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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14:1-16

창세기 14:1-16
찬송가 465장 ‘주 믿는 나 남 위해’



가나안 부족 국가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다(1-4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갈대아 우르와 하란을 떠나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거기에서 서로의 가축이 많아져 조카 롯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롯은 물이 풍부하게 보이는 소돔을 향해 떠났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헤브론에 머물며 하나님을 위하여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 이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전해주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가나안에 살았던 북쪽 사람들과 남쪽 사람들의 전쟁입니다.

(1) 당시에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과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이

당시 가나안 땅에는 다양한 부족 국가들이 있었는데, 이 명단은 그중에서 북쪽에 있었던 4개국입니다. 그중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왕은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2) 소돔 왕 베라와 고모라 왕 비르사와 아드마 왕 시납과 스보임 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 왕과 싸우니라

이 명단은 가나안 남쪽에 있었던 5개 부족 국가와 그 나라의 왕입니다. 북쪽 4개국과 남쪽 5개국 사이에 전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롯이 소돔으로 이주하고 난 후의 일이었습니다. 만약 롯이 그곳으로 이주하지 않았다면, 그곳에서 전쟁이 일어났더라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관심이 많으신 분이십니다.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의 염해에 모였더라

가나안 남쪽 5개국 연합군이 북쪽 4개국 연합군을 맞서기 위해서 한 곳에 모였는데, 그곳이 과거에는 ‘싯딤 골짜기’라고 불렸고, 지금, 모세가 이 성경을 기록할 때의 명칭은 ‘염해(鹽海)_소금 바다’라고 합니다.
이 ‘염해’를 흔히 ‘사해(死海)’라고 부릅니다. 전 세계 바닷물의 평균 염도는 3.5% 정도 됩니다. 그중에서 대서양이 다른 바닷물보다 조금 더 짜다고 합니다. 물론 북극과 남극 지역에 있는 바닷물이 가장 덜 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염해의 평균 염도는 31.5%입니다. 그러니까 염해는 일반 바다보다 약 9배가 더 짭니다. 그래서 염해에는 물고기가 살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 바다를 ‘사해_죽은 바다’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도 ‘사해’라는 말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바다를 죽은 바다라고 생각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오랜 기간 염해가 쓸모없는 바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20세기에 들어와서 눈부신 과학의 발달을 통해서 염해가 재조명되고 있습니다. 염해의 진흙은 양질의 화장품을 만드는데 최고의 원료라고 합니다. 현재의 면적은 1960년대의 ⅓ 수준으로 줄어들었음에도, 염해 주변의 나라들이 서로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하기 위해서 갈등하고 경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염해’라고 부르는 것을 사람들이 ‘사해’라고 불렀던 것은 염도가 높아 물고기가 살 수 없는 상태, 그 겉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그 속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사람의 속을 보려고 하기보다 겉을 보고 평가하곤 합니다. 그래서 사람을 세속적 가치관의 잣대로만, 스펙이나 경제력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선택하는 삶에는 참 만족도 없고, 참 행복도 없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될 사람에게 기름을 붓기 위해 이새의 집을 찾았을 때, 아버지 이새는 다른 아들은 다 불렀지만, 막내 다윗은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새는 다른 아들은 혹 왕이 될 자질이 있을지 모르지만, 막내 다윗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무엘 선지자도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는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사람이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윗이 시편 139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시 139:2-4)”
사람은 사람의 생각을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겠습니까? 또한 사람은 사람의 혀의 말도 알지 못합니다. 말을 해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도 많은데, 어떻게 말하지 않은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은 아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 고백을 오늘 본문으로 말씀드리면, 사람들이 다윗에게 말하길 “너는 사해야, 너는 끝났어”라고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너는 염해야, 네 속에는 진귀한 것이 많아”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으로 인해서 다윗의 인생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언제나 하나님의 위로와 소망 속에 살 수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바라보는 한, 우리의 인생은 날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십삼년에 배반한지라

‘이들’은 ‘남쪽 연합군’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당시 가나안 부족 국가의 패권자는 북쪽의 엘람 왕 그돌라오멜이었습니다. 그래서 남쪽의 나라들은 꼼짝하지 못하고 12년 동안이나 조공을 바쳤습니다. 특히 ‘섬기다’의 문자적인 의미는 ‘복종하다’입니다. 마치 남쪽 왕들은 그돌라오멜을 노예가 주인을 대하듯이 했고, 사람이 신에게 경배하듯이 받들었습니다. 그런데 13년째 되는 해에 배반하고 말았습니다. 왜 배반을 했는지 성경은 그 이유를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12장에서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아브람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낭패를 당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의 기근으로 조공을 바칠 수 없는 어려운 상황이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롯이 사로잡히다(5-12절)
(5-7) 제십사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 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1절에 나타난 가나안 북쪽 4개국 연합군들이 남쪽 5개국을 응징하러 가면서, 그 주변에 있던 나라들을 먼저 공략했다고 합니다. 북쪽 연합군이 남쪽 연합군을 치고 있는데, 주변의 다른 남쪽 나라들이 남쪽 연합군을 지원하거나 북쪽 연합군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없도록 사전에 평정한 것이었습니다.

(8-9) 소돔 왕과 고모라 왕과 아드마 왕과 스보임 왕과 벨라 곧 소알 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을 쳤더니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고임 왕 디달과 시날 왕 아므라벨과 엘라살 왕 아리옥 네 왕이 곧 그 다섯 왕과 맞서니라

‘진을 치다’는 문자 그대로 ‘전쟁을 하기 위하여 진용(陣容)을 갖추다’의 뜻입니다. 남쪽 5개국 연합군은 북쪽 4개국 연합군의 강력한 기세를 막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전쟁이 목숨과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대에는 국가가 부자가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상대의 것을 전부 갖고 올 수 있었습니다. 군인 개개인도 자신이 취한 것은 자신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반면에 패전하게 되면 재산을 몰수당하게 될 뿐만 아니라, 남자들은 보복하지 못 하게 하려고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끌려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쪽 연합군과 남쪽 연합군은 서로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 10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그들이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북쪽은 4개국 연합군이었고 남쪽은 5개국 연합군이었습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북쪽의 완승이었습니다. 북쪽 연합군이 남쪽을 징벌하러 왔기 때문에 지리적으로는 남쪽 연합군이 유리하였을 것입니다. 싯딤 골짜기(염해) 부근에는 역청(아스팔트) 구덩이들이 많았습니다. 우리 성경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라고 되어 있지만, 그대로 직역하면 ‘역청 구덩이들이 역청 구덩이들이 있었다’입니다. ‘역청 구덩이’란 말이 반복해서 나옵니다. 남쪽 연합군들에게는 이러한 지형이 익숙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오히려 올무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남쪽 왕들이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주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남쪽 사람과 재물은 북쪽 연합군들에게 약탈의 대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롯은 소돔 쪽으로 가는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하고 거기로 갔지만, 최악의 선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믿음을 따라 선택한 길을 걷지 않고, 자기 눈에 보기에 좋은 대로만, 세속적 가치관을 따라 선택한 길을 걸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람이 롯을 구하다(13-16절)
롯이 재산도 약탈당하고, 자신도 포로가 북쪽 연합군에게 끌려가고 있을 때, 아브람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13절이 이렇게 증거합니다.
(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 그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주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사람들이더라

롯이 소돔에서 소돔의 가치관, 소돔의 물결을 따라 살고 있을 때도, 아브람은 마므레 상수리 수풀 근처에 살고 있었습니다. 마므레는 헤브론 지역에 있는 마을 이름입니다. ‘헤브론’은 ‘교제의 자리’라는 뜻이고, ‘마므레’는 ‘활발하다’, ‘타오르다’의 뜻입니다. 즉 아브라함을 소돔의 가치관, 소돔의 물결을 따라서 살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믿음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헤브론 마므레는 아브람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8번째 사사인 입다는 그 어머니는 기생이었지만, 그 아버지는 ‘길르앗’이었는데, ‘길르앗’은 지명이기도 했습니다. 이와같이 ‘마므레’는 지명이기도 하고, 인명이기도 합니다. 아브람은 마므레-에스골-아넬, 이 세 형제와 동맹을 맺었습니다. 마므레는 마므레 지역을 다스리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4) 아브람이 그의 조카가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훈련된 자 삼백십팔 명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아브람은 자기가 사는 지역의 사람들과 동맹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집에서 군인들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당시에 사회 치안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 특히 많이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자기 마을을 지킬 자구책을 갖고 있어야 했습니다. 본문의 ‘길리다’는 ‘태어나다’의 뜻입니다. 즉 아브람은 318명의 군인을 외부에서 용병으로 사 온 것이 아니라, 자기 집에서 태어나고 자란 가족과 같았습니다. 아브람은 소돔의 길을 걸었던 롯과는 정말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보이는 땅을 다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렇고 해서 아브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거기에 상응하는 삶을 사는 것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브람이 있는 헤브론에서 단까지는 약 200km입니다.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서 그 먼 거리까지 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15-16) 그와 그의 가신들이 나뉘어 밤에 그들을 쳐부수고 다메섹 왼편 호바까지 쫓아가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의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또 부녀와 친척을 다 찾아왔더라

아브람은 200km를 쫓아갔는데, 잡혀간 사람들은 거기서 또 80km나 더 떨어진 ‘호바’에 있었었습니다. 아브람은 그곳까지 가서 롯을 비롯한 빼앗겼던 사람과 재물을 다 찾아왔습니다.

오늘도 우리 앞에는 소돔의 가치관과 소돔의 물결을 따르는 롯의 길과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며, 말씀과 믿음을 따르는 아브람의 길이 있습니다. 롯의 길은 넓은 길처럼 보이고, 화려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아브람의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길처럼 보이고, 담백하게 보입니다. 어느 길을 가는지는 우리의 선택이지만, 그 결과도 우리에게 고스란히 남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아브람의 길이 손해 보는 것처럼 보이고, 어리석게 보여도 그 길이 생명의 길이고, 그 길에는 영원한 보화이신 주님이 있습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롯은 삼촌 아브람을 떠나 소돔을 향했습니다. 그곳은 물도 넉넉했고, 여호와 동산 같았고, 곡창지대 애굽과 같아 보였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소돔의 가치관과 소돔의 물결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전쟁의 소용돌이 한중간에 있게 되었습니다.
반면에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동서남북 눈에 보이는 땅을 주시겠다고 약속했지만, 그는 1평이라도 더 많은 땅을 갖겠다고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고, 자신이 사는 지역 사람들과 동맹도 맺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318명이나 되는 군인들을 훈련하며 함께 지내는 믿음의 길을 걸었습니다.
설령 우리 눈에 롯의 길이 넓어 보이고, 좋아 보이며, 매력적으로 다가올지라도 그 길이 아니라 아브람이 걸은 믿음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래서 오늘 하루를 사는 우리가 이 시대의 롯이 아니라 아브람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롯은 소돔의 길을 걸었고, 아브람은 헤브론(마므레)의 길을 걸었습니다. 당신이 걸은 지난 1년, 지난 1달은 누구의 길을 닮았습니까? 당신이 걷는 길에서 바꾸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2. 아브람은 눈에 보이는 땅을 모두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자신이 사는 지역 사람들과 동맹도 맺고, 집에서 사병(私兵) 318명을 훈련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삶에서 어떻게 실제로 나타나고 있습니까?
3. 아브람은 북쪽으로 280km나 가서 조카 롯을 구하고 빼앗긴 재물을 되찾아왔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섬기기 위해서 오늘 수고해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4. 매일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제단을 세우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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