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278장 여러 해 동안 주 떠나
밧단아람(:아람의 평야)에 머물며 가정을 이룬 야곱은 그의 외삼촌 라반과 그의 아들들과의 갈등이 깊어갔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 31:3) 여호와께서 야곱에게 이르시되 네 조상의 땅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신지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곧장 그의 아내들을 불러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에 라헬과 레아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다 준행 할 것을 말하면서, 조상의 땅을 향한 이들의 여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된 이들의 여정에 있어,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에서와 야곱의 무리(1-2)
(1-2)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 명의 장정을 거느리고 오고 있는지라 그의 자식들을 나누어 레아와 라헬과 두 여종에게 맡기고 여종들과 그들의 자식들은 앞에 두고 레아와 그의 자식들은 다음에 두고 라헬과 요셉은 뒤에 두고
간밤에 어떤 사람과 씨름하는 과정에서 엉덩이뼈가 어긋난 야곱은 절뚝거리며 얍복 나루를 건넜습니다(창 32:31). 힘겹게 시내를 건넌 후, 그가 눈을 들어 보니 큰 무리가 근접해 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는 곧바로 그 무리가 에서의 무리임을 알아차렸습니다. 이는 과거 에서에게 보냈었던 사자들을 통해, 에서가 장정 사백 명을 거느리고 그를 만나러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었기 때문입니다.
(창 32:6) 사자들이 야곱에게 돌아와 이르되 우리가 주인의 형 에서에게 이른즉 그가 사백 명을 거느리고 주인을 만나려고 오더이다
야곱은 주저 없이 그의 무리를 재정비했습니다. 아이들을 레아와 라헬, 두 여종에게 나누어 맡겼습니다. 먼저 두 여종과 그들에게서 난 아이들은 선봉에 세우고, 이어 레아와 그에게선 난 아이들은 그 뒤에 세우고, 끝으로 라헬과 요셉은 맨 뒤에 세웠습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이미 야곱이 누구를 더 사랑했는지를 금세 파악할 수 있습니다. 특히 많은 자녀 가운데서 요셉의 이름만이 유일하게 기록된 것은, 야곱이 그를 특별히 아끼고 있었음을 가늠하게 합니다.
이처럼 아이들과 여자들을 포함하고 있던 야곱의 무리와는 달리, 장정들로만 이루어진 에서의 무리는 삽시간에 야곱의 무리 앞에 나타났습니다.
동생과 형의 만남(3-11)
(3) 자기는 그들 앞에서 나아가되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가니
야곱은 서둘러 자신의 무리 앞으로 나아가며, 몸을 일곱 번 땅에 굽히며 그의 형 에서에게 가까이 갔습니다. 여기서 ‘굽히다’로 번역된 원어 שׁחה(쏴하)는 ‘엎드리다’, ‘절하다’의 의미를 갖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야곱이 단지 고개나 허리를 가볍게 굽혀 인사한 것이 아니라, 머리가 땅에 땋을 정도까지 몸을 완전히 굽혀 절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처럼 절하기를 일곱 번 반복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일곱(שׁבע, 쉐바)은 완전을 상징했습니다. 야곱은 많은 이들 앞에서 에서에게 일곱 번 땅에 엎드려 절함을 통해서 그의 진심을 전했습니다. 이는 오랜 기간 떨어져 지낸 보통의 형제 관계서는 쉽게 보기 힘든 상봉 장면입니다.
야곱이 이처럼 부복하는 이유는 분명 에서의 분을 가라앉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야곱이 아버지 이삭을 떠나 외삼촌 라반의 곁에, 가나안을 떠나 밧단아람에서 살아야 했던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창 27: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는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사냥에 능한 들사람(에서)에게 있어, 장막에서 머무는 조용한 사람(야곱)을 없애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이에 어머니 리브가는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 야곱을 그의 외삼촌의 집으로 재빨리 피신 시켰습니다. 그날 이후,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 다시 이뤄진 형제의 만남에 있어, 야곱은 그 누구보다도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만남에 있어, 이러한 긴장이 사라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4)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맞추고 서로 우니라
쩔뚝, 쩔뚝. 다리를 절뚝거리며 황급히 무리 앞으로 나오는 야곱을 보며, 불편한 몸으로 더러운 바닥에 엎드리기를 반복하는 동생을 보며, 형의 에서의 마음은 삽시간에 녹아내렸습니다. 에서는 땅에 엎드려 고개를 숙인 그를 향해 달려갔습니다. 두 팔을 벌려 야곱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들사람에게, 형 에서에게 입술에 들러붙는 흙먼지 따위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곧 함께 울며 케케묵은 복잡 미묘한 감정들을 씻어냈습니다. 이들의 모습은 동시에 함께 한 무리들의 긴장도 자연스레 풀어주었을 것입니다.
잠시 후, 에서는 눈을 들어 무리 중의 여자들과 아이들을 보고 누군지 물었습니다.
(5-7) 에서가 눈을 들어 여인들과 자식들을 보고 묻되 너와 함께 한 이들은 누구냐 야곱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그 때에 여종들이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레아도 그의 자식들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고 그 후에 요셉이 라헬과 더불어 나아와 절하니
야곱은 에서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자식들임이라 고백하며, 곧 그들은 소개했습니다. 야곱은 먼저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여종들과 그의 자식들을 소개했고, 이어 레아와 그의 자식들을, 끝으로 라헬과 그의 자식들을 소개했습니다. 앞서 무리를 나눌 때에 여러 아들 가운데서 요셉만 특별히 그의 이름을 기록된 것과 같이, 여기서도 요셉의 이름을 라헬의 이름과 함께 기록되었습니다. 이는 요셉을 향한 야곱의 특별한 마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오늘 우리가 이후로 주목해야 할 이가 누구인지를 미리 보여주고자 한 것 같습니다. 가족 소개가 끝나자, 에서는 야곱의 무리를 만나기 전에 만났던 가축 떼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8) 에서가 또 이르되 내가 만난 바 이 모든 떼는 무슨 까닭이냐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한장 앞선 32장에는 그가 준비한 예물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 32:13-15) 야곱이 거기서 밤을 지내고 그 소유 중에서 형 에서를 위하여 예물을 택하니 암염소가 이백이요 숫염소가 이십이요 암양이 이백이요 숫양이 이십이요 젖 나는 낙타 삼십과 그 새끼요 암소가 사십이요 황소가 열이요 암나귀가 이십이요 그 새끼 나귀가 열이라
상당한 규모의 예물들은 야곱의 종들에 의해서, 그의 무리보다 앞서 얍복 나루를 건너가 에서의 무리에게 전달되었습니다(청32:16-18). 형(에서)은 몸도 성치 못한 동생(야곱)이 준비한 예물들을 받기를 거절했지만, 야곱은 에서에게 거듭해서 예물들을 받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9-11) 에서가 이르되 내 동생아 내게 있는 것이 족하니 네 소유는 네게 두라 야곱이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청하건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내 소유도 족하오니 청하건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예물을 받으소서 하고 그에게 강권하매 받으니라
야곱은 형 에서의 얼굴을 보는 것이 마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다고 이야기 하며, 그를 높입니다. 이는 앞서 브니엘(:하나님의 얼굴)에서의 경험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생명이 보전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과거 자신을 죽이려던 그의 형 에서를 보았으나, 그의 생명이 보전된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입니다. 이어진 야곱의 강권에 에서는 그 예물들을 받았고, 곧 에서는 야곱에게 자신과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헤어짐(12-17)
(12-14) 에서가 이르되 우리가 떠나자 내가 너와 동행하리라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연약하고 내게 있는 양 떼와 소가 새끼를 데리고 있은즉 하루만 지나치게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하건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가축과 자식들의 걸음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함께 가자는 에서의 말에 야곱은, 에서의 무리와 자신의 무리를 비교하며 정중히 거절했습니다. 야곱은 연약한 자식들과 새끼 딸린 양 떼와 소 떼를 데리고 이동해야 하는 그의 무리의 사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이로인해 장정들의 속도에 맞춰 갈 수 없는 까닭에 뒤따라 세일로 찾아갈 것을 전했습니다.
야곱은 세일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땅이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세일은 에서의 후손들이 정착한 땅으로, 후에 에돔으로 불리게 됩니다. 에서는 야곱의 말에 수긍했고, 그의 부하들을 붙여 주고자 했습니다.
(15) 에서가 이르되 내가 내 종 몇 사람을 네게 머물게 하리라 야곱이 이르되 어찌하여 그리하리이까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에서의 말에 이은 야곱의 말이 담고 있는 의미를 새번역 성경은 보다 잘 담아내고 있습니다.
(새번역 15) 에서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내가 나의 부하 몇을 너와 같이 가게 하겠다." 야곱이 말렸다. "그러실 것까지는 없습니다. 형님께서 저를 너그럽게 맞아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과거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얻은 야곱의 빼어난 말솜씨를 다시 한번 보는 것 같습니다. 야곱의 말을 듣고 에서는 곧 장정 사백 명과 함께 예물들을 챙겨 세일로 돌아갔습니다.
(16-17)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돌아가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반면 야곱은 곧 숙곳에 이르자 집을 짓고, 우리를 지었습니다. 유목 생활을 하던 그가 장막이 아닌 집을 지었다는 사실은 그 땅이 그가 소유한 가축들을 잘 돌볼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실제 숙곳은 얍복 강과 요단 강이 만나는 지점이었습니다. 생존에 필수 조건인 물이 풍부했고, 땅은 비옥해 풀들이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간의 야곱의 여정을 간단히 정리함과 동시에, 그가 숙곳에 정착하는 과정을 밝히며 끝맺습니다.
세겜 성읍 앞에서 야곱(18-20)
(18-20)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은 밧단아람에서부터 가나안 땅 세겜 성읍까지 평안히 이르렀습니다. 짧지 않은 여정 속에서, 그의 가족들과 가축들은 무탈했습니다. 야곱은 곧 세겜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땅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에게 백 קשׂיטה(크시타)에 매입했습니다. 크시타가 당시의 화폐 단위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일부는 학자들은 그의 가치를 새끼 양 한 마리 정도로 보기도 하고, 은이나 금으로 보기도 합니다.
여기서 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 땅을 매입한 야곱이 거기에 제단을 쌓았다는 것이고,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재단의 이름을 ‘אל אלהי ישׂראל(엘 엘로헤 이스라엘)’ 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밧단아람에서 가나안까지의 연약한 아이들과 여인들까지 함께한 야곱의 여정이 평안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무리가 잘 훈련된 군대와 같았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잘 훈련된 군대와 같은 에서의 무리를 마주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무리가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눈을 들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힘입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이 여정은 그가 하나님의 뜻 앞에 엎드리는 과정이었습니다(창 31:3). 그는 자신을 죽이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있던 위험한 인물과의 대면을 앞두고, 병기를 갖추어 무리를 훈련 시키거나 잘 훈련된 용병을 고용해서 싸움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떨리는 마음을 부여 잡고, 그 시간을 향해 나아 갔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순간 앞에서 선 그는 온전히 엎드렸습니다. 긴 세월을 통해 그가 깨달은 한가지는 바로 이것이 었습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엎드림의 결과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그의 엎드림은 복수심에 불타 동생을 죽이는 것이 삶의 목적이었던 들사람 에서로 하여금 용서를 베풀 수 있는 은혜의 자리로 초청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야곱은 용서를 얻었고, 단절된 형제의 관계를 회복하게 했습니다. 또, 그 주변인들의 생명도 지켜줄(낼)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그의 엎드림은 그의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를 체득하게 했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들 앞에 엎드리기를 주저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지를 함께 헤아려 보면서, 혹 우리도 그 무리에 속한 것은 않은지 점검해 보면 좋겠습니다.
닭 울음소리에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회개한 베드로처럼, 야곱의 엎드림을 통해 주님께서 회개의 자리로 초청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께서 허락해 주신 사람 앞에 먼저 엎드리기를 주저하지 않을 때, 야곱이 경험한 은혜는 우리의 삶에서도 나타나게 될 것이고, 우리 삶의 자리에서는 하나님 사랑의 증인 된 이의 모습이 발견되어질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말씀에 따라 밧단아람을 떠나 가나안을 향한 야곱의 여정을 살펴보며, 그와 동행해 주시는 하나님을 모습을 살펴보게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와 같이 주님의 말씀 앞에 엎드려야겠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지만, 정작 삶의 자리에서는 주님의 말씀을 밟고 섰던 것만 같아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주님의 말씀 앞에, 에서 앞에 엎드린 야곱의 모습을 기억하며, 베드로에게 들렸던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음을 고백합니다. 온전히 엎드린 그의 모습이, 교만을 내려 놓은 저희 모습의 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눈을 들어 동행해 주시는 주님만을 바라며, 주님 사랑의 증인으로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오늘 우리가 눈을 들어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사백 명의 장정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면, 어떤 마음이 들지 헤아려 보시겠습니까?
3. 엎드려 용서를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 돌아 보시겠습니까?
4. ‘엘 엘로헤 이스라엘 :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마지막으로 외쳐본 적이 언제였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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