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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3:14-18

창세기 13:14-18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노아의 아들 중 ‘셈’의 후손인 아브라함은 ‘데라’의 아들입니다. ‘데라’가 거주했던 장소가 갈대아 ‘우르’입니다. 이 장소는 유프라테스 강 하류 인근에 있었으며, 페르시아만에서 서북쪽으로 약 240km 거리에 위치한 곳입니다. 지금은 이라크 영토에 속해 있으며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와 페르시아만 중간에 위치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의 형제인 ‘하란’이 죽었습니다. 하란이 낳은 자식이 롯인데,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챙겼습니다.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자식처럼 데리고 다녔을 것입니다. 창세기 11장 30절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아들 하란이 죽자,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습니다. 창세기 15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내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두 구절을 종합해 보면, 집안의 가장인 데라가 대가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움직인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데라는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한 장소에 머물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그곳은 죽은 아들의 이름과 같은 ‘하란’입니다. ‘하란’은 유프라테스 상류에 있었으며 갈대아 우르에서 약 1,000km 떨어진 곳입니다. 지금은 터키 남부 ‘우르파주’에 속해 있으며, 시리아 국경에 인접한 마을입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하란’에서 죽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70세에 낳았고, ‘하란’이라는 곳에서 죽을 때 나이가 205세였다고 하니, 갈대아 우르와 ‘하란’이라는 장소에서 꽤 오래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란’을 떠났을 때 나이가 75세였습니다.
창세기에는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때는 갈대아 우르에 있을 때입니다. 사도행전 7장의 스데반 설교에서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고, 하란에서 다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첫 번째 머물렀던 장소는, 에발산과 그리심산 사이에 있는 세겜입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에 정착하지 않고 벧엘 동쪽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고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점점 남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나안 땅으로 왔으나 가나안 원주민으로 인해 좋은 땅에 머물 수 없었고 주로 원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산 주변에 머물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가나안 땅으로 왔는데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답답하였겠습니까? 그러던 중 심한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살기 위해서 가나안 땅을 벗어나 남쪽 애굽으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에서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말한 것이 문제가 되어, 오래 머물지 못하고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빈손으로 돌아오지 않고 많은 가축과 재물을 얻어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다시 돌아오게 된 곳은 이전에 머물렀던 벧엘과 아이 사이였습니다. 여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정착하여 잘 살아갈 줄 알았는데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간의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다툼의 원인은 그들의 소유가 많아 동거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고, 이후 하란을 떠났을 때만 해도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다툴 정도로 소유가 많았겠습니까?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주하면서 어려움이 많고 고생을 하였지만, 신기하게도 소유가 넉넉해졌습니다.

이제는 두 가족이 분가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과 분가할 때 아브라함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롯은 눈에 보이는 좋은 곳을 선택했습니다. 그곳은 물이 넉넉하여 여호와의 동산 같고, 나일강으로 인해 비옥한 애굽 땅과 같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이 선택한 곳이 아닌 곳에 거주해야 할 상황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이 받을 땅과 후손의 번성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이 나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거주한 곳이 헤브론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롯은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땅, 소돔과 고모라로 갔습니다.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땅이 반드시 하나님께서 보시기 좋은 곳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사람의 눈에 보기 좋은 땅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조카 롯에게 선택권을 준 후 자신은 롯이 갔던 곳이 아닌 땅으로 가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습니다. 먼저 ‘눈을 들라’고 하셨고, 다음은 ‘바라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눈을 들라’고 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면,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떠나보낸 후,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롯처럼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보지 말고, 믿음의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라는 뜻이 담겼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라보라고 하신 방향은 특정한 곳이 아닌 동서남북입니다. 여기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갔던 방향도 포함되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아브라함에게 눈을 들어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셨겠습니까?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영원히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영원’에 해당하는 원어는 ‘숨기다’, ‘깨닫지 못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숨겨진 시간이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오늘날 믿음의 성도들까지 포함합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15절의 ‘자손’이라는 단어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자손’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제라’는 단수형으로 ‘씨’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창세기 4장 25절에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창4:25)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죽은 아들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는데, 그가 바로 ‘셋’입니다. 아브라함은 가인의 후손이 아닌 셋의 후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씨도 하나님께서 정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은 여종의 몸에서 난 이스마엘의 씨가 아닌 사라의 몸에서 난 이삭의 씨로부터 난 후손을 통해 성취되었습니다. 그 후손이 얼마나 많게 될지를 알려 주십니다.

16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땅에 있는 한 줌의 티끌을 취해서 그 티끝의 수를 셀 수 있습니까? 한 줌의 티끌도 셀 수 없는데 땅에 있는 티끌을 어떻게 셀 수 있겠습니까? 16절의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은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으면 네 자손도 셀 수 있다는 의미인데, 이는 ‘땅의 티끌의 수는 너무 많아 셀 수 없는 것처럼 네 자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아질 것이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번성의 복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직접 몸으로 느껴보라는 의미로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중요한 두 개의 명령형 동사가 ‘일어나라’와 ‘다녀 보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보았으니 실제로 걸어보고 확신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 걸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복된 약속을 믿고 그 약속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복이 얼마나 많은지 세어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은 많으나 내가 받지 못한 복이 얼마나 많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헤브론은 훗날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묻힌 곳이 되었고(창23:19), 아브라함 역시 이곳에 묻혔습니다(창25:10). 그리고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과 자부 리브가도,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과 손자부 레아도(창49:31, 창50:13) 헤브론에 묻혔습니다. 직계의 무덤 장소뿐만 아니라 이삭과 야곱의 등의 주요 거처가 되었습니다(창35:27, 창37:14). 또한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기업으로 받은 곳이 헤브론이며, 사람이 억울하게 피의 보복을 받지 않도록 만들었던 도피성 6개 중 하나가 헤브론에 있었습니다. 이 도피성은 궁극적으로 죄인들의 영원한 구주시며 안전한 피난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 후 왕정 시대 1기 장소가 헤브론입니다.

18절의 원문을 보면, 3개의 동사 앞에 히브리어 ‘와우’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첫 번째가 ‘옮기다’ 앞에 있습니다. 직역하면 ‘그리고 옮겼다’입니다. 개역 개정 성경은 ‘이에 옮겼다’라고 변역하였습니다. ‘와우’ 접속사를 사용했다는 것은 앞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두루 다녀 보았을 것입니다. ‘이에’ 또는 ‘그리고’ 장막을 옮겼던 것입니다. 다음으로 ‘와우’ 접속사가 붙어 있는 동사가 각각 ‘이르다’와 ‘거주하다’입니다. 와우 접속사를 적용해 보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땅을 두루 다녔다. 그리고 옮겼다. 그리고 이르렀다. 그리고 머물렀다’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만히 앉아 있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우리는 감나무 아래에서 감이 떨어지기까지 입을 벌릴 것이 아니라 감을 따기 위해서 나무에 올라가거나 도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복이 이미 나무에 걸려 있습니다. 그 복을 따기 위해 움직여야 합니다.

밭에 감추인 보화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 밭을 구입해서 그 보화를 차지해야 하듯이 하나님의 복된 약속의 말씀, 영원한 가치를 지니신 다이아몬드 같은 주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그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 아브라함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도 성경을 묵상하여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며 섬기십시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값없이 저희를 택정하시고, 부르시고,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자녀 삼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저희에게 한없는 복을 주셨는데, 그 복을 받아 누리는 삶을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받을 수 있음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더 깊이 알아가며, 하나님을 더욱더 사랑하며 교회를 섬기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방향이 아닌 왜 동서남북을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셨겠습니까? 나에게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신 곳(또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영원’에 대한 약속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나에게 하신 ‘영원’에 대한 약속은 무엇이겠습니까?
3.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눈을 들고’, ‘바라보고’, ‘두루 다니고’, ‘옮기고’, ‘이르고’, ‘거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내가 했던 행동을 ‘동사’로 표현해 봅시다.
4.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세어 볼 수 있겠습니까?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어떻게 받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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