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송가 187장 ‘비둘기 같이 온유한’
35장에서 이삭이 죽음을 맞은 이후 36장에는 에서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그리고 37장 야곱의 족보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배열 방식은 창세기를 기술하는 특징 중 하나입니다. 즉 한 세대가 마치면 그 직후에 하나님의 언약을 받지 못한 후손의 족보가 등장하는 식입니다. 롯이 그러했고, 이스마엘이 그러했으며, 이제 에서가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분량이 상당합니다. 창세기 50장 중 1장, 총 43절에 해당하는 이 에서의 족보가 별 뜻 없이 들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오늘과 내일 말씀을 통해 그 의미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서의 족보: 세 아내와 다섯 아들(1-8)
(1) 에서 곧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1절부터 8절까지는 에서의 세 아내와 다섯 아들을 밝히고, 그들이 에돔으로 이주한 과정을 그립니다. 그런데 에서를 에돔이라 칭합니다. 앞장에서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에서는 에돔이 되었습니다. 에서는 ‘붉다’ 또는 ‘털이 많다’는 뜻인데, 에돔 역시 ‘붉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에돔은 현재 요르단 남부 지역에 해당하는데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유명한 페트라가 있습니다. 페트라는 ‘반석’이라는 뜻으로 사암(砂巖)으로 이루어져 붉은색을 발하는 바위산에 건설된 고대 도시입니다. 또 와디럼이라는 붉은 사막 역시 이 지역의 관광지로 유명합니다. 게다가 에서는 붉은 죽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기까지 했습니다. 이처럼 에돔이라는 명칭은 여러모로 잘 어울립니다.
본문은 에돔의 족보는 이러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창세기는 10개의 톨레도트, 즉 10개의 족보로 구성되는데 그중 에돔의 족보는 특별히 1절과 9절에 나오는 에서의 톨레도트 두 개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장에서 창세기 끝까지 이어지는 마지막 족보인 야곱의 톨레도트가 나타납니다. 창세기에서는 약속의 자손인 직계 톨레도트 외에 방계 톨레도트가 세 개 있습니다. 즉 셈, 함, 아벳의 톨레도트(창 10:1-9), 이스마엘의 톨레도트(창 25:12-18), 에서의 톨레도트가(창 36:1-8, 36:9-37:1) 해당합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그다음에 이어지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인물의 족보 앞에 등장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언약 계승자에서 멀어지며 이후에는 다시 다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왜 두 족보를 비교하는 식으로 두시는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우선 선택과 배제라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역사 구성 방식을 이해해야 합니다. 셈, 함, 아벳 중에서는 셈이 선택되었고, 이삭과 이스마엘 중에서는 이삭이 선택되었으며, 야곱과 에서 중에서는 야곱이 선택됩니다. 선택과 배제라고 하면 배제된 이들은 하나님께 완전히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을 줄 수 있지만, 여기서 선택이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계통에 집중한다는 의미이지 선택받지 못한 자들이 자동적으로 멸망 받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후 야곱의 열두 아들이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이 언약 백성은 혈통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를 입증합니다.
그런데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 미래가 정해져 있었습니다. 창세기 25장 23절에서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더 나아가 말라기 1장 2절과 3절, 그리고 로마서 9장 1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고 하십니다. 지금까지 야곱과 에서의 삶을 살펴봤지만, 야곱이 에서보다 성품에 큰 우위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둘 다 결함이 있었고 부족했습니다. 장자의 권리를 소홀히 여기고 이방 여인을 맞이한 일이 아버지를 속이는 일에 비해 큰 흠인가 싶기도 합니다. 20년 동안 외삼촌 아래서 고생한 야곱도 안타까운 면이 있지만, 복수심에 사로잡혀 아우를 죽이겠다는 일념으로 살아온 에서도 가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에서를 미워하셨다는 말씀을 접할 때 그 이유를 묻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에서를 그렇게 만드셨습니까?
스펄전 목사님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인이 스펄전 목사님께 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어째서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고 하셨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제게는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어떻게 하나님이 야곱을 사랑하실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질문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생각을 합니다. 모든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우리가 하나님일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에 우리의 개입이 전혀 들어갈 틈새 하나 없이 하나님께서 답이 되어 주시기에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을 만큼 알게 하시고, 하나님을 모를 만큼 모르게 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다룰 수 없는 분이십니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우리는 두 가지로 왜 나입니까?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왜 하필 저입니까? 왜 하필 제게 이런 일이 벌어지게 하십니까? 라는 원망의 질문입니다. 우리가 종종 묻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또 한 편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떻게 저일 수 있습니까? 왜 나에게 이렇게 선한 일을 행하십니까? 라는 감사의 질문이 반드시 나오기 마련입니다.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이 삶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 하나님이 왜 허락하셨는지 모르겠는 일들이 참 많습니다. 그때 어느 편을 택하시겠습니까? 그래 하나님은 없어. 내 뜻대로 하겠어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겠습니다 하시겠습니까. 똑같이 중한 질병에 걸려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다면 이 일을 내게 일어나게 하실 수 없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반면 다른 사람은 하나님이 계시기에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하며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갑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2-5) 에서가 가나안 여인 중 헷 족속 엘론의 딸 아다와 히위 족속 시브온의 딸인 아나의 딸 오홀리바마를 자기 아내로 맞이하고 또 이스마엘의 딸 느바욧의 누이 바스맛을 맞이하였더니 아다는 엘리바스를 에서에게 낳았고 바스맛은 르우엘을 낳았고 오홀리바마는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들들이요 가나안 땅에서 그에게 태어난 자들이더라
에서는 야곱에 비해 훨씬 일찍 장가를 들었습니다. 창세기 26장 34절을 보면 에서는 40세에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 기록에는 헷 족속 브에리의 딸 유딧과 헷 족속 엘론의 딸 바스맛을 맞이하였다고 합니다. 또 28장 9절에서는 이스마엘의 딸이자 느바욧의 누이인 마할랏을 아내로 맞이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 이름과 출신이 36장에서 기술하는 내용과 완전히 다르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지 사실상 설명하기란 어렵습니다. 결혼 전의 이름과 결혼 후의 이름에 차이가 있었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은 여러 개의 이름을 지녔다고 보기도 합니다만 이해가 어려운 지점입니다. 다만 중요한 사실은 에서가 야곱과 리브가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여성들과 혼인 관계를 맺었고, 이후에는 부모님의 마음에 들고 싶다고 자기 뜻대로 이스마엘의 딸과 결혼했다는 점입니다. 창세기 26장 35절에는 그들이 야곱과 리브가의 마음에 근심이 되었다고 기록하며, 창세기 27장 46절에는 내가 헷 사람의 딸들로 말미암아 내 삶이 싫어졌거늘이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큰 고부갈등이 있었을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갈등이 발생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상대방의 입장은 묻지도 고려하지도 않은 채 마음대로 해놓고서는 상대방을 위해서 한 일이었다고 그것을 원하지 않았느냐고 큰소리를 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지 생각하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자기 뜻대로 해버리고서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서 했다고, 하나님이 좋아하시지 않았느냐고 우기는 일은 없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내 뜻을 강요하는 일에 불과합니다.
(6-8) 에서가 자기 아내들과 자기 자녀들과 자기 집의 모든 사람과 자기의 가축과 자기의 모든 짐승과 자기가 가나안 땅에서 모은 모든 재물을 이끌고 그의 동생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으니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주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이 거주하는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이에 에서 곧 에돔이 세일 산에 거주하니라
에서는 가나안에서 났고, 가나안에서 자랐으며, 가나안인 아내를 구하여 가나안에서 자녀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이 가나안 땅을 떠나 기약 없는 삶을 살아갈 때, 에서는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하였고 야곱만 제거한다면 약속의 땅을 누릴 적자가 될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가나안에서 모은 모든 소유를 가지고 야곱을 떠나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창세기 32장 3절을 보면 이미 에서는 세일 땀 에돔 들에 있었다고 말하고, 32장 16절에서는 에서가 세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따라서 에서는 에돔에서 어느 정도 정착을 했었고, 야곱이 돌아왔을 때부터 함께 아버지 곁에서 머물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제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에서는 야곱을 떠나갑니다. 특히 본문은 에서가 자신의 힘으로 자기가 쌓은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가지고 떠났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에서는 자신의 능력으로 일가를 이루었고 이제는 하나님의 약속과는 상관없는 삶을 살기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이제 야곱에게 선심을 베풀고 있습니다. 롯이 그러했듯이 경제적인 이득을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버리고 롯과 마찬가지로 동으로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언약의 장본인인 야곱이 가나안 땅에 거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여 옮겼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야곱은 밧단 아람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왔고 에서는 자연스럽게 가나안 땅에서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이방의 땅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과연 이러한 일이 평화롭게 이루어지리라고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만약 야곱이 밧단아람에서 고생할 때에 에서가 너를 용서하고 가나안 땅을 양보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코웃음을 쳤을 것입니다. 또 에서에게 네가 결국 이삭을 용서하고 가나안 땅을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면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고 했을 것입니다. 예전에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원합니다. 우리가 이른 지금 이곳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우리가 과연 이것은 내 소유이며 내가 계획했던 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에서는 야곱이 도망간 후 그를 언젠가 죽여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려고 군사력을 키웠지만 결국 그 땅에서 물러나고 맙니다. 또 야곱은 반대로 약속과 전혀 상관없는 땅에서 살다가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땅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삶의 엇갈림을 경험합니다. 저는 5-6년 전쯤에 우연히 우리 교회 교역자 청빙 공고를 봤었습니다. 확인해 보니 지원하는 기간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이기도 했습니다만, 우리 교회에서 사역한다는 게 언감생심처럼 느껴졌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당시 제게 100주년기념교회에 갈 수도 있으니 지원해 보라고 했으면 말도 안 된다고 손사래를 쳤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부족하지만 어엿하게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주님께서 왔으며, 주님께서 붙들어 주시는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삶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달라질 것입니다.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 치달았던 두 형제의 엇갈림은 하나님의 신비하고도 오묘한 일하심을 일깨워 줍니다.
에서의 족보: 에서의 자손과 족장들(9-19)
(9-14) 세일 산에 있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는 이러하고 그 자손의 이름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아내 아다의 아들은 엘리바스요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아들은 르우엘이며 엘리바스의 아들들은 데만과 오말과 스보와 가담과 그나스요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는 아말렉을 엘리바스에게 낳았으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아다의 자손이며 르우엘의 아들들은 나핫과 세라와 삼마와 미사니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시브온의 손녀 아나의 딸 에서의 아내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이러하니 그가 여우스와 얄람과 고라를 에서에게 낳았더라
1절에서는 에돔의 족보라고 하였는데 9절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 에서의 족보라고 말합니다. 에서는 그 땅에 존재했던 세일의 자손을 흡수하여 자신의 족보로 만들어 버립니다. 에서는 대단한 수완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에서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큰 민족과 나라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에돔은 이스라엘 역사에 걸쳐 형제에게 도움이 아닌 해를 끼치는 존재가 되었음을 잊을 수 없습니다. 신명기 23장 7절을 보면 모세는 “너는 에돔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그는 네 형제임이니라”고도 했지만, 그들은 우호적으로 반응하지 못했습니다. 우선 출애굽 당시 모세가 에돔 땅을 통과하고자 했을 때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사울과 다윗 시대에는 에돔 지역을 정복하지만, 분열 왕국 시대에 에돔은 계속해서 유다를 배신하고 괴롭혔습니다. 특히 바벨론이 유다를 공격할 때는 바벨론과 한통속이 되어 유다를 침공하기까지 합니다. 따라서 오바댜는 이 에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분명히 선포합니다. 그리고 에돔 사람인 헤롯 대왕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기까지 합니다. 에서의 후예는 결국 언약에서 벗어난 자로서 언약에서 벗어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15-19) 에서 자손 중 족장은 이러하니라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의 자손으로는 데만 족장, 오말 족장, 스보 족장, 그나스 족장과 고라 족장, 가담 족장, 아말렉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엘리바스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아다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들 르우엘의 자손으로는 나핫 족장, 세라 족장, 삼마 족장, 미사 족장이니 이들은 에돔 땅에 있는 르우엘의 족장들이요 이들은 에서의 아내 바스맛의 자손이며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의 아들들은 여우스 족장, 얄람 족장, 고라 족장이니 이들은 아나의 딸이요 에서의 아내인 오홀리바마로 말미암아 나온 족장들이라 에서 곧 에돔의 자손으로서 족장 된 자들이 이러하였더라
15절에서 19절은 에서 자손 중에 족장이 된 자들을 기록합니다. 9-14절의 목록과 큰 차이가 없지만 엘리바스의 자손에서 고라 족장이 추가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에서의 자손 중에 족장들이 많이 배출된 것을 볼때 하나님의 약속대로 에서는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이 있습니다. 언약에서 완전히 제외된 것처럼 보이는 에돔 자손 중에서도 그나스 족장이 있다는 점입니다. 민수기 32장 12절을 보면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다고 합니다. 보통 이 두 그나스를 같은 인물로 보는데, 그렇다면 갈렙은 비록 에돔의 후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인물이 되었고, 그 후예들도 그러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에서의 아들 엘리바스의 첩 딤나에게서 난 아말렉은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해를 입혔고, 그에 따라 출애굽기 17장 16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과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고” 하기까지 합니다. 그 결과 다윗은 그들을 쳤고, 히스기야 왕 시절에는 세일 산에 피하여 남아있던 아말렉 족속을 거의 전멸시켰으며, 에스더 때는 아말렉 후손인 하만과 그 일가를 처형하여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이처럼 에돔 족속 안에서도 두 가지 갈래가 나뉘는 것을 봅니다.
에돔 족속이었기 때문에 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롯이 갈라졌고, 이스마엘이 갈라졌고, 에서가 갈라져 나갔지만, 이제 야곱의 열두 아들은 갈라지지 않고 누구든지 하나님을 믿고 할례를 받으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에게도 두 길이 있습니다. 자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신뢰했던 야곱의 길과 하나님을 버리고 자신을 신뢰했던 에서의 길이 있습니다. 심지어 에돔과 같은 상황일지라도 우리에게는 항상 기회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도 망하는 이가 있었지만, 에돔 자손 중에서도 흥하는 이가 있었습니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손 내미시고 함께 가기를 갈망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내 소유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내게 속하지 않았음을 봅니다. 지금 여기까지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고 교만하지 않게 하시옵소서. 또 어느 형편에 있든지 세속적인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 본위의 바른길을 선택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어떤 의미로 “왜 나입니까?”라고 하나님께 물으셨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2. 내가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지금의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보십시오.
3. 에돔 족속에서도 하나님을 믿는 자손이 나왔음을 보며 하나님의 은혜를 묵상해 보십시오.
4. 오늘 내가 에서의 길이 아닌 야곱의 길, 아말렉의 길이 아닌 그나스의 길을 택하기 위해 결단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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