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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창세기(새벽)

창세기 50장 15-26절

 창세기 50장 15-26절 

 

찬송가 251장 ‘놀랍다 주님의 큰 은혜’



야곱의 죽음 이후 재차 용서를 구하는 형들 (15-18절)


어제 살펴본 바와 같이 야곱은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치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진행 된 야곱의 장례식 이후, 요셉의 형들은 다시금 요셉의 복수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이들이 다시 요셉을 두려워 한 이유는 야곱의 성대한 장례식을 통해 애굽 안에서의 요셉의 권력과 영향력을 다시금 확인하였기 때문입니다.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요셉의 형들의 이 두려움은 인간적인 두려움입니다. 요셉이 자신의 동생이었을 때에는 요셉에게 큰 힘이 없어 그를 함부로 하였으나, 이제는 총리 요셉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하지 않게 형들이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점을 놓고 보았을 때 요셉의 형들은 세상적인 힘과 권력은 크게 두려워하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업신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간 자신들을 향한 요셉의 너그러운 행동을 이 형들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큰 회개를 하여도 한순간에 완벽한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하지 않습니다. 형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회개하고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기회를 가졌으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신앙의 성숙도가 아직 부족하여, 요셉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야곱에 대한 존경의 마음으로 형들에 대한 복수를 자제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특별히 15절 마지막인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라는 표현은 보통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대변하는 표현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요셉에게 저지른 악을 요셉이 아직 다 갚지 않았기에, 요셉의 용서와 섬김을 거짓된 것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상호거래’라는 개념에 익숙하여 사랑과 용서, 섬김과 배려라는 가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무언가를 주고받는 ‘거래의 개념’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본성입니다. 


(16-17)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형들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이들은 요셉에게 직접가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을 보내어 야곱을 핑계 삼아 용서와 화해의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그 메시지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자신들을 용서하라는 요청이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이 요셉의 형들에게 참으로 이러한 말을 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는 크게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 형들이 아직도, 이미 이루어진 ‘요셉의 용서’를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이러한 형들의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울었습니다. 자신은 분명 여러 차례 확실한 말과 약속을 하며 형들을 용서를 했는데, 이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용서를 받았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불안해하는 상황이 안타까웠던 것이었습니다.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자신들이 보낸 메시지에 요셉이 눈물을 흘렸다는 말을 전해들은 후 조심스럽게 요셉 앞으로 나올 용기가 생긴 형들은 납작 엎드려, 자신들은 요셉의 종이라고 외쳤습니다. 요셉의 형들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우리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에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믿음이 필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남김없이 용서하여 주셨다는 사실 역시 하나님을 향한 큰 믿음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과거 요셉이 야곱과 형들의 모든 가족들을 애굽으로 불러오면서 한 말과 행동, 그리고 약속들 모두가 요셉이 용서를 하였다는 증거가 되었듯이, 예수님의 탄생과 공생애 기간, 십자가와 부활, 승천과 같은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무게 앞에 불안하고 힘들 때 마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용서와 구원에 대한 증거들을 다시금 찾고, 의지하며, 눈을 들어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의 말씀을 붙드는 믿음의 일을 해야합니다. 이에 대해 로마서 5장 8절은 다음과 같이 증거합니다.


(로마서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우리는 다양한 의심과 질문들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앞에 설명한 ‘세상적인 거래’와는 다른 계산법입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요셉의 용서가 또 하나님의 용서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군가 총리인 요셉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총리님, 저 사람들을 왜 용서해 주십니까?’ ‘그래도 과거의 잘못을 조금은 갚아 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주변의 질문 속에서도 요셉이 ‘괜찮다.’라고 선언하면 더 이상 이 용서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이러한 공식은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에 대하여, 더 큰 은혜로 다 갚아 주셨다고 선언하면 이 용서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죗값을 예수님의 죽음으로 대신 치르게 하시고, 우리를 용서해 주시겠다고 하시면 그 누구도 항변할 자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면 하나님과 함께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고, 이를 못 믿으면, 계속해서 죄의 어두움에 갇혀, 부들부들 떨며, 불안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형들에 대한 용서와 사랑을 거듭 약속함 (19-21절)



이어지는 19-21절까지의 내용은 아직도 두려워하는 형들을 향한 요셉의 용서와 사랑의 내용입니다. 먼저 19절입니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요셉의 형들이 가지고 있는 두려움의 감정을 파악하여 다시금 분명한 어조로 말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들이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요셉 자신은 직접 형들의 지난날에 대해 책임을 물을 마음이 없다는 표현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재판장이심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고 이에 합당하게 이 땅의 모든 일들을 치리하신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진정으로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선택과 행동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하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매일 눈을 들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요셉은 지금 자신의 삶의 과정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흐름 속에 있기 때문에 오늘의 나의 선택을 하나님을 떠나 함부로 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다시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에 대해 ‘나는 하나님께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고백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이어지는 요셉의 두 번째 표현은 20절입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요셉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자신이 함부로 인생의 선택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함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백성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다.’ 요셉의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삶에 중심에 확실하게 자리를 자고 있을 때, 우리는 우리의 인생의 다양한 결정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따라가는 사람들에게 벌어지는 모든 일을 결국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은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자신을 낭떠러지 아래로 밀어 떨어뜨리려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당당히 성부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들에게 떠밀리지 않으시고, 뒤돌아 그들 사이를 지나올 수 있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모범을 통해 우리는 우리를 영원히 붙들어 주시는 분은 오직 우리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믿음이 있으면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이 땅의 여러 일들에 담대하게 맞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때때로 크고 작은 일들이, 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관계가 더 나아가 세속적인 가치관의 물결이 우리를 낭떠러지 아내로 밀쳐 떨어뜨리려고 할지라도, 신자들을 붙드시고, 세상의 일을 선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세상의 사람들과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손은 만물보다 크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손은 영원한 생명의 손이기 때문입니다. 21절입니다.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여기서 요셉이 자신의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기르리이다’라는 단어는 요셉이 이들의 생활을 책임져주겠다는 의미와 함께 이들을 ‘보호’하며, ‘받들어 섬기겠다’는 의미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사랑은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때, 하나님께서 그냥 적당히 용서해주시고, 그 뒤로는 계속 하나님의 눈칫밥을 먹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그런 치사한 용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는 과거 우리의 죄를 완전히 깨끗하게 해주시는 용서, 완전한 사랑의 하나님 되시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사야 1장 18절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1:1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하나님께서는 죄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나와서 나랑 이야기하자고 말씀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과 함께 이야기하시며, ‘내 용서는 완벽한 용서이다, 내 사랑은 완벽한 사랑이다’라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확인시켜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이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요셉의 마음이었습니다. 요셉이 자신이 한 약속대로 요셉의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까지 잘 지키고, 잘 섬겨주었다는 사실은 이어지는 22-23절에 나타납니다.


요셉의 죽음과 약속의 성취 (22-26절)

(22-23) 요셉이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주하여 백십 세를 살며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요셉이 자신의 형들에게 한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주었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들을 향해 하신 약속, ‘영원한 생명’이라는 약속을 반드시 지켜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큰 은혜를 받은 요셉이 많은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였고, 애굽이라는 나라의 총리까지 오르게 되었으나 그도 결국 죽을 수  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러하였듯, 이삭이 그러하였듯, 자신의 아버지 야곱이 그러하였듯,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던 요셉은 하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마음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이 마지막 24-26절입니다.


(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요셉은 자신이 아무리 애굽에서 총리라는 직을 가지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가나안 땅이 아니고 결국 타국 땅인 애굽에서 죽는다는 것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요셉이 진정으로 사모하는 본향은 오직 믿음의 선조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자신의 자손들에게 훗날 자신의 해골이라도 메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올라가 달라고 자신의 가족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기 14절에서 재미있는 표현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보시고, 애굽 땅에서 다시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신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이러한 점을 보았을 때 요셉은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이라도 결코 없어지지 않고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굳게 믿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요셉의 이러한 믿음은 여호수아 24장 32절에서 결국 현실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 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이곳은 야곱이 백 크시타를 주고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자손들에게서 산 밭이라 그것이 요셉 자손의 기업이 되었더라

요셉의 바램과 그 후손들을 통해 이루어진 일들을 통해 확인되는 바, 이스라엘의 출애굽 사건과 가나안 정복 사건은 결국 ‘애굽’과 같은 ‘죽음의 자리’에서 꺼내어, ‘가나안’과 같은 ‘천국’으로 자신의 백성들을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담겨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이들 한 명, 한 명을 끝까지 기억하시어 이들을 반드시 구원시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요셉은 예언과 같은 자신의 마지막 말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자손들을 돌보시고 이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실 것’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을 기억하시어 출애굽기의 시작을 알리는 시점에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출애굽기 2:25)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셨더라


긴 시간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동일한 선언으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요셉의 예언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들을 돌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기도의 자리에서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을 기억하시고, 은혜로 돌보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필요와 연약함을 기억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신앙이 되어야 함을 깨닫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기억하시고 돌보시기에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모든 것을 

결국 선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이심을 믿고 신뢰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 붙들려 있으므로, 세상은 우리를 절벽으로 몰아세워도,

믿음과 담대함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신자의 삶 살게 해 주옵소서. 

그 결과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약속의 땅에서 영원한 생명과 안식을 누리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가 총리 요셉이라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을까요?

2. 하나님의 사랑으로 누군가를 용서해 본 기억이 있다면 이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보세요. 

3. 살면서 만나게 되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는 선으로 바꿔주신다는 것을 믿으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4. 오늘 하나님께서 나의 어느 부분을 기억해주시고, 나의 어느 부분을 돌봐주시기를 원하고 계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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