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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3:1-13

창세기 13:1-13
찬송가 413장 “내 평생에 가는 길”

가나안으로 돌아온 아브람(1-9)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기로 작정하고, 그 말씀을 따라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는 여정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었습니다. 애굽에서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팔레스타인에서만 머무시면서 영향력을 행사하시는 분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곳은 없다, 대제국 애굽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거기에도 계시고, 누구에게나 하나님이시다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막대한 부를 주셔서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보다 훨씬 더 부유하게 되어 가나안으로 되돌아오게 하십니다.

(1-2) 아브람이 애굽에서 그와 그의 아내와 모든 소유와 롯과 함께 네게브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아브람이 거부가 되어 가나안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것은 두 가지입니다. 아브람이 애굽에서 믿음을 잘 지켰기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이 없었더라면, 살기 위해 냈던 아브라함의 생각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이 어그러질 뻔했습니다. 아브람이 부자가 된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개입의 결과였고, 하나님께서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었지 그 원인이 아브람에게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뭔가 우리 주변의 여건이 개선되면, 이것이 그간 이어온 내 신앙생활의 결과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이 경우에서는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시고, 어떤 경우에서도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고 신실하게만 살아가면 됩니다.
두 번째는 아브람이 애굽에서 출발하여 광야가 펼쳐진 네게브로, 이어서 벧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여정을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지켜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애굽의 경계를 넘어 광야와 가나안 땅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손으로 보호하시며 그 길을 인도하셨습니다. 아브람이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한 상황이었는데도 말입니다.
특별하게 내 인생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이, 오히려 지루하게 느껴지는 삶을 산다고 불평할 수도 있지만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그 또한 감사한 일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곧 모든 것에 감사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모든 면에 함께하고 계심에 감사하실 수 있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3-4)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아브람이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했는데, 전에 장막을 쳤던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곳에 이릅니다. 애굽에서는 아브람이 제단을 쌓았다는 말이 없었습니다. 13장에 와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았던 곳에 이르러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아브람이 진일보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신앙도 회복되었고, 약속의 땅에 다시 머물게 되었지만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가 발생합니다.

(5-6)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그 땅이 그들이 동거하기에 넉넉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니라

7절에 보시면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주하였다고 하는데, 이 사람들이 원주민들로서 더 좋은 땅을 차지하고 살았을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은 나중에 이주한 사람들이었으므로, 원주민들이 차지하고 남게 된 별로 좋지 못한 땅을 목초지로 삼고, 한정된 우물을 확보하여 서로 나눠야 하는 어려운 형편이었던 듯 싶습니다. 양과 소에게 풀과 물을 먹여야 했던 양쪽 목자들이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오랜 시간 동안 동고동락한 사이임에도 다투기 시작했다는 7절의 진술과 롯이 땅을 선택할 때,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곳을 바라보았던 10절의 롯의 시선을 통해서 이들이 당면했던 물과 목초지의 결핍이 얼마나 극심했던 문제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남이 아닌 친족이었습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으르렁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서로의 행동으로 조금씩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 시작했고, 그 상처가 나을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극한에 내몰린 환경 때문에 부딪히기를 반복했을 것입니다. 아브람과 롯이 자신의 종들을 불러 얼마나 많이 타일렀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한 번도 이야기하지 않았겠습니까? 여러 번 타이르고 꾸중하고 권면하는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꼭 알아야 할 것이, 참고 인내하면 시간이 해결해주는 갈등이 있는가 하면,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더이상 걷잡을 수 없는 갈등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이 참고 인내해서 해결할 수 있는 갈등인지, 아닌지 분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브람이 보기에 지금 이 갈등은 참는다고 참아지지 않는 갈등이었습니다. 생사가 걸린 갈등이었기 때문에 서로 분리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는 직면하는 용기가 필요하고, 직면해서 서로가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모색하는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롯을 부릅니다.

(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아브람은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서로가 갈라질 것을 제안합니다. 관대하게, 롯이 먼저 땅을 선택할 수 있도록 권리를 양보합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백성된 도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창세기 12장의 애굽 사건을 경험한 이후로 아브람이 달라졌습니다. 우선권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하나님께서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음을 믿는 이상, 자기가 그것을 차지하려고 발버둥칠 하등의 이유가 없음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롯이 어떤 땅을 선택하든 롯과 반대편으로 행하는 그 곳에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이 아브람에게 생겨났습니다. 그곳이 객관적으로 좋지 않은 땅일 수도 있고, 지금 불편하게 살고 있는 이 땅과 견주어도 살기 어려운 땅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그 땅이 오히려 자신에게 더 적합한 곳이라는 믿음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생 방향과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다를 때, 우리는 너무나 쉽게 낙심하고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내가 그려왔던 인생 청사진과 다를 때 겪는 당혹감으로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애굽 사건을 겪고 난 이후의 아브람이 달라졌듯이, 우리는 하루하루 살아가며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깨달아가면서 성숙해갈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소돔으로 옮겨간 롯(10-13)
한편 땅을 먼저 선택할 권리를 부여받은 롯은 아브람의 제안을 받아들여 어떤 땅을 선점할 것인지 탐색하기 시작합니다.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아브람과 롯이 머무는 벧엘 지역은 해발 880m에 이르는 유대 산지였으므로, 남동쪽에 위치했던 장엄한 요단 계곡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요즘은 갈릴리 호수에 댐을 건설하여 요단 강이 보잘것없어졌지만 고대만 하더라도 계절에 따라 수량이 많을 때는 엄청난 수량을 자랑하던 요단 강이었습니다. 여호수아가 요단 동편에서 요단 강을 가를 때, 곡식 거두는 시기라 언덕에 넘쳤다(수3:15)는 기록을 참고해면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단 지역은 현재 당면한 물의 결핍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장소였습니다. 지금 아브람과 롯이 머무는 벧엘 지역과 나중에 아브람이 거주지로 선택하는 헤브론은 유대 산지로, 하나님께서 내려주시는 이른 비와 늦은 비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땅이지만 롯이 바라보는 요단 지역은 상시로 물을 얻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롯의 눈에는 이곳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 같아 보였기 때문에 이곳을 선택하여 이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이곳은 13절에 나오듯 큰 죄인들이 살고 있는 타락한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롯이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선택한 이 땅이 주는 이익이 그리 크지 않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롯은 오로지 보이는 것의 매력, 쾌적함에만 이끌려서 요단 지역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는 이 선택으로 엄청난 희생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롯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가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하지 않으며,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롯은 자기가 갈 수 있는 땅 중에서 가장 좋은 땅을 선점했다는 사실에 매우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는 잃어버렸던 여호와의 동산에 가까운, 더 이상의 근심걱정이 없는 곳에 살게 되었다고 상상했겠지만 실상은 지옥의 바닥에 떨어진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안목의 정욕에 근거한 선택은 언제나 우리를 비참하게 만듭니다.

(11-12)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지역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담과 하와가 에덴으로부터 추방될 때, 동쪽으로 쫓겨나게 된 데서 유래한 관용어가 “에덴의 동쪽”입니다. 이후로 성경에서 동쪽은 하나님의 현존으로부터 떠나게 된 인간의 비참함을 상징하는 방향입니다. 롯이 동으로 옮겼다는 창세기 기자의 말은 하나님의 현존을 떠나 조금의 은혜와 복도 기대할 수 없는 비참함에 빠지게 되었다는 말로 치환해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롯은 자발적으로, 자기 눈에 보이는 것들만 신뢰하다 가장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들만 신뢰하다보면, 정작 놓치지 말아야 할 하나님을 놓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 너머의 것을 볼 줄 알아야 하는 신앙인입니다. 당장 눈앞의 이익보다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깊게, 더욱 바르게 알아가고 온전히 주님을 섬겨야 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순간 가운데서도 인생 가운데 어려움이 있음을 알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 어려움이 낯선 사람들과의 어려움이 아니라 가까운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자기 이익을 포기하고 섬기려는 자세로 다가갈 때에야 비로소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을 닮은 자기 부인이 평소 가운데도 드러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기대하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수준을 성취하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허락된 삶의 자리가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임을 자각하고,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브람이 애굽에서 네게브로 올라올 때,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부자가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2)
2. 애굽에서의 아브람과 벧엘에서의 아브람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입니까? 이를 통해 어떤 경우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4)
3. 롯이 바라본 요단 지역에 대한 판단과 하나님의 판단이 다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10, 13)
4. 아브람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롯에게 했던 제안의 핵심은 우선권(기득권)의 포기였습니다. 화해의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내가 내려놓아야 하는 기득권은 무엇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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