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신분적으로)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고, 외적으로부터 방어를 쉽게 하기 위해서 였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벽돌로 높은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해도 몇 미터나 올릴 수 있었겠습니까?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롯데월드타워’인데 높이가 554m입니다. 그리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로 높이가 828m입니다. B.C. 5세기의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는 바벨탑의 높이가 약 90m 정도 되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현대건축의 시각에서 보면 벽돌로 지어 하늘에 닿자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교만한 행동입니까?
그렇게 높은 탑을 지으려고 했던 이유가 ‘우리 이름을 내고’입니다.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Philo)에 의하면, 바벨탑을 쌓는 데 사용된 벽돌마다 쌓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름을 내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나라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전국 유명 절에 가면, 기왓장을 파는데, 거기에 자기 가족의 이름과 소원, 주소가 빼곡하게 쓰여 있습니다. 또 전국 유명한 산에 가면 큰 바위에는 어김없이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산인 몽블랑에서도 한국 사람 이름이 쓰여 있는 것을 보았고, 스위스의 융프라우에서도 보았습니다. 그리고 여러 예배당이나 신학교에 가면 많이 헌금한 사람의 이름이 붙은 홀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용인에 있는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 좌우로 순교자 기념비가 있는데, 그 기념비는 순교자 개인 기념비 외에도 큰 기념비가 몇 개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념비 뒤쪽에 누가 그것을 기증했는지 기증자의 이름이나 기관의 이름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내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름을 지우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또한 사람들은 땅에서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그리고 노아에게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라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바벨탑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중심이 되어서, 자신들만의 사회를 이루려고 했습니다. 자신이 중심이 되고, 자신이 인생의 목적이 되면 그 인생은 변질됩니다.


하나님의 흩으심(5-9절)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하는 행동을 보시기 위해서 내려오셨다고 합니다. 보좌 위에서는 못 보시거나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표현을 ‘신인동형론적 표현’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을 사람의 행동으로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노아 시대에 세상에 죄악이 가득한 것을 보시고 사람을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고 합니다. 또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런 표현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굉장히 속상해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표현을 읽으시고,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신가?”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사람의 마음으로 표현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셔야 합니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막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지금의 모습도 이미 도가 지나쳤는데, 나중에는 더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그 상태로 둘 수 없겠다고 생각하신 것입니다.

(7-8)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내기 위해서 탑을 쌓으려는 것을 막으시는 방법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 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대화가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특히 ‘온 지면에 흩으셨다’에서 ‘흩다’는 ‘산산이 깨뜨리다 ’입니다. 마치 포도주잔을 대리석 바닥에 떨어뜨리면, 산산조각이 납니다. 그러면 그것을 다시 붙일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서 탑을 쌓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후!”하고 바람을 부시니, 모든 것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철학자 필론(Philo)의 말처럼, 벽돌마다 쌓는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고 한다면, 그 탑이 폐허가 되었을 때 얼마나 허망했겠습니까?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

‘바벨’은 ‘혼잡’, ‘혼란’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바벨탑 이야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면, 처음에는 마음이 맞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흩어지고, 혼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든, 친목 모임이든, 기업이든 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내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공동체를 깨려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벨탑에서 흩어진 언어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성령님께서 임하심으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는 바벨탑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고 싶을 때가 적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입니다. 그 주님께서 주님의 이름을 높이는 사람의 이름을 높여주십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속에 있는 바벨탑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십시다. 우리 마음의 무릎을 주님께 꿇려, 우리를 세워주신 곳을 직면하며, 그 위에서 역사하시는 주님을 목적 삼고 살아가십시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역사의 채널이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은총 속에 사시는 한 날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바벨탑을 세우려고 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벽돌을 구울 줄 알고, 역청을 끓여 풀로 쓸 줄 안다고 탑을 하늘 꼭대기까지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습니다. 지금의 건축 과학 기술로 보면, 그들은 참 어리석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손가락질하지 못합니다. 우리 사람은 한계를 가진 지극히 연약하고 작은 존재임에도 우리의 마음속에는 우리의 이름을 내려고 하고, 우리 자신을 목적 삼는 바벨탑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바벨탑을 더 크게 여기고, 더 중요하게 여김으로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많이 깨어졌는지 모릅니다.
바라옵나니, 우리의 매일매일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무릎을 주님께 꿇려 우리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목적 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그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동방에서 온 사람들은 벽돌로 탑을 쌓아 자신들의 이름을 내려고 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어떤 탑을 쌓았었습니까?
2. 하나님께서는 탑을 세우는 일을 통해서,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흩으셨습니다. 당신의 지난 삶에서 하나님께서 흩으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로 인해서 어떤 유익이나 깨달음이 있었습니까?
3. 바벨탑에서 흩어진 언어는 오순절에서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당신의 삶에서 흩어졌던 것들이 하나님을 바라봄을 통해서 회복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4. 교만한 바벨탑이 아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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