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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48:8-22

 창세기 48:8-22 


찬송가 545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앞선 본문에서 야곱이 요셉에게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입양 후 자신의 아들의 대열로 승격시키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야곱은 자신에게 죽음이 임박함을 알고 요셉에게 유언적 당부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전수하고 요셉의 두 아들을 이스라엘 공동체로 삼아 전달 될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야곱의 축복하는 과정 중에 오늘의 본문은 야곱이 행했던 독특한 행동과 요셉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해 갑니다.

예측 밖의 하나님의 은혜(8-19)

(8)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이르되 이들은 누구냐

이미 5절에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양자로 삼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야곱은 마치 이들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노년이 된 야곱이 눈이 어두워 자기 손자들을 잘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서는 과거 아버지 이삭이 자신과 형 에서를 구분하지 못한 채 복을 빈 것과 같은 일을 범하지 않기 위한 노파심에서 이 말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9-10) 요셉이 그의 아버지에게 아뢰되 이는 하나님이 여기서 내게 주신 아들들이니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그들을 데리고 내 앞으로 나아오라 내가 그들에게 축복하리라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말미암아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버지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9절에서는 각기 다른 세 주체가 등장하는 데 요셉의 두 아들과 요셉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강조되는 중요한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에브라임과 므낫세를 애굽에서 낳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키우겠다는 요셉의 의지가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0절은 야곱의 눈이 어두운 상태를 표현했습니다. ‘어두워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일차적으로 ‘무겁다’,‘둔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로 유추해 볼 때 야곱의 눈이 완전히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그 기능이 많이 저하되었다는 의미가 더 정확한 해석일 것입니다. 한편 야곱이 요셉의 아들들을 축복하는 본 단락에서 눈‘은 중요한 해석적 도구가 됩니다. 육신의 측면으로 볼 때 야곱의 눈은 어두웠지만, 그의 영적 눈은 밝아 선택과 축복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잘 깨닫고 있었습니다.

(11)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더니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도다

한글 성경에서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히브리어 감탄사 ‘봐라’라는 단어가 11절에 등장 합니다. 이 단어를 넣어 직역을 해보면, ‘네 얼굴을 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하였는데 봐라! 하나님이 내게 네 자손까지도 보게 하셨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정말 기대조차 못한 일이 이루어진 데 대한 놀라움의 표현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했다는 사실이 원어 성경에서 ‘보게 하셨도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를 통해 좀 더 잘 드러납니다. 즉, 야곱은 스스로 어떤 일도 상상하거나 기대할 수 없었지만,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그의 자녀에게 생각지도 못했던 은혜를 베푸셨음을 겸허히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의 생애 가운데 기대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강권적인 은혜와 역사가 있는지 돌이켜 보기를 소원합니다.

(12-14) 요셉이 아버지의 무릎 사이에서 두 아들을 물러나게 하고 땅에 엎드려 절하고 오른손으로는 에브라임을 이스라엘의 왼손을 향하게 하고 왼손으로는 므낫세를 이스라엘의 오른손을 향하게 하여 이끌어 그에게 가까이 나아가매 이스라엘이 오른손을 펴서 차남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고 왼손을 펴서 므낫세의 머리에 얹으니 므낫세는 장자라도 팔을 엇바꾸어 얹었더라

12절에서 야곱은 유셉의 두 아들을 안고 있다가 이제는 이들을 축복하기 위해 자신의 무릎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도록 하여습니다. 13절에서 요셉은 고대 근동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오른손을 권위와 탁월한 능력, 은혜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의 장자 므낫세를 그의 아버지의 오른쪽 손으로 축복받도록 시도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14절에서 야곱은 팔을 엇바꾸어 얹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엇바꾸어 얹었더라’라고 해석된 히브리어는 ‘신중하다’,‘지혜롭다’의 뜻을 가진 어원을 가진 단어인데, 이는 야곱이 팔을 엇바꾸어 얹었다는 행위를 강조할 뿐만이 아니라 야곱이 이와 같은 결정을 하기까지 신중하게 생각하였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야곱의 행동이 돌발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복을 비는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한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보여준 장면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히 왜 야곱이 이러한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겉으로 보여진 야곱의 돌발 행동이 초자연적인 충동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무심코 옳은 일을 한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들은 예측하기 힘든 요소입니다. 따라서 므낫세는 창세기에서 어떤 이유에서든 지나간 장자들의 대열, 즉 가인, 이스마엘, 에서, 르우벤과 같은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의 경우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직접적으로 창세기 21장 12절에 이삭이 ‘장자’여야 한다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에서와 르우벤의 경우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장자의 지위를 상실했음을 우리는 지난 창세기의 여정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므낫세는 자기 지위를 잃을 어떤 일도 하지 않았고, 야곱은 에브라임을 높이라는 어떤 계시도 받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데, 야곱은 그런 결정을 하였습니다.

(15-16)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이르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이 섬기던 하나님, 나의 출생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여호와의 사자께서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오며 이들로 내 이름과 내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의 이름으로 칭하게 하시오며 이들이 세상에서 번식되게 하시기를 원하나이다

야곱은 이제 두 손자에게 축복하며 선언을 합니다. 복을 빌어주는 15절 초반의 부분에서 야곱은 삼대를 포함하는 기도를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첫째, 야곱은 자기 아버지와 할아버지부터 섬겼던 하나님에 대한 언급을 합니다. 이 삼대의 인물들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행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자기 조상의 하나님과 조상들이 그 하나님 앞에서 실행한 순종을 부각시킴으로써 그의 말을 시작합니다. 15절에 ‘기르신’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목자’라고 표현해도 적절히 본문과 부합됩니다. 즉, 본문은 과거 아브라함과 이삭이 섬겼고, 지금까지 야곱을 이끄신 하나님의 모습을 마치 양과 목자의 관계처럼 시각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평생을 양치는 사람으로 살아온 야곱이 목자와 양의 관계를 언급한 것은 이 비유보다 하나님과 그의 인생을 더욱 잘 묘사할 수 있는 다른 표현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하나님께서 좋은 목자가 되신다고 고백한 야곱의 기도는 그 자체가 가장 진실한 신앙 고백인 것입니다. 16절에서 야곱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말한 ‘모든 환난’이라는 ‘환난’은 어려움이란 뜻만이 아니라 ‘악한 상태’,‘사악’이라고 하는 모든 부정적인 상태를 포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환난’은 ‘모든 사악함’ ‘모든 부족함’이라는 단어로도 쓰일 수 있습니다. 야곱이 자신의 삶을 회상하면서 말한 ‘모든 사악함’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질병과 가난과 약함에서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분으로 확대해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6절에 ‘여호와의 사자께서’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여호와의 보냄을 받은 자’ 또는 ‘여호와의 전달자’란 문자적 의미가 있고, 그런 의미에서 천사라고 표현되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사자는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씨름하였던 하나님의 사자를 뜻하는데 이곳에서 야곱이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하였을 때 만난 존재입니다. 창세기 32장 30절에서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의 표현에서 여호와의 사자를 하나님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그가 만난 분이 성육신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의 현현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특별한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었던 야곱은 자신에게 베푸셨던 하나님의 은혜가 요셉과 요셉의 아들들에게도 나타나게 해달라고 기도했던 것입니다. 또한 이는 더 나아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자신이 언약의 후계자인 것과 같이 이들도 언약의 후계자로 모든 사람들에게 인정받게 해 달라는 간구로 볼 수 있습니다. 대를 이어 신앙생활을 하는 모범이 줄어드는 이 시대에 야곱의 복을 비는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는 좋은 기도의 모범이 됩니다.

(17-18) 요셉이 그 아버지가 오른손을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하지 아니하여 아버지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이니 오른손을 그의 머리에 얹으소서 하였으나

요셉이 자신의 눈으로 보여지는 광경을 보고 그의 생각과 다르자 그가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표현한 것을 17절은 기록합니다. 이 표현에 사용된 히브리어는‘근심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는데, 그가 야곱이 엇바꾸어 그의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눈에 근심이 가득했고, 심히 못마땅한 것으로 17절은 표현합니다. 물론, 요셉의 입장에서 큰아들이 아버지의 더 큰 복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은 지극히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묘하신 섭리를 우리의 수준과 시각에서 판단하면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18절에서 요셉은 아주 강한 어조로 야곱이 하려는 축복에 대해서 금지하며 바꾸려는 개입을 시도합니다.

(19) 그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아니하며 이르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의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의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하고

야곱은 그런 요셉의 반응에 한 마디로 즉각 거절을 합니다. 야곱은 에브라임에게 장자권을 주는 것이 전혀 이상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야곱의 행동이 즉흥적이거나, 노쇠한 연령 때문에 생기는 착각으로 인식했을 수도 있지만, 야곱은 본 절에서 자신의 행동이 전혀 이상이 없음을 강력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런 야곱의 예언은 출애굽 후 첫째 인구 조사에서 에브라임 지파와 므낫세 지파가 다른 지파보다 더 많은 인구를 가짐으로써 성취되었습니다. 그리고 에브라임의 복은 북쪽 이스라엘의 중요한 지파가 되어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때 야곱의 예언이 이루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대을 이어 받을 하나님의 은혜(20-22)

(20-22) 그 날에 그들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이스라엘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하기를 하나님이 네게 에브라임 같고 므낫세 같게 하시리라 하며 에브라임을 므낫세보다 앞세웠더라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또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사 너희를 인도하여 너희 조상의 땅으로 돌아가게 하시려니와 내가 네게 네 형제보다 세겜 땅을 더 주었나니 이는 내가 내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니라

20절의 의미는 이스라엘에 사는 누구라도 누군가를 위하여 복을 빌고 번성하도록 하고자 한다면, 야곱이 에브라임과 므낫세에게 한 것 같이 하도록 그들을 축복했습니다. 그 후 21절에는 야곱이 본인의 죽음에 대해서 요셉에게 언급했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한글 성경에서는 생략된 히브리어 ‘보라’ 라는 단어에 대한 해석입니다. ‘나는 죽으나’ 앞에 ‘보라’ 라는 히브리어를 넣어 해석해야 왜 야곱이 자신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1절을 순차적으로 해석해보면 이와 같습니다. ‘주목하여 보라, 나는 죽는다. 그러나 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하실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야곱은 언제나 택한 자와 영원히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를 설명하면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담대하게 자녀들을 축복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22절에서 결론적으로 야곱은 요셉에게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보다 땅을 더 줍니다. 야곱은 세겜을 칼과 활로 아모리 족속들의 손에서 빼앗은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 때까지 창세기에 기록된 것을 보면 야곱은 이곳을 쳐서 정복한 적이 없습니다. 창세기 33장에서 야곱이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이곳에 돈을 지불하고 땅을 산적은 있었지만, 칼과 활로 빼앗은 적은 없습니다. 어떤 주석가들은 22절을 해석해 볼 때, 창세기 34장에서 디나가 부끄러운 일을 당하여 시므온과 레위가 행한 만행사건을 언급했다고 해석합니다. 야곱 본인의 행동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칼과 창으로 그 땅을 차지했다고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또한 다른 의견으로는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일이지만, 원치 않게 싸움에 휘말려서 땅을 빼앗게 되었고 이것은 처음으로 전쟁을 통해 빼앗은 첫 열매이자 전리품이었기 때문에,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요셉에게 주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어떤 의견이 맞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야곱은 이 땅을 요셉에게 선물로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그의 아들들을 축복하기에 앞서 그의 장자권을 상속한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서 특별히 야곱은 요셉의 차자인 에브라임을 장자인 므낫세보다 앞세우고 더 많은 복을 빌어 주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로서 그의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장자였던 에서를 축복하려고 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는 점에서 우리의 시선을 주목시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를 만나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생각과 다르다는 이유로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할 때가 돌이켜보면 종종 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그 부분까지이지,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이 되도록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순종하며 믿음으로 나아가는 과정이 없다면, 언제나 우리는 하나님께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많은 세월을 허비하며 살아갈지도 모릅니다. 마치 오늘 본문의 요셉이 아버지의 손을 밀쳐 주님의 뜻에 따라 흘러갈 복의 흐름을 바꾸기 위하여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아버지의 손을 떼어 자신이 생각한 자녀가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하기 위해 하려했었던 그 무심코 했던 행동처럼 말입니다. 우리의 계산과 생각을 잠시 주님께 내려놓고 언제나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눈을 들어 바라보며 따라가십시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에 주님의 뜻이 실현 되는 복된 하루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사랑하사 언제나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눈 앞에 것을 요구하며 가끔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모이지만, 주님은 대대손손 우리가 주님께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며, 우리의 삶과 죽음을 넘어서까지 그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하나님이심을 오늘 본문을 통해 알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믿으며 살아가는 하루가 되게 하시고, 우리의 머리와 이성으로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의 신실함을 따라가는 복된 하루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야곱의 고백처럼 내가 생각지도 못한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경험했던 적이 있다면 생각해 봅시다.(11절)
2.장자보다 차자를 축복했던 야곱처럼, 나의 이해를 넘어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어 믿음을 경험한 적이 있다면 생각해 봅시다. (14절)
3.나는 혹시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과 반대된다고 생각되어 요셉처럼 그 뜻을 바꾸려고 했던 경험은 없었는지 묵상해 봅시다. (17절)
4.야곱의 죽음을 넘어,한 가문의 미래까지 책임지시는 하나님의 약속처럼, 우리의 인생을 넘어 나의 후대까지 신실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시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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