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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1:10-32

창세기 11:10-32
찬송가 294장 ‘하나님은 외아들을’

오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셈의 족보와 데라의 족보 그리고 짤막한 데라의 가족사가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미 우리는 셈의 족보를 10장에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로 접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다시 셈의 족보를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기록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10장에 노아 자손들의 족보를 기록한 이유는 홍수 이후 노아에게 주셨던 생육과 번성의 복이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셈의 족보에도 셈의 5대손까지 기록되어 있으며 그 5대손은 벨렉의 후손이 아닌 벨렉의 동생 욕단의 자녀들을 소개하며 끝맺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11장 앞 부분에 바벨탑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바벨탑 사건이 없이 바로 오늘 본문으로 이어진다면 오히려 두 족보를 이어 셈의 족보를 길게 설명하면 더 자연스러웠을 텐데 왜 바벨탑 사건을 중간에 넣음으로 흐름을 멈추게 한 것인지 질문이 생기게 됩니다. 이는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악함으로 세상을 홍수로 심판하신 뒤 노아에게 은혜 베푸심으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다시 인류에게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통해 나타내주셨지만, 그 은혜를 받은 인류가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알려주기 위함입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라는 말처럼 노아의 자손들은 자신들이 아담의 자손임을 증명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망각한 채 스스로 하나님처럼 높아지기를 원하며 바벨탑을 쌓다가 하나님께서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온 땅에 흩어져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바벨탑 사건 바로 뒤에 이어지는 이유는 그런 바벨탑을 쌓은 반역한 인류에게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오늘 족보의 끝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 ‘아브람’의 등장으로 끝을 맺습니다. 이는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샘의 근원처럼 인간들의 악함과 범죄에도 불구하고 마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샘물을 보여줍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날마다 들려오는 뉴스의 소식들은 경악할만한 범죄의 소식들과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처참한 악행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 땅에 소망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샘이 마르지 않고 이 시대에도 흐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 은혜의 샘이 없었다면 우리 인류의 삶은 진작 종말을 맞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노아를 통해 이어진 그 은혜의 샘은 오늘 셈의 족보에도 흘러내려 가고 있습니다.

셈의 족보(10-26절)

먼저, 10절에서 26절까지 셈의 족보가 나옵니다. 이전에 창세기 5장에 기록된 아담으로부터 노아까지 이어지는 족보와 비교하면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습니다. 먼저, 공통점은 아담에서 10대를 지나 나타난 노아가 그 시대에 하나님이 택하신 특별한 은혜를 입은 자였던 것처럼 셈에서 이어진 족보는 데라까지 9대를 이어지며 그 뒤에 10대손 아브람이 나타남으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특별한 은혜가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반대로 차이점은 생명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노아 이전의 조상들은 에녹을 제외하고 대부분 900세가 넘는 수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수명도 절반 아래로 줄어들고 자녀 출산의 나이도 당겨진 것을 보게 됩니다. 이는 노아의 홍수 이후 자연에 변화가 생겨 수명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또한 5장에 아담의 족보는 ‘낳았고, 지내며, 죽었더라’라고 반복되며 정리되지만, 오늘 11장에 기록된 족보는 ‘낳았고, 지내며’라는 기록만 있고 ‘죽었더라’라는 표현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창세기 5장의 족보는 인간이 범죄하여 하나님을 떠나므로 ‘죽을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고, 오늘 11장은 ‘죽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는 모습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이 족보는 나중에 누가복음 3장에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다윗과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며 아담 그리고 하나님까지 이어지는 생명의 족보로 연결되는 내용입니다. 이는 창세기에서 그 생명과 은혜의 샘물이 멈춘 것이 아니라 더 풍성히 흘러넘쳐 예수 그리스도에 이르기까지 흘러갔으며, 대림절 우리가 소망하는 예수님의 다시 오실 그날까지 우리 가운데, 또 우리를 통해 여전히 흘러넘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이 족보는 단순히 셈의 족보로만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로 바라볼 때 그 의미를 좀 더 명확하고 풍성히 볼 수 있습니다.

데라의 족보(27-29절)

27절에서 29절까지는 데라의 족보에 대하여 나옵니다. 영화에서 시간의 흐름을 설명하기 위해 빠른 화면전환을 통해 긴 시간을 설명하다가 주인공이 나오는 장면에서 점점 속도가 늦추어지며 카메라 줌인(Zoom-in)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시점과 상황으로 집중해 들어가는 것처럼 10절에서 26절까지 빠른 속도로 많은 사람의 이름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속도를 늦추며 이 족보의 주인공인 아브람의 가정 이야기로 살며시 들어가게 됩니다.

(27-28) 데라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고 하란은 롯을 낳았으며 하란은 그 아비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아브람, 나홀, 하란 세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하란은 롯을 낳았는데 그 뒤에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인의 우르에서 죽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왜 죽게 되었는지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왜 아브람이 조카 롯을 이후에 계속해서 챙기면서 데리고 다녔는지에 대하여 배경을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29-30) 아브람과 나홀이 장가 들었으니 아브람의 아내의 이름은 사래며 나홀의 아내의 이름은 밀가니 하란의 딸이요 하란은 밀가의 아버지이며 또 이스가의 아버지더라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이어서 아브람과 나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결혼을 했고 나홀은 밀가와 결혼을 했습니다. 나홀이 결혼한 밀가는 형제 하란의 딸이였습니다. 아브람의 아내 사래도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다른 부인을 통해 낳은 자녀였기에 ‘이복동생’과 결혼했다고 고백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 시대에는 아직 율법으로 근친혼을 하지 말라고 명하시기 전이였기에 근친혼의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보고 성경에서 근친혼을 허용했다거나 근친혼을 지지하는 내용으로 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레위기 18장에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에게 명확히 근친혼을 금지하고 계십니다. 현대에도 근친혼을 했을 때 생길 수 있는 여러 가지 유전적 결함의 위험성과 가정과 친척 안에서 성 착취 및 경쟁 구도를 피하게 하기 위해 많은 국가에서 근친혼을 법적으로 금지해 놓고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 이 시대와 율법 시대의 기준을 가지고 거슬러 올라가 데라의 가족들을 쉽게 정죄하는 것도 신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은 근친혼이 옳은지 그른지 설명하는 본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하고 있는 부분은 바로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훗날 아브람의 가정에 자녀의 결핍으로 인해 일어날 여러 가지 사건의 복선이 되고 있습니다. 특히 앞부분에 나온 족보에서 아르박삿이 35세, 셀라가 30세, 에벨이 34세, 벨렉이 30세, 르우가 32세, 스룩이 30세, 나홀이 29세에 자녀를 낳았는데 갑자기 데라에서 70세에 자녀를 낳으면서 출산의 시기가 많이 늦춰진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어서 아브람의 가정은 아예 임신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데라의 가정상황을 대략적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원 가정이라면 뭔가 부모님도 믿음이 좋고, 자녀도 형통하고, 잘 나가야 하는 상상을 쉽게 할 수 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는 것입니다. 오늘 짧은 본문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데라의 아들 하란은 젊은 나이에 자녀를 낳고 부모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형제의 죽음은 아브람에게도 큰 슬픔이 되었을 것이며 그 아픔과 책임감으로 인해 롯을 가나안까지 데려갔고 또 그를 위해 땅을 먼저 양보하고 소돔에서 전쟁의 포로로 끌려갔을 때 마치 아버지의 모습처럼 그를 위해 전쟁을 불사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게다가 아브람은 또 자녀가 없었습니다. 지금과 같이 자녀를 일부러 낳지 않고 부부의 삶에 집중하겠다는 딩크족(Dink: Double Income No Kids)과 같은 문화도 없었던 시대이기에 자녀의 숫자가 곧 가장의 힘과 권력을 상징하여 아브람의 삶에 자녀의 결핍은 꽤나 그를 괴롭혔던 삶의 문제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의 아버지 데라는 하나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 24:2–3절에 보시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옛적에 너희의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버지, 나홀의 아버지 데라가 강 저쪽에 거주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내가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온 땅에 두루 행하게 하고 그의 씨를 번성하게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으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데라가 강 저쪽에서 다른 신 곧 그 당시 유행했던 ‘달 신’을 섬겼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가정이 어떠했는지 분위기를 알 수 있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었고, 형제가 자신과 부모님을 놓고 먼저 죽게 되는 아픈 사건을 겪어 조카를 자녀처럼 돌보는 역할을 감당했으며, 아버지의 또 다른 아내의 딸과 근친혼을 했고, 또 그 사이에서 자녀가 생기지 않아 불임상태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라고 특별한 가정에서 신앙교육을 받았거나 행복한 가정이었거나 결핍이 없는 부부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도리어 아픔과 상실과 결핍이 있는 우리와 별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가정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 가정에 아픔이 있습니까? 상실이 있습니까? 결핍이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음이 가난하여 그래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사람의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신 이유는 그가 대단해서, 훌륭해서,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의 인생이 빈 잔이었기에 은혜를 채우시기 좋아서였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를 부르신 이유도 그렇습니다. 우리의 인생이 빈 잔과도 같다면 오히려 그 빈 잔의 인생을 피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기도하며 그 상황을 직면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는 풍성한 은혜로 그 잔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31-32) 데라가 그 아들 아브람과 하란의 아들인 그의 손자 롯과 그의 며느리 아브람의 아내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하더니 하란에 이르러 거기 거류하였으며 데라는 나이가 이백오 세가 되어 하란에서 죽었더라

데라는 그 아들 아브람과 손자 롯과 사래를 데리고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그가 갈대아인의 우르를 떠나고자 했던 이유는 사도행전 7장 2-3절에 나옵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곧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가나안땅으로 떠나라는 명령을 주셨고 데라는 아들을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함께 출발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동경로는 가나안을 따라 바로 직진할 수 없이 수원을 확보해야 했기에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이동하며 ‘하란’에 이르게 됩니다. 하란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장소가 아니였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은 하란에 잠시 머물며 12장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하란을 떠나게 될 때에도 아버지 데라는 그곳에 계속 거주하며 살다 이백오 세에 죽게 됩니다. 그들이 원래 거주했던 갈대아 우르가 강성한 도시문명을 이루고 있었다면 하란은 당시에 중요한 교차로의 위치에서 무역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가나안에서 나그네로 살아가야 하는 삶은 데라에게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위험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들을 통해 받은 말씀을 따라 같이 출발했음에도 적당히 타협하여 하란에서 멈추어 버린 데라의 삶은 우리에게 많은 경각심을 줍니다. 신앙의 연차가 쌓이면서 우리도 데라처럼 말씀에 ‘적당히’ 순종하는 것에 익숙해지지는 않았습니까? 가나안과 하란은 전혀 다른 곳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가 정한 테두리안에서만 순종하겠다고 선을 긋고 그 선을 벗어나길 두려워하고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간 기도하면서 내 한계선을 넘어 하나님께서 명하실 때에 기도하면서 그 상황들을 직면하고 걸어가십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동행하시며 친히 우리의 하나님이 되어주심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11장에 기록된 바벨탑 사건과 셈의 족보에 이어 데라의 족보로 이어지는 아브라함의 가정은 큰 대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바벨탑은 크고 화려하고 대단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온 땅에 흩어짐을 당했습니다. 셈의 족보는 특별한 설명도 없이 희미하게 이어지는 듯 보입니다. 특히 데라에 와서는 아픔과 상실과 결핍이 있는 가정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러나 그 아브람의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구원의 역사를 이루게 하셨고 누가복음 3장에 이 족보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이어지며 온 땅에 구원의 은혜가 흘러넘치도록 하는 큰 강물과 바다와 같이 완성 되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는 세상 나라와 하나님의 나라의 구도를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로마제국과 예수님께서 심으신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화려하고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로마제국은 결국 사라졌지만 예수님께서 심으신 하나님의 나라는 온 밀가루 반죽을 부풀리고 넘쳐 세계 곳곳에 지금도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에 무너질 큰 성 바벨론과 하늘에서 내려올 새 예루살렘의 모습은 최종적인 승리로 나아갈 하나님의 나라와 무너질 욕망의 세상 나라들을 보여줍니다. 대림절, 오늘 나의 모습과 내 가정에 아픔이 가득하고 상실과 결핍이 있어 보이며, 세상의 화려함에 비해 내놓을 것이 없는 듯 보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큰 바벨탑을 이룰 힘있는 권세자들을 택하지 않으셨고 자신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빈 잔의 인생을 택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오늘 내 삶이 초라해 보일지라도 고개를 드십시다. 그리고 내 삶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맡기며 모든 상황에 직면하며 나아 가십시다. 그때 아브람을 택하사 믿음의 족보를 이어가셨던 하나님께서 내 삶에 믿음의 역사를 새롭게 써 내려가실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세상의 화려함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우리의 삶의 자리는 초라하기만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 믿음의 가정이라고 부르기에 남루한 우리의 삶의 이력은 초라한 외양간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아픔과 상실과 결핍이 가득했던 데라의 가정에서 자라난 아브람을 주목해보셨던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인생도 주목해주시고 빈 잔과 같은 우리의 인생에 은혜의 단비를 부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누추한 외양간에 만왕의 왕으로 임하셨던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인생에 임하셔서 온전히 다스려주셔서 영광 거두어 주시고, 우리로 하여금 화려한 바벨탑의 썩어질 소망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소망에 눈먼 자들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람이 자라났던 가정과 나의 삶과 내가 속한 가정과의 공통점이 있다면 무엇인지 생각해봅시다.
2.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이었을지 묵상해봅시다.
3. 데라가 가나안에 가지 못하고 하란에 머물렀던 이유를 생각해보며 오늘 내 삶에 데라와 같은 주저함은 없는지 묵상해봅시다.
4. 화려하고 강한 바벨탑의 최후와 연약해 보이는 아브람의 가정의 최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묵상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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