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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2:1-9

창세기 12:1-9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

대홍수 이후에 인류는 시날에서 바벨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다시 시작된 하나님의 대한 도전이자 반역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두면 그 이후로 인류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을 것이라 하시고, 인류가 막다른 길로 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언어를 혼잡하게 하고 온 땅으로 흩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건 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을 불러 새로운 일을 시작하십니다.

아브람은 갈데아 우르에서 살던 데라의 세 아들 중 한 명이었습니다. 갈데아 우르는 갈데아 사람들의 우르라는 뜻으로, 메소포타미아의 한 지역인데 주전 3,000년 말엽에 세계의 주요 도시 중 하나였습니다. 데라는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 아들 아브람과 함께 북서쪽으로 이동해 하란으로 왔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었습니다. 데라가 죽고 나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아브람을 부르시다(1-3)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셨을 때, 그는 75세였습니다. 그는 결혼은 했지만 임신을 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상 아브람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지구상의 많은 사람들 중에 그를 부르셨는지는 말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노아는 당대의 의인이라고 소개하고,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그를 데려갔다고 소개하지만 아브람에 대해서는 어떤 사람인지 소개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호수아에서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신들을 섬겼다”며, 그가 부름 받기 전에 어떤 배경에 있는지 말해줍니다


11장의 족보를 문자대로 해석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아직 노아의 아들 셈이 생존해 있었고, 노아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름이 없는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이름을 내려고 했던 인류를 흩으시고, 이름이 없던 아브람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기 위해 그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에게 특별한 점이 있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아브람을 다른 신을 섬기는 가문의 사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실 때,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 지가 중요했다면 그것에 대해서 말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이기에 그를 불렀는지 말씀하지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목적을 2-3절에서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의 특징인데, 성경은 사람이 이룬 업적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심으로 바벨탑 사건 이후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하시려는 일을 2절에서부터 자세하게 말씀합니다.

(2-3)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복을 주시고 아브람을 통해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이 큰 민족을 이루고 그의 이름을 창대하게 하며, 그로 말미암아 인류가 복을 얻게 하시겠다고 합니다. 아브람을 부르신 최종 목적은 아브람 한 명을 위한 것이 아니라, 땅의 모든 족속을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삶의 형통과 미래를 생각하기 쉽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의 삶이 미칠 우리와 교회와 사회와 인류를 생각하십니다. 나는 나 한 명의 행위와 그 결과에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나의 행위와 연결된 우리와 교회와 사회와 인류 모두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 후손과 민족과 인류 모두를 위해 그를 부르고 계십니다.

사도바울은 이것을 복음이라고 증언합니다. 갈라디아서 3:8은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고 증언합니다. 곧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아브람의 후손 중 태어날 한 명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됩니다. 사도바울은 7절의 ‘땅을 얻게 될 자손’이 단수 곧, 단 한 사람으로 표현된 것을 근거로 이를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합니다(갈13:18).

갈라디아서를 보지 않더라도, 아브람에게 이 부르심은 복음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상태였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고 다른 신을 섬기는 상태였습니다. 그런 아브람을 하나님께서 부르신 것은 은혜입니다. 또한 그를 통해 모든 족속에게 복 주시려는 것이므로, 이것은 인류를 향한 은혜이며 복음입니다.

우리도 믿기 전에 아브람처럼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 조상들도 미신과 유교와 불교의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 믿는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던 우리를 믿도록 부르셨지만, 우리에게는 부름 받을 만한 자격과 업적은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부름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너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복을 얻을 것이라고 언약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은 수 천년이 흘러 고스란히 우리에게 이루어졌습니다.

그때 아브람은 그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지 못했지만, 그는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모르는 여호와라는 신의 말씀을 따라나섰습니다. 이제 말씀을 들은 아브람은 그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가다 (4-6)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4절은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갔다고 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갔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브람이 말씀을 따라갔다고 할 때, 말씀은 히브리어로 ‘다바르’입니다. 이는 일반적인 모든 말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1,150회가 쓰일 정도로 흔한 말입니다. 4절에서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갔다고 하지 않고,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을 때 75세였고, 사래는 65세였습니다(17:17). 아브람이 175세를 살고 사래가 127세를 살았는데, 그들은 인생의 중반기에 있었습니다. 아브람은 인생의 중반기의 시점에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으로 갔습니다. 그가 가나안으로 간 이유는 순전히 여호와의 말씀으로 인한 것입니다. 삶의 고려해야 할 많은 요소가 있고 환경과 상황이 있었겠지만, 아브람은 다른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우리의 삶에는 이것저것 많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설켜 있습니다. 노후, 자녀교육, 경제력, 직장, 질병, 가족 등 이러한 가운데 우리는 아브람에게 메시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그의 모든 것을 가지고 다른 여지없이 가나안으로 향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아브람은 말씀을 믿기보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그것이 얼토당토 않는 일 같아 보여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사람이 말하면 믿을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이 말하면 믿을 수 없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기에, 그의 말씀의 어떤 것이라도 믿을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의 여지없이 모든 소유를 가지고 따라 갔습니다.

(5-6) 아브람이 그의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아브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모든 소유와 그에게 소속된 모든 사람들을 이끌고 갔습니다. 실패할 것을 염두에 두고 소유나 사람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서 말씀을 따라 가나안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약1000km를 걸어가는 한 달 이상 과정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떠나자 마침내 바로 가나안 땅에 도착했다고 말씀합니다. 그가 얼마나 신속하고 단호하게 말씀을 따라갔는지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꿈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그는 정착하지 못하고 점점 남방으로 옮겨가는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살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기근이 들기 까지 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갔지만 약속이 바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해 후손을 얻어 민족을 이룬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람은 100세가 될 때까지 자식을 낳지 못했고, 죽을 때까지 그의 이름이 유명해지거나 큰 민족을 이루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죽을 때까지 한 명의 자식, 이삭만 얻었습니다. 하갈과 그두라는 통해 얻은 나머지 자식은 약속하신 자녀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서 나는 자만 네 씨라 부를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21:12). 우리는 이러한 아브람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더니 잘 풀렸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말씀을 따라간 가나안에서는 믿음을 발휘하지 않고는 계속 말씀을 따를 수 없는 상황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아브람은 말씀을 따라 갔지만, 형통한 길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야 하는 길로 들어서게 됐습니다. 이것은 비단 아브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믿음을 따라 사는 우리의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나타나셔서 그에게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만 하셨습니다. 말씀을 따라 하란에서 가나안까지 왔는데, 그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땅을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약속을 다시 하신 것입니다. 7절 전반절입니다.

아브람이 가나안에서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다 (7-9)

(7a)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도착한 가나안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셔서 땅을 주신 것이 아니라,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지금 아브람에게 여기에서 이루실 일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앞으로 그의 자손에게 이루실 일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현재 지금의 일이 아니라, 미래에 이 땅에서 죽고 난 후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 아브람의 시선을 자신의 현재의 삶과 그 형편이 아닌, 조금씩 하나님의 원대한 계획으로 옮겨가게 하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현재의 삶에 대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하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원대한 하나님 나라를 보게 하시고 그것으로 인해 소망을 갖게 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람은 그 하나님의 계획에 동참해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는 불만을 품고 왜 이루어 주지 않냐고 말하지 않고, 다만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아브람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듣고 그 뜻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7b-9)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거기서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쪽은 벧엘이요 동쪽은 아이라 그가 그 곳에서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아브람은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이제라도 돌이키기에 늦지 않았으며, 그의 문제를 해결하고 소원을 이루어줄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를 수도 있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이룰 말씀을 듣고 그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제단을 쌓았다는 것은 희생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고,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에게 예배를 드리고 섬겼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아브람은 이후에 너무 답답해서 다른 방법을 써서 이스마엘도 낳아보고, 또 불만을 토로해 보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이루실 일을 말씀하시며,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않게 하시고, 다시 하나님께서 하실 일을 바라보게 만드십니다. 그러면 아브람은 다시금 힘을 내고 믿음을 발휘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말씀을 봐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흔들리고 약해집니다. 그럴 때, 다시금 말씀으로 하나님과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하신일과 그로 인해 이루질 일을 상기하고,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 다시 믿을 힘을 얻습니다.

아브람은 모든 족속으로 복을 얻게 할 예수 그리스도를 1,500년 전에 저 멀리서 흐릿하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태어날 자기의 자손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과 그가 하실 일도 알지 못한 채 멀리서 믿었습니다. 그렇게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지도 않고 따라갔지만, 우리는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을 보았습니다. 2천 년 전에 그 아브람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고, 그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어 모든 민족이 복을 얻게 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예수님을 알아보고 믿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브람에게 주신 그 복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졌음을 오늘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모든 족속으로 복을 얻게 하는 아브람의 자손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을 앎으로, 그로 인해 복을 누리시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삶의 많은 상황 중에서도 아브람과 같이 말씀을 따라가는 하루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아브람을 통해 주시겠다고 하셨던 그 복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을 부르셨던 것처럼, 저희도 부르시니 말씀을 따라나서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저희로 말씀을 따라나서지 못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있겠지만, 말씀을 따라 가서 그곳에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삶을 살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있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부르실 때 아브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아브람을 통해하시려는 일을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 묵상해 봅시다.
2. 성경이 아브람이 가나안으로 갔다고 하지 않고 말씀을 따라갔다고 표현하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3. 아브람이 가나안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그곳에서 바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셨는데, 나타나셔서 무엇을 하셨는지 묵상해 봅시다.
4.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복을 주겠다고도 하셨지만, 7절에서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하신 의미에 대해서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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