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 가도록’
아브람은 99세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언약해주신 자식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89세의 아내 사래는 폐경이 되었기에 그들은 자식에 대한 미련을 버려야 했습니다. 아브람 부부가 이처럼 상심하고 있는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셔서, 후손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해주셨고, 두 사람의 이름을 개명시켜주셨습니다. ‘높은 아버지’란 뜻의 아브람을 ‘큰 무리의 아버지’라는 의미인 아브라함으로 사래(나의 공주)를 사라(열국의 어머니)로 개명시켜주심으로 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언약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임으로 천명하셨습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3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앞서 32장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이름을 개명시켜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재차 개명시켜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서 밤새 하나님께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의 뜻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하나님까지도 악착같이 겨루어 이길 정도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곱의 삶을 다 내려놓고, 앞으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서 너를 주도하는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야곱은 잠잠했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통혼을 제의해왔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기탱천한 야곱의 아들들이 묘략으로 하몰 족속을 진멸하자, 가나안 족속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아들들을 꾸짖었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로 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셨던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갈 것을 결단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의 신앙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제 살펴보았던 35장 10절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다고 증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앞서 32장 얍복 강가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부르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이름을 개명시켜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야곱의 이름을 재차 개명시켜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앞서 얍복 강가에서 야곱은 형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두려움 속에서 밤새 하나님께 애원하며 매달렸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개명해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김"의 뜻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주도하신다, 하나님께서 통치하신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그들과 겨루어 이겼고, 하나님까지도 악착같이 겨루어 이길 정도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곱의 삶을 다 내려놓고, 앞으로는 이스라엘 즉, ‘하나님께서 너를 주도하는 삶을 살아라’라는 의미로 이름을 바꾸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후 야곱은 이스라엘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야곱으로 살았습니다. 딸 디나가 추장 세겜에게 성추행을 당했음에도 야곱은 잠잠했습니다. 이방인인 그들이 통혼을 제의해왔어도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기탱천한 야곱의 아들들이 묘략으로 하몰 족속을 진멸하자, 가나안 족속의 보복을 두려워하며 아들들을 꾸짖었습니다. 이같이 이스라엘로 살지 못하고,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는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을 것을 명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스라엘로 살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주셨던 것입니다. 벧엘에서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자신을 버리고, 눈을 들어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아갈 것을 결단한 그에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하신 언약을 이루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의 신앙 여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라헬의 죽음과 장남의 탈선에 직면한 이스라엘 (16-20)
(16-20)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벧엘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난산이었고 해산한 후에 라헬을 사망하게 됩니다. 첫 아들 요셉 이후 임신하지 못하다가 십수년 만에 둘째를 임신한 그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의 고향으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둘째가 해산 한 후에 바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녀가 막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을 뜻하는 베노니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대가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비탄과 슬픔을 라헬의 마음을 빌어 표현했으며(예레미야 31:15), 마태도 헤롯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살해할 때의 비통함을 라헬의 슬픔을 빌어 표현했습니다(마 2:18).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서 장사지내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사건과 장소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주변의 돌로 비석을 세우곤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 장소에 비석을 세운 기록이 많이 있지만, 사람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은 라헬의 묘비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는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잘 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낸 슬픔 앞에서도 야곱은 라헬의 둘째 아들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른손의 아들’을 뜻하는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오른손은 능력과 힘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어머니 없이 자라야 할 막내아들이 힘 있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야곱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자녀들이 힘 있고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당연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상적으로 힘 있는 사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막내아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21절의 표현 때문입니다.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주어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벧엘에서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애통하다’로 해석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보통의 슬픔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뜻합니다. ‘복’으로 해석된 원어(마카리호이)는 ‘행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원어 순서대로 해석하면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사람은‘입니다. 왜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지를 주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곡을 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이별로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추상적이고 막연한 말로만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벽의 일부였던 이 벽 앞에서 와서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함락을 슬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지만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원하며 통곡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늘의 위로를 기대하며, 슬픔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세기에 걸쳐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가 다시 복원된 나라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슴이 찢어지는 사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장남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했습니다. 르우벤은 왜 이같은 패륜 행위를 했을까요? 사무엘하 3장에는 사울의 조카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동침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역시 사무엘하 16장에는 쿠데타에 성공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과 동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권력의 후계자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본문을 보면 르우벤이 서모와 동침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과 권한을 요구한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패륜 행위 앞에서 야곱이 느꼈을 배반감과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온갖 음모와 묘략을 동원해서 에서의 장자권을 강탈했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장남의 패륜적인 행동 속에서 투영됨에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벧엘에서 새로 거듭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통회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재산권의 분배를 요구한 탕자를 끝까지 품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던 르우벤은 결국 장자권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됩니다.(창세기 49, 역대상 5:1-2).
야곱의 12 아들들 (23-26)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변화된 삶을 산 결과가 22절의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입니다. 23절~26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12명의 아들의 명단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12지파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6-20) 그들이 벧엘에서 길을 떠나 에브랏에 이르기까지 얼마간 거리를 둔 곳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되어 심히 고생하여 / 그가 난산할 즈음에 산파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네가 또 득남하느니라 하매 / 그가 죽게 되어 그의 혼이 떠나려 할 때에 아들의 이름을 베노니라 불렀으나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냐민이라 불렀더라 /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 야곱이 라헬의 묘에 비를 세웠더니 지금까지 라헬의 묘비라 일컫더라
벧엘을 떠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서 라헬이 해산하게 됩니다. 그런데 난산이었고 해산한 후에 라헬을 사망하게 됩니다. 첫 아들 요셉 이후 임신하지 못하다가 십수년 만에 둘째를 임신한 그녀는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게다가 사랑하는 남편의 고향으로 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둘째가 해산 한 후에 바로 데려가셨습니다. 그녀가 막내 아들의 이름을 ‘슬픔의 아들’을 뜻하는 베노니라고 불렀다는 것은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을 두고 떠나야 하는 그녀의 슬픔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B.C. 586년 바벨론에 의해 유대가 점령당하고 백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가는 것을 예언한 예레미야 선지자는 그 비탄과 슬픔을 라헬의 마음을 빌어 표현했으며(예레미야 31:15), 마태도 헤롯 왕이 베들레헴과 그 근방의 죄 없는 어린 아이들을 살해할 때의 비통함을 라헬의 슬픔을 빌어 표현했습니다(마 2:18). 갑작스런 그녀의 죽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사람은 야곱이었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녀를 베들레헴 길에서 장사지내고 묘비를 세웠습니다. 히브리인들은 특별히 기념할 만한 사건과 장소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주변의 돌로 비석을 세우곤 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과 관련된 사건이 있는 장소에 비석을 세운 기록이 많이 있지만, 사람의 무덤에 묘비를 세우고, 그 이름을 불렀다는 기록은 라헬의 묘비가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이는 야곱의 라헬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잘 설명해주시고 있습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부인을 떠나보낸 슬픔 앞에서도 야곱은 라헬의 둘째 아들 이름을 ‘슬픔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오른손의 아들’을 뜻하는 ‘베냐민’이라고 불렀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성경에서 오른손은 능력과 힘의 상징이자,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어머니 없이 자라야 할 막내아들이 힘 있고 강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그런데 야곱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부모들도 자녀들이 힘 있고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당연히 소망합니다. 그런데 야곱은 세상적으로 힘 있는 사람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막내아들이 ‘하나님의 권능에 힘입어 용맹한 사람’이 되기를 소망했습니다. 이같은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21절의 표현 때문입니다.
(21) 이스라엘이 다시 길을 떠나 에델 망대를 지나 장막을 쳤더라
주어가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입니다. 벧엘에서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장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마 5:4)’라고 선포하셨습니다. ‘애통하다’로 해석된 헬라어 원어의 의미는 보통의 슬픔이 아니라 야곱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극심한 상실의 슬픔을 뜻합니다. ‘복’으로 해석된 원어(마카리호이)는 ‘행복’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원어 순서대로 해석하면 ‘행복하여라 애통하는 사람은‘입니다. 왜 애통하는 사람이 행복한지를 주님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곡을 하는 유대인들과 함께 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이별로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추상적이고 막연한 말로만 그치는 위로가 아니라, 함께 눈물을 흘리시면서 그들의 슬픔에 동참하시며 위로해주셨습니다.
예루살렘에는 통곡의 벽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70년경에 예루살렘은 로마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벽의 일부였던 이 벽 앞에서 와서 성전 파괴와 예루살렘의 함락을 슬퍼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슬퍼하지만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예루살렘의 회복을 기원하며 통곡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늘의 위로를 기대하며, 슬픔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인류 역사상 수세기에 걸쳐 지도에서 사라졌던 나라가 다시 복원된 나라는 이스라엘이 유일합니다.
이스라엘로 거듭난 야곱은 가슴이 찢어지는 사별의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위로 받았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미스러운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22)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주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아버지의 첩 빌하와 동침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장남 르우벤이 서모인 빌하와 통간했습니다. 르우벤은 왜 이같은 패륜 행위를 했을까요? 사무엘하 3장에는 사울의 조카 아브넬이 사울의 후궁과 동침한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역시 사무엘하 16장에는 쿠데타에 성공한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 다윗의 후궁과 동침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모두 권력의 후계자로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으로 본문을 보면 르우벤이 서모와 동침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재산과 권한을 요구한 행동으로 해석됩니다. 즉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습니다. 이 패륜 행위 앞에서 야곱이 느꼈을 배반감과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온갖 음모와 묘략을 동원해서 에서의 장자권을 강탈했던 자신의 죄악된 모습이 장남의 패륜적인 행동 속에서 투영됨에 소스라치게 놀랐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벧엘에서 새로 거듭난 이스라엘로서의 야곱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에 대해 통회하면서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며, 재산권의 분배를 요구한 탕자를 끝까지 품은 아버지의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깊은 절망감 속에서도 그의 시선은 하나님을 향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위로하심에 자신을 의탁했습니다.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했던 르우벤은 결국 장자권을 박탈당하는 것으로 죄에 대한 값을 치르게 됩니다.(창세기 49, 역대상 5:1-2).
야곱의 12 아들들 (23-26)
이같이 하나님의 은혜로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로 변화된 삶을 산 결과가 22절의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입니다. 23절~26절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12명의 아들의 명단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대로 12지파를 중심으로 번성하게 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장례를 치르는 두 형제 (27-29)
드디어 야곱은 아버지가 있는 고향 헤브론에 돌아왔습니다(27). 잠시 떠나 피해있으면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소 20년 지난 시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삭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로 맺는 본문 속에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두 사람의 슬픔 속에서도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 암투와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와 신뢰 그리고 사랑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가 이렇게 변모하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개명해주신 이스라엘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가수 해리 로더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로 공연을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해리는 서둘러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병실 안에 같은 아픔으로 슬퍼하고 있는 병사와 유족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후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펐지만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하고 좌절하든지, 술로 파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슬픔을 맡기고 자유롭게 되는지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제 슬픔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제게 공급해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했을 뿐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않습니다. 혹독한 폭풍우도 몰아치고, 칠흑 같이 어두운 순간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다른 점은 삶의 순간 특히 역경의 순간,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주님의 위로를 통해 슬픔이 희망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산상 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야곱을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인도해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힘듭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질병으로 인해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취업, 학업, 인간관계 등으로 인해 힘듭니다.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힘든 상황입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의 슬픔과 어려움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위로를 구하오니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주님의 위로하심에 힘입어 행복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언약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침묵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롭게 귀가하시겠습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야곱은 사랑하는 레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2. 야곱은 장남의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다?
3. 야곱의 12자녀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4. 이삭의 장례를 치르는 두 형제의 모습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5.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드디어 야곱은 아버지가 있는 고향 헤브론에 돌아왔습니다(27). 잠시 떠나 피해있으면 곧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최소 20년 지난 시점에 다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버지 이삭의 죽음으로 막을 내립니다.
(28) 이삭의 나이가 백팔십 세라(29) 이삭이 나이가 많고 늙어 기운이 다하매 죽어 자기 열조에게로 돌아가니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
이삭의 죽음과 함께 ‘그의 아들 에서와 야곱이 그를 장사하였더라’로 맺는 본문 속에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두 사람의 슬픔 속에서도 형제간의 시기와 질투, 암투와 죽음의 어두움이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와 신뢰 그리고 사랑의 향기가 가득합니다. 평생을 원수처럼 지냈던 형제가 이렇게 변모하게 된 것은 야곱이 하나님께서 개명해주신 이스라엘로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가수 해리 로더는 공연 중에 자신의 아들이 전쟁터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평소와 같이 웃는 얼굴로 공연을 순조롭게 마쳤습니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해리는 서둘러 아들의 시신이 있는 야전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들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대신에 병실 안에 같은 아픔으로 슬퍼하고 있는 병사와 유족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후에 잡지사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의 죽음이 슬펐지만 고통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비관하고 좌절하든지, 술로 파멸하든지 아니면 하나님께 슬픔을 맡기고 자유롭게 되는지 말입니다. 저는 하나님께 제 슬픔을 맡겼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놀라운 위로와 힘을 제게 공급해주셨고, 저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했을 뿐입니다.’
인생은 언제나 달콤하지만 않습니다. 혹독한 폭풍우도 몰아치고, 칠흑 같이 어두운 순간도 있습니다. 신앙인이 비신앙인과 다른 점은 삶의 순간 특히 역경의 순간, 시선이 어디를 향하고 있느냐? 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우리의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갈 때, 주님의 위로를 통해 슬픔이 희망으로 승화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또한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산상 수훈을 통해 말씀하신 복된 인생, 행복한 인생을 누리게 된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야곱을 이스라엘로 살아가게 인도해주신 주님께서 우리를 택하셔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인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의 슬픔으로 인해 힘듭니다. 경제적인 어려움과 질병으로 인해 힘든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취업, 학업, 인간관계 등으로 인해 힘듭니다. 차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일들로 인해 힘든 상황입니다. 주님, 이 시간 우리의 슬픔과 어려움을 주님께 맡깁니다. 우리의 눈을 들어 주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주님의 위로를 구하오니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현실을 도피하지 않고 주님의 위로하심에 힘입어 행복한 주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의 영원한 언약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침묵으로 기도하시다가 자유롭게 귀가하시겠습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야곱은 사랑하는 레아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까?
2. 야곱은 장남의 일탈을 어떻게 받아들였습니다?
3. 야곱의 12자녀를 기록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4. 이삭의 장례를 치르는 두 형제의 모습은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5.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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