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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32:21-32

: 창세기 32:21-32 

 
찬송가 38장 “예수 우리 왕이여”

모든 인간의 최대 관심사는 자기 존재 유지와 구축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인간인지를 증명하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물론, 저마다 방법은 다릅니다. 어떤 자들은 돈과 명예를, 어떤 자들은 나눔과 희생을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만 결국 나라는 존재 구축을 위한 시도라는 점에서 둘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야곱은 이름부터가 “발꿈치를 움켜쥐다”라는 뜻입니다. 어머니 태에서부터 자신의 생명을 위해 장자 에서의 발꿈치를 움켜쥐었기 때문에 갖게 된 이름입니다. 그는 복을 얻기 위해 에서의 연약함을 이용해서 그의 장자권을 샀고 나이가 들어 눈이 어두워진 아버지 이삭을 속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잘됨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행동도 서슴지 않던 야곱에게 일생일대의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바로, 에서와의 재회입니다. 그는 에서가 자신을 죽일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에 어찌 해야 할지 걱정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야곱은 자신의 소유로 에서의 마음을 달래기로 합니다.

그에 앞서 보내고(21-23)

(21-23) 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야곱은 자신이 힘겹게 모은 재산을 에서에게 선물로 줍니다. 재산도 살아있어야 의미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입니다. 22절, “밤에 일어나”라는 구절에는 한국어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은 “그”라는 강조어가 “밤에 일어나” 앞에 붙어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잠을 설치고 그날 밤에 다시 일어난 겁니다. 그리고는 예물만으론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아내와 여종들 그리고 아들들까지도 에서에게 먼저 보냅니다. 어쩌면 에서가 그들을 공격하면 멀찍이서 지켜보다 얼른 도망가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에서의 진노를 달래기 위해 사용한 야곱은 얍복 강가에 빈털터리로 혼자 남게 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하는 장면입니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오늘 본문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를 거시적 관점에서 바라봐야 합니다.
창세기 32장 21절부터 창세기 33장 3절까지를 보면 샌드위치 구조로 돼 있습니다. 씨름 사건이 중간에 끼어있고 앞뒤로 야곱이 가족들을 배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21절부터 23절에는 야곱은 가족들을 본인보다 먼저 에서에게 가게 합니다. 하지만 씨름 사건 직후인 33장 1절부터 3절에는 본인이 가장 먼저 에서를 만나러 가고 가족들은 그 뒤를 따라오게 합니다. 정리하면, 21절부터 23절에서의 야곱은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가족마저 버리는 자였지만 33장에서의 야곱은 더는 자신을 위해 살지 않는 자, 자신의 생명을 미워하는 자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길래 야곱이 이렇게 변화했는지 함께 보겠습니다.

진짜 복(24-32)

(24-26)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어떤 사람이 와서 야곱과 씨름을 합니다. 우리는 야곱의 고백을 통해 이 사람이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5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과 날이 새도록 씨름하셨지만 그를 이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이기지 못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힘이 부족하셔서 야곱을 이기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에서와의 재회를 앞두고 야곱은 살고 싶다는 갈망이 극에 달해있었는데 살기 위해서라면 하나님마저 제압해서 복을 얻어내겠다는 마음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조차도 야곱을 이길 수 없었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하지만 야곱만 이런 것이 아닙니다. 말로는 기복신앙을 싫어한다고 하지만 사실 우리는 모두 나의 잘됨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하나님을 이용할 준비가 돼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도 어땠습니까? 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호언장담 했지만 결국 살기 위해 주를 부인하지 않았습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는 고상한 척할 수 있지만 정말 나의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이 터졌을 때 인간은 하나님을 죽여서라도 자신을 지키려고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본질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목숨같이 여겼던 율법을 공격하시자 그렇게 신실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랑했던 자들이 예수를 죽이자고 합니다. 살인자를 살릴지언정 예수는 살려둘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다투어서라도 나를 지키려는 마음이 우리 마음에도 동일하게 존재합니다.
25절에 보면, 그런 야곱의 허벅지를 하나님께서 치십니다. 여기서 허벅지라고 번역된 야렉이란 단어는 엉덩이, 둔부 등을 의미하며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남성의 정자가 저장된 곳, 다시 말해 인간이 생명을 품고 있는 곳을 가리키는 은유입니다. 그런 야렉을 하나님께서 치신다는 뜻은 야곱의 생명을 끊겠다는 뜻 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야곱을 도리어 하나님께서 쳐서 죽이시려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이렇게 진짜 하나님은 나를 죽이는 걸림돌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이 걸림돌은 모든 인간을 걸려 넘어지게 하는데 그 이유는 선악과 먹은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나님 돼 진짜 하나님과 다투는 존재가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들었을 때 먼저 불편하고 거부감이 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우리 또한 바리새인들과 다르지 않은 자임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그 실패와 죽음의 자리에 하나님께서 은혜와 생명을 부어 주십니다. 마른 뼈와 같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으시듯, 이 창조 원리를 통해 성도는 오직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에 이르게 된다는 역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이와 같은 그림이 할례, 태가 끊어진 후에야 아이를 낳는 사라, 에디오피아 내시 등입니다. 베드로 또한 예수님을 철저하게 3번 부인한 후 십자가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이게 모두 절대 생명이 잉태될 수 없는 자리에, 어떠한 희망도 품을 수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는 그림입니다.

(27-28)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물으십니다. 날 때부터 속이는 자, 살기 위해서라면 형제의 뒤꿈치도 서슴없이 움켜쥐는 자인 것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는 그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십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전 존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인물들은 이름의 뜻과 일치하는 삶을 삽니다.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야곱의 옛 자아는 야곱이란 옛 이름과 함께 지워지고 새 자아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새 이름을 주시는 것과 허벅지를 치시는 것은 사실 같은 그림입니다. 둘 다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태어나는 원리를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물론,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고 나중에는 야곱의 자손인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궁극적으로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장자요 참 이스라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야곱이 새 이름을 받는 것은 단순히 어떠한 다른 이름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받는 겁니다. 야곱이란 옛 자아는 죽고 하나님의 이름과 중첩된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나 이제 더이상 야곱이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새로운 하나님의 이름, 이스라엘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씨름 사건이 있고 난 후에는 야곱이 가족들을 뒤로한 채 자신이 가장 먼저 에서를 맞이하러 나갑니다. 이미 죽고 새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야곱은 더는 자신의 생명 유지와 구축을 위해 애쓰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신약에서 교회로 발전합니다. 초대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자신의 재산을 교회를 위해 전부 기부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선 필수적인 재산을 교회를 위해, 타인을 위해 기부했다는 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태어난 교회는 이스라엘이 된 야곱처럼 더이상 자신의 생명 유지와 구축을 위해 살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겁니다.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야곱도 하나님의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을 파악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삼고 싶어합니다. 새 이름을 받았다고 해서 옛 이름의 성향이 전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옛 이름은 우리 몸에 계속 남아 우리를 괴롭힙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에게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 주지는 않으시지만, 복은 주십니다.
그런데 이 복은 야곱이 생각했던 복과는 거리가 멉니다. 에서를 물리칠 기가 막힌 전술을 가르쳐 주셔도 모자랄 판에 싸울 수도 없도록 다리를 절게 하십니다. 마치 여리고 점령을 앞둔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할례 하시는 것과 비슷한데 야곱의 전투력을 모두 상실시켜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하십니다.
이게 죽음이고 자기 부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삶에서 반드시 격발시켜 진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선한 죽음입니다. 꾹 참으며 말씀 조금 지켰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이 자기 부인이 아니라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가능성도 없는 절름발이일 뿐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진짜 자기 부인이고 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아픕니다. 세상은 다리 저는 이들이 저주받았다고 비아냥거리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그런 자들은 무시합니다. 하지만 진짜 복은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멋지게 뛰어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업히지 않으면 걸을 수조차 없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장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자라는 우리의 옛 이름을 폭로하시며 우리 안에서 어떠한 의도 나올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그 처절한 자기 부인과 죽음을 통과한 자에게만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이 주어지는 겁니다.

(30-32)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야곱은 하나님을 보았는데도 자신의 생명이 보전됐다고 합니다. 사실, 야곱의 생명은 보전되지 않았습니다. 허벅지를 맞아 절름발이가 됐고 이름은 사라져버렸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이것이 진짜 산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절름발이가 된 그 장소를 하나님께서 자신을 살리신 장소라고 부르는 겁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 나라 백성의 정체성이 됩니다.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않으며 평생 하나님께서 야곱을 치신 이 내용을 마음에 새기고 믿는 자들이 진짜 이스라엘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의 옛 사람을 날마다 죽이시고 그 죽음의 자리에 새 생명을 부어 주시는 주님께 감사하기 원합니다. 힘들고 아프지만, 오늘도 우리는 절름발이일 뿐이라고, 내 생명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베드로처럼 예수를 부인할 수 있는 존재라고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덮으시는 십자가 은혜와 사랑을 의지하고 주님이 주시는 새 이름 안에서 기뻐하는 우리 100주년기념교회 교우님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진정한 복은 우리가 죽어 마땅한 존재임이 드러나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옵소서. 그래서 우리의 옛 사람의 죽음을 통해 눈을 들어 주님만을 바라보고 주님이 지신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새 사람을 입게 하옵소서. 때로는 아플지라도 주님의 은혜만을 목적삼고 자기 부인의 길을 묵묵하게 걸어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인간은 나만을 목적 삼고 하나님마저 이용하는 존재라는 것에 동의하시나요? 본인의 경험을 토대로 묵상해보세요.
2. 24절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를 치십니다. 이와 비슷한 경험이 있으신가요? 그 일을 통해 무엇을 배우셨나요?
3.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는 겁니다. 새 이름을 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진정한 복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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