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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49:22-33

창세기 49:22-33 


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22-26)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모든 아들들에게 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는지 말하며 하나님의 복을 빌어주는 장면입니다. 야곱의 축복이 의미가 있는 지점은 그 축복의 말씀이 아들들의 삶의 현장과 무관한 상태의,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축복이 아니라 아들들이 지금까지 아버지 앞에서 보여준 성품과 삶에 기반한 축복이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을 통해 야곱의 후손들이 현재까지 살아온 삶에 기반하여 축복하게 하셨고, 그 말씀에 부합하도록 그들을 인도하셨습니다.
야곱이 단순히 아버지이기 때문에 좋은 말들로만 축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들들이 그동안 아버지와 하나님 앞에서 보여온 삶을 기반으로 축복의 말씀을 남기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축복 예언이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 후손들에게도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라면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어쩌면 나만의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삶의 수준까지도 결정지을 수 있는 공적인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마지막 라헬의 아들들 요셉과 베냐민에 대한 축복의 말씀과 이후 야곱이 자신의 장례에 대해 유언하고 별세하는 장면까지 나타나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서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알아가보도록 하겠습니다.

야곱은 다른 아들들보다 요셉에 대해서 훨씬 더 많은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지파들은 기껏해야 한 절 혹은 두 절에 불과한데 요셉은 22절부터 26절까지 다섯 절에 이릅니다. 야곱이 이 많은 말들을 하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낸 게 아닙니다. 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축복의 말이 거침없이 쏟아져나올 만큼 요셉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음을 뜻합니다. 이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기원이 하나님이시며, 주권적 섭리에 의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요셉은 하나님과 아버지의 사랑을 충만하게 받았던 아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야곱은 지금 야곱은 하나님을 모신 가장이자 아브라함과 이삭을 잇는 언약 백성을 이끄는 족장으로서 다음 장자 역할을 했던 요셉에게 축복하고 있습니다.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야곱은 요셉을 무성한 가지, 샘 곁의 포도나무, 담을 넘는 무성한 가지에 비유합니다. 하나같이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이미지입니다. 물이 풍요로운 곳에 없으면 나뭇가지가 무성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무성한지 그 가지가 얼마나 무성한지 담을 넘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번성하는 가지는 문자적으로 많은 열매를 맺은 아들을 의미하며, 다산과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요셉도 둘째를 낳고 번성이라는 뜻의 에브라임으로 짓기도 했습니다. 22절은 요셉이 사시사철 물을 공급 받을 수 있는 샘 곁에 있어, 그 가지가 무성하게 자라나 담장 너머로 뻗을 만큼 건강하고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언입니다. 마치 시편 1편에 나오는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많이 맺는 것과 같은 이미지입니다. 구약에서 이런 풍요로움, 특히 물로 인한 풍요로움은 항상 하나님과 연관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사람답게 말씀 붙들고 살았기 때문에 받았던 복입니다.

이러한 요셉의 번성은 대적으로부터 공격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23절에,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요셉이 감내해야 했던 지난날의 어려움을 압축적으로 잘 보여줍니다. 요셉을 공격하는 사람으로부터 학대를 받을 만큼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 “학대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다, 맛이 쓰다, 매우 괴롭게 만들다는 뜻의 마라입니다. 단순히 두 당사자의 갈등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던 요셉을 괴롭게 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권위에 반항하는 것과 같은 의미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요셉이 겪었던 어려움은 요셉 개인의 잘못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행실을 나쁘게 하는 형들과 한 마음으로 뒤섞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 말했다는 것으로 샀던 미움이었습니다. 행실을 나쁘게 했던 형들이 받았던 복들이 바로 앞 49장 전반부에 나오지 않습니까? 누가 더 하나님 앞에서 신앙인다운 삶을 살았는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보면 압니다. 요셉은 또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고 어려움 당했습니다. 대적들이 아무리 공격해도 24절 “요셉의 활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라고 합니다. 대적의 공격에도 요셉은 넘어지지 않고,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활은 더 굳세며 팔에 힘이 있습니다. 요셉이 매사에 기민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손길을 뿌리치며 했던 말, 창세기 39장 9절,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에서 알 수 있듯이 매순간 자신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인간적인 얕은 수를 쓰지 않고, 부화뇌동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을 모색하여 그 길로 행하는 것만이 우리의 활을 굳세게 하며, 팔에 힘이 있게 만드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눈을 들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말씀 따라 행할 때, 그를 모른 척하시지 않습니다. 24절 마지막 말씀대로 “야곱의 전능자, 목자와 이스라엘의 반석의 목자의 손을 힘입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이 요셉과 함께하여 그를 이기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붙들고 살면, 세상이 우리를 어찌하지 못합니다. 감당할 수 없습니다. 요셉처럼 어려움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말씀 붙들고 사는데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을 까닭이 없습니다.

(25-26)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 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먼저 위로 하늘의 복, 아래로 깊은 샘의 복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농사가 하늘에 달렸다고 믿었습니다. 하늘의 복은 적절한 일조량과 더불어 비가 필요할 때 생명의 단비가 내리는 복입니다. 신명기에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른 비와 늦은 비의 복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래로 깊은 샘의 복은 물이 끊이지 않는 복입니다. 사람과 가축이 먹을 물이 풍족한 복입니다.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은 자손의 번성과 관련된 복입니다. 요셉의 자손이 많을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대단한 축복입니다. 이 축복의 근원은 아버지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이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습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감 받아 요셉을 축복합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지켜보고 계시며, 인도하시며, 아버지 야곱을 통해 복을 내려주셨듯이, 오늘 우리도 지켜보고 계시며, 우리의 삶을 재료로 우리 삶에 복을 주시며,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동안 한 줄기 빛조차 들지 않는 차가운 감옥에서 서러운 눈물을 삼켜야만 했던 요셉의 지난날은 외면합니다. 형들의 잘못에 동조하기보다 그 잘못을 폭로하면서까지 미움 당했던 요셉의 용기를 나와 상관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오랜 기간 악과 타협하지 않고, 인내하면서 좌우로 치우치지 않으며, 하나님의 말씀 따르려고 했던 요셉의 지난날의 삶은 간과하고, 기억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 결과로 주어진 요셉의 현재와 그가 받았던 복은 매우 부러워합니다. 요셉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여기까지 왔다면, 동일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나는 오늘을 어떻게 보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오히려 외면했던 사람들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요셉처럼 붙드시려고 했었어도 우리가 그 도우심을 오히려 밀쳐낸 것은 아니었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주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양심을 두드리시는 음성을 외면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애써 고개 돌리려고 했던 적은 없는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자기 욕망 따라 살다가 진창 속에 떨어져 살지 말고, 오히려 우리 눈을 들어 하나님 바라보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의 손 잡고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각 사람의 분량대로(27-33)
요셉 다음으로 마지막 아들 베냐민을 축복합니다. 창세기 기자는 야곱의 축복을 마무리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를 합니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했다고 말합니다. 축복은 자의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이삭이 야곱과 에서에게 했던 축복을 생각해보십시오. 야곱이 많은 복을 받고난 이후에 에서에게 해주었던 축복이 야곱과 같을 수 없었습니다. 이삭은 에서를 장자로 축복하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각 사람의 분량대로 주어집니다. 그러니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과 내가 받은 축복을 비교하면서 시기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바른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야곱의 열두 아들들이 받았던 축복이 그들의 평소 행실과 이어져 있다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가는 하루가 그저 나만의 삶이 아닐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 삶이 자손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식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그런 삶을 살아가기 위해 나부터 변화해야 합니다.

야곱은 이후에 아들들에게 예전에 요셉에게 했던 자신의 장례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시 반복합니다.

(29-32)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 곳에 장사하였노라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야곱이 자신을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하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말, 곧 유언입니다. 헤브론의 막벨라 굴에 장사지내달라는 말입니다. 고대 근동 사람들은 죽을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장례를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다른 곳에서 죽더라도 고향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야곱이 지금 애굽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더라도, 자신을 헤브론에게 장사지내라고 말하는 것은, 이곳이 아무리 좋다고 한들 이 땅에서 계속 머물 것이 아니라 우리는 반드시 가나안 땅으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은 유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렸습니다. 애굽에서 누리는 풍요로움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바라보며 사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남긴 것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죽음으로 살았을 때보다 더 큰 믿음의 메시지를 후손들에게 남겼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헤브론에서 죽었던 사라, 그 사라를 위해 약속의 땅에 매장지를 마련했던 아브라함, 약속의 땅의 범주를 벗어나본 적이 없는 이삭과 리브가에 이어 애굽에 살면서도 그 땅 바라보고 살기를 요청하는 야곱까지, 참 믿음의 사람들이 한결 같습니다.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루하루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조금더 하나님과 가까워져 하나님께 접속된 인생, 그 말씀을 이루는 인생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메시지를 남길 수 있겠습니까? 끝까지 잊지 말아야 할 신앙인으로서의 삶의 지향이 있음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오늘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오늘을 보고 계시며, 아무도 없는 곳에서도 나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오늘 요셉에게 주어진 야곱의 축복의 내용을 통해 우리의 하루가 우리의 미래 뿐만 아니라 우리의 다음세대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수준의 삶을 이루기 위해 날마다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뜻을 따를 수 있는 신앙인으로 살게 해주시옵소서. 말씀 지키며 살다가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시류에 영합하지 않는 용기를 주시고, 하나님의 말씀 의지하여 도리어 우리의 활이 굳세며 우리의 팔에 힘을 주심을 체험하는 은혜를 주시옵소서.
야곱이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죽어서도 그 곳에 묻히기를 유언했던 것처럼 잊지 말아야 할 삶의 지향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요셉은 샘 곁의 무성한 가지(1)로 비유됩니다. 이렇게 샘 곁에 있는 나무가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2. 요셉의 삶에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23절의 내용처럼 요셉이 지난날 당했던 어려움과 그 원인을 살펴보세요.
3. 요셉이 받을 복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며 누구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25)
4. 야곱의 마지막 유언은 무엇입니까? 이 말이 왜 의미 있습니까? 야곱과 비교해볼 때, 나는 무엇을 향해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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