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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50:1-14

 창세기 50:1-14 


찬송가 379장 ‘내 갈 길 멀고 밤은 깊은데’

야곱의 장례_준비(1-3절)

오늘 본문은 야곱의 장례식에 대해서 증거합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은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될 12아들에게 유언적인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내용 중에는 축복은 물론 저주도 있었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가 잘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서 유언과 같은 기도를 드리는데 왜 좋은 내용으로만 하고 싶지 않겠습니까? 복이 되지 않을 만한 내용은 다 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그대로 했던 것은 그것이 단지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기도’만이 아니라 그 기도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자손에게, 우리에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49:33) 야곱이 아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야곱은 자신의 마지막 말을 하고, 147세의 일기로 마지막 숨을 내어 쉬었습니다. 모세는 야곱의 죽음에 대해서 ‘그의 백성(열조_조상)에게로 돌아갔다’라고 표현합니다.

‘죽음’을 다른 말로 정의하면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말에 ‘죽다’의 표현이 열 가지도 넘게 있는데,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돌아가다’입니다.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처음에 출발한 곳이 있어야 합니다. 그곳이 없고서는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입니다.

해외로 여행을 가거나 파견 또는 유학을 떠나게 되면, 그곳에서 짧게는 1-2주에서 길게는 수년을 살게 됩니다.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남은 생애를 보내야 하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한,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그것이 조국으로 돌아가서도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하며 살 것입니다. 해외에 머무는 기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더욱 그러합니다. 1-2달 머물다가 돌아갈 텐데, 그곳에서 자동차를 사고, 대형 TV, 냉장고 등을 산다면 그것은 지혜롭지 못한 일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가 출발했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사람들입니다. 야곱처럼 자기 자녀에게 누워서 할 수 있는 말을 전부 다 하고 돌아갈 수도 있지만, 모세처럼 꿈에 그리던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고,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즉 자신이 정말 원했고, 이루고 싶었던 일을 완성하지 못하고 바통을 넘겨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엘리야 선지자를 회오리바람으로 데려가신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 ‘갑자기’는 예상하지 못한 질병의 증상일 수도 있고, 피할 수 없는 사고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헤롯왕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한 야고보 사도처럼 본인이 인식했던 인식하지 못했든지 간에 다른 사람에 의해서 숨이 끊어져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살다가 어떤 형태로 하나님의 나라로 돌아가게 되는지 간에 그리스도인의 죽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아주 적절하고도 중요한 지침이 되는 말씀이 시편 116:15인데,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라고 증거합니다.

‘귀중한’은 ‘아주 가치가 있는’, ‘빛나는’이란 의미입니다. 우리가 가진 것 중에 값이 많이 나가는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또 그것이 얼마의 가치가 있든지 간에, 그것보다 하나님의 백성의 죽음은 그것보다 더 귀중하고, 가치가 더 나가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죽음과 장례식에서 결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얼마나 많이 깨닫게 되는지 모릅니다. 아무런 깨달음이 없는 결혼식은 있을 수 있어도 깨달음이 없는 장례식은 없기 때문입니다.

 

(1) 요셉이 그의 아버지 얼굴에 구푸려 울며 입맞추고

 

요셉은 아버지 야곱이 마지막 숨을 내어 쉰 것을 확인하고서 아버지의 얼굴에 엎드려 눈물을 쏟았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야곱의 죽음은 호상(好喪) 중에서도 호상이었습니다. 야곱은 할아버지나 아버지에 비하면 적게 살았지만, 아들 요셉에 비하면 37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요셉은 110세를 살았지만, 야곱은 147세나 살았습니다. 그가 표현한 대로 그의 인생은 ‘험악한 세월’이었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22년 동안 죽은 줄로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있었고, 더구나 당시 최강대국 중의 하나인 애굽의 총리가 되어있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아들이 높은 자리에 올랐다는 의미가 아니었습니다. 총리 아들을 만남에 따라 긴 기근의 세월을 이길 수 있었고, 수백 년 후에 있게 될 출애굽의 역사를 시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야곱은 그의 평생을 통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깊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2아들을 축복하면서 요셉에게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아브라함, 이삭)의 축복보다 더 낫다”라고 자신 있게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더 나은 삶을 살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형편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총이 더욱 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아무리 연세가 높아서 세상을 떠난다고 할지라도 떠나보내는 자식에게는 ‘이제 나에게 뿌리와 같았던 아버지 또는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다’라는 상실감이 찾아오기 때문에 마음이 힘듭니다. 그래서 요셉은 하염없는 눈물을 흘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우는 것으로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궁극적인 차이 중의 하나는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불신자에게 죽음은 모든 것의 끝이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세계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아버지에게 입을(굿바이 키스를) 맞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데려가셨기 때문에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아버지를 천국으로 환송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의 죽음을 보게 되더라도 ‘울다’와 ‘입 맞추다’를 잘해야 합니다.

 

(2-3) 그 수종 드는 의원에게 명하여 아버지의 몸을 향으로 처리하게 하매 의원이 이스라엘에게 그대로 하되 사십 일이 걸렸으니 향으로 처리하는 데는 이 날수가 걸림이며 애굽 사람들은 칠십 일 동안 그를 위하여 곡하였더라

 

요셉은 아버지의 시신을 미라(mummy)로 만들게 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은 시신을 미라로 만들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먼 미래에 그 생명이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아주 부유한 사람들만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애굽의 바로왕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를 위해서 72일 동안 애곡하는 기간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런데 야곱을 위해서는 70일 동안 애곡을 했습니다. 야곱의 장례식은 애굽의 국가장(國家葬)에 준하는 것이었습니다.

애굽사람은 요셉이 아버지의 시신을 미라로 만든 것은 애굽의 장례법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시신을 가나안의 막벨라 굴에 안장하려면 시신 그대로 운구해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야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듦으로 애굽의 장례법도 존중하고, 시신도 온전히 보존함으로 아버지의 유언도 지키는 일거양득(一擧兩得)과 같았습니다.

 

 

야곱의 장례_가나안으로 운구(4-9절)

곡하는 기간이 끝나자 요셉은 바로왕에게 장례를 위한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4-6) 곡하는 기한이 지나매 요셉이 바로의 궁에 말하여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원하건대 바로의 귀에 아뢰기를 우리 아버지가 나로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내가 죽거든 가나안 땅에 내가 파 놓은 묘실에 나를 장사하라 하였나니 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소서 내가 다시 오리이다 하라 하였더니 바로가 이르되 그가 네게 시킨 맹세대로 올라가서 네 아버지를 장사하라

 

요셉은 바로왕에게 직접 나아가지 아니하고 대리인을 보내어서 장례 휴가를 요청했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장례가 치러지는 70일 동안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집니다. 애굽 사람은 평소에는 수염을 짧게 깎아야 했지만, 상중(喪中)에는 그 표시로 수염을 기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인과 고대 중동에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들은 상중에는 애통의 표시로 머리와 수염을 깎았습니다. 요셉은 히브리사람이었지만 애굽의 문화도 존중했던 것입니다. 애굽 민족과 히브리 민족의 문화가 다른 것처럼, 모든 국가의 문화는 다 다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같은 나라 안에서도 각 지방의 문화도 다르고, 개인의 문화도 다릅니다. 나와 다른 사람이 다르다고 인정하는 것이 지혜이고 성숙입니다. 다름은 다름이고 틀림은 틀림입니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다양성을 인정할 줄 알수록 더 넓고 더 깊은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요셉은 바로왕의 허락을 받고서 바로 장례식을 시작했습니다.

(7-9) 요셉이 자기 아버지를 장사하러 올라가니 바로의 모든 신하와 바로 궁의 원로들과 애굽 땅의 모든 원로와 요셉의 온 집과 그의 형제들과 그의 아버지의 집이 그와 함께 올라가고 그들의 어린 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만 고센 땅에 남겼으며 병거와 기병이 요셉을 따라 올라가니 그 떼가 심히 컸더라

 

‘정승 부인(또는 정승집 말 또는 개)이 죽으면 조문객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오지 않는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정승 부인이 죽으면 밥을 먹다가도 뛰어나가고, 정승이 죽으면 밥을 다 먹고 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정말 많은 사람이 동원되었습니다. ‘바로의 신하 모두’, ‘바로의 궁의 원로들’, ‘애굽 온 나라에 있는 원로’, ‘요셉의 온 집안과 그 형제들’, ‘아버지의 집안사람들’이 동원되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병거와 기병, 지금으로 하면 탱크부대와 같은 특수부대까지 동원되었습니다. 남은 것이라고는 어린아이들과 양 떼와 소 떼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모두 다 올라갔다는 것의 강조적인 표현입니다. 즉 야곱의 집안에 남은 사람이라고는 어린아이들밖에 없다는 것은 그만큼 많은 사람이 장례식에 참석했다는 의미입니다. 야곱의 장례식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는 것은 요셉이 누리고 있는 지위와 그동안의 그의 치적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흔히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의 자녀로 태어나 누구의 부모로 죽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세상적인 기준입니다. 야곱의 장례가 부러운 것은 아들이 애굽의 총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집안이 신앙의 가문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신앙이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참 부럽습니다.

 

 

야곱의 장례_막벨라굴에 안장(10~14절)

 

(10-11) 그들이 요단 강 건너편 아닷 타작 마당에 이르러 거기서 크게 울고 애통하며 요셉이 아버지를 위하여 칠 일 동안 애곡하였더니 그 땅 거민 가나안 백성들이 아닷 마당의 애통을 보고 이르되 이는 애굽 사람의 큰 애통이라 하였으므로 그 땅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 하였으니 곧 요단 강 건너편이더라

 

야곱의 장례 행렬이 요단강 건너편 아닷(가시나무)이라는 곳에 이르자 거기서 일주일 동안 다시 애곡을 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 야곱의 장례를 애굽에서는 애굽식으로 치르고, 가나안 땅에서는 다시 가나안식으로 치른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 장례식에서 요셉과 그 가족들이 심하게 통곡하는 것을 보고, 아닷 지방 사람들이 그곳의 이름을 ‘아벨미스라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벨미스라임’은 성경 아래쪽 각주에 쓰여있는 것과 같이 ‘애굽인의 (통)곡함’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장례식에서 의아한 것은 요셉은 고센에서 막벨라 굴이 있는 헤브론까지 최단 거리인 지중해 연안을 따라서 올라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시내 반도를 가로질러서 가데스바네아를 거친 후, 염해(사해)를 돌아서 올라갔습니다. 왜 그렇게 먼 거리를 돌아서 갔는지 이유를 성경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후에 이스라엘 자손이 출애굽 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까운 길로 인도하지 않으시고 돌아서 가도록 하신 것은 블레셋 사람과 전쟁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들어 애굽으로 되돌아가려고 할 것이라,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출 13:17). 이때도 블레셋 지역에 사는 사람들과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 그러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그렇게 돌아간 길이 나중에 출애굽의 길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400년 후에 있게 될 출애굽의 길을 미리 보여주신 것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도 동일하게 고백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일을 맡기실 때, 그 일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법으로 훈련하신 후에 일을 맡기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곤 하지 않습니까?

 

(12-14)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요셉이 아버지를 장사한 후에 자기 형제와 호상꾼과 함께 애굽으로 돌아왔더라

 

야곱은 요셉에게, 그리고 12아들에게 간곡하게 그리고 아주 강하게 자신을 애굽에 매장하지 말고, 헤브론에 있는 막벨라 굴에 매장하기를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그것은 단지 수구초심(首丘初心) 때문이거나 가족묘에 묻히고 싶은 것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이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그것은 그의 자손도 언젠가는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인생을 사자성어로 표현하면, ‘파란만장(波瀾萬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147년의 인생을 통해서, 자기의 야망과 자신의 욕망을 바라보는 삶에서 눈을 들어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자신의 인생을 움켜쥐는 삶에서, 자신의 인생이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에 쥐여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족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도 그 하나님을 향해 눈을 들고,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십시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야곱의 마지막, 장례식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삶도 이 땅에서 끝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형태로 우리의 마지막 숨을 내어 쉬든지 간에 그 순간까지 하나님 앞에 신실하게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나니 우리의 마지막의 모습이 우리 평생에 가장 신앙적인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우리의 삶이 어떻게 펼쳐지든지 눈을 들어 하나님의 바라보게 하시고, 만물보다 큰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이 진리의 씨줄과 생명의 날줄이 교직(交織)되어 하나님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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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을 돕는 질문
1. 야곱은 믿음으로 자신의 마지막 숨을 내어 쉬었고, 요셉은 아버지를 믿음으로 떠나보내었습니다. 당신의 마지막에 가족에게 마지막으로 어떤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2. 요셉은 아버지의 장례를 애굽의 법도와 가나안(믿음)의 법도를 따라서 행했습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 믿음을 따라야 할 부분은 무엇입니까?
3. 요셉은 아버지의 유언대로 아버지를 막벨라 굴에 매장했습니다. 당신이 이 땅에서 마지막 숨을 내어 쉬기 전에 가족들에게 남길 믿음의 유산은 무엇입니까?
4.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의 손안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무엇을 정리하고,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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