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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누가복음(새벽)

누가복음 11:1-13

누가복음 11:1-13
찬송가 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기다렸다는 듯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부터 기도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하루 세 번 정한 시간에 기도하였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의 왕 외에 어떤 신에게든지 기도하는 사람은 사형시킬 것이라는 새로운 법안이 통과된 것을 알고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제자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세례 요한은 예수님 보다 시기적으로 앞서 사역했습니다. 그는 구약성경에 예고된 대로 예수님의 길을 준비했던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요한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제자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 같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요한의 것과 분명한 차별성을 띄고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모든 종교에서 발견 됩니다. 기도를 드리는 겉모습만 보고서는 신앙의 내용이나 수준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기도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신앙의 내용과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우리의 기도는 어느 종교에서나 발견되는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깨닫게 된 사람은 기도가 변하게 됩니다.

주님의기도(2-4)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시며 ‘아버지여’라고 시작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본문이 있지만, 실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일은 결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했던 카디쉬(Kaddish) 기도의 첫 시작입니다. ‘그분의 이름이 높여지고 거룩히 여겨지이다.’ 또 하나의 대표적인 기도인 18번 축복 기도(Tepillah, Shemone Esre)는 ‘주님,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전능하시고 무서우신 하나님.’이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심으로써 하나님과 근본 본체이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이것은 기독론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시는 것과 같이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게 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예수님은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새롭게 창조하셔서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삼아 주셨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능력이 있는 것은 기도를 드리는 우리의 태도나 정성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새로워진 우리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이 땅의 많은 사람들 중에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주어진 특권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든 하나님과 대화를 나누고 무언가를 요청하고 상담하고 그분의 뜻을 구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우리의 아버지이시며 동시에 거룩한 분이십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거룩하다.’는 표현은 윤리적 개념이 아니라 물리적 개념입니다. 즉, 하나님은 단순히 죄가 없으신 분, 거짓말을 하지 않으시는 분과 같은 의미가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와 구별되는 초월적인 분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 가능합니다.

(겔36:23)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더럽혀진 이름 곧 너희가 그들 가운데에서 더럽힌 나의 큰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할지라 내가 그들의 눈 앞에서 너희로 말미암아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리니 내가 여호와인 줄을 여러 나라 사람이 알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에스겔 선지자가 활동했던 시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은 변함이 없으셨지만, 세상과 구별된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내야 할 사람들이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더럽혀졌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요청하십니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기도를 통해 세상 사람들과 섞여 살지만,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임을 되새기며 오늘 하루도 하나님의 자녀다운, 하나님의 백성다운 삶을 결단하며 기도합니다. 우리는 아직 해결하지 못한 옛 습관들과 다듬어지지 않은 성품을 기도 제목으로 삼지만,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써 살기를 결단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존재로 살아가면 윤리적인 삶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 되십니다. 피조 세계를 초월해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 삶의 현장에 찾아오시고 도우신다는 사실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우리의 삶을 도우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삶 보다 크신 분이어야 합니다. 또한 우리의 삶을 도우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우리 삶에 찾아오시는 분이어야 합니다. 기도를 듣는 대상이 이슬람교의 알라와 같이 초월성만 가지고 있다면 인간의 기도는 일방적이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슬람교로 대표되는 초월적인 신관의 종교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인격적인 ‘대화’이기 보다는 일방적인 ‘간청’이며 도무지 좁혀지지 않는 본질적인 신과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반면에 힌두교로 대표되는 내재적 신관의 종교에서 드려지는 기도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내면의 힘을 길러 도무지 건널 수 없는 강을 초월하기 위해 날마다 몸부림치며 노력하는 행위의 반복입니다. 초월성과 내재성이 함께 있어야 구원이 가능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로운 신분으로 이끄셨고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기도들이 도무지 흉내 낼 수 없는 능력 있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능력은 세상의 권력이나 경제력이나 명예와 같은 것들이 아니라 위로부터 아래로 임하는 능력입니다.

(2b)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기를 청원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며 그 절대주권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기도로 이끄는 문제 상황들을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께서 움직여 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문제 상황들을 하나님의 방법과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맡겨 드리는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우리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보다는 하나님의 뜻에 철저히 깨어지고 굴복하는 과정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마주한 문제 상황은 기도의 출발점은 될 수 있지만 기도의 종착역에서는 문제 상황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마주하게 됩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밤이 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핏방울처럼 되기까지 주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굴복시키셨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도 제목들은 하나님께 요청할 소원 목록(wish list)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이 회복되어야 할 영역들입니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평범해 보이는 일상조차 철저히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건강도 우리가 주인 노릇 할 수 없으며 우리의 가정과 기업도 우리가 주인 노릇 할 수 없습니다. 온 세계의 과학 기술을 합쳐도 인간의 뜻대로 불행을 예방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주님은 우리에게 눈물도 질병도 없는 죽음 너머에 있는 천국만 바라며 기도하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임하게 되는지 질문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는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1b)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이 주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받으면,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두 발을 땅에 뿌리 내리고 살아가지만 실상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사람들이기에 주님은 우리로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셨습니다.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일용할’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오늘 먹을 양식’ 또는 ‘내일 먹을 양식’으로 번역할 수도 있으며 ‘생존에 필요한 만큼의 적당한 양식’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어느 번역을 따르든지 그 의미는 결코 이 땅에서 넘치는 물질이나 양식을 구하는 것이기보다는 매일의 생존과 생활을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고자 하는 태도입니다. 이는 단순히 검소하게 살라는 조언이 아닙니다. 돈이 나의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돈만 있으면 안정적이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유혹하는 맘모니즘(Mammonism)을 배격하는 영적 전쟁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의식주의 노예로 살지 않기 위해서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으로 곧장 이끄시지 않고 광야에서 매일의 만나로 훈련 시키셨습니다. 우리는 많은 양의 재물을 위해 기도드린 후에 넉넉한 소유가 보장하는 안정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이 아닌 안정된 주님과의 관계를 통해 진정한 샬롬을 추구하는 새로운 삶으로 초대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소유의 넉넉함에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 있습니다.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었던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것은 단 하나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입니다. 이후로 아담의 후예들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늘 결핍의 문제를 겪고 있습니다. 아담적 결핍의 원인은 만족을 모르는 내면적 부족함이나 생존에 필요한 물질의 부족함, 승자 독식 구조의 사회 구조적인 한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린 영적 문제입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기도는 소유(所有)를 위한 기도가 아닌 존재(存在)를 결단하는 기도입니다.

또한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자신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다른 사람의 필요에 관심을 갖고 자신에게 맡겨진 넉넉함을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로 흘려보내고자 하는 청지기적 태도와 공동체 의식을 일깨워 줍니다. 하나님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사람은 매일의 삶을 돌보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피조 세계는 돌보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써 책임과 의무를 갖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일용할 양식을 전달하고 흘려보내는 삶이 요청됩니다. 그렇기에 주님의기도는 전반부에 하나님 나라를 청원하는 부분 이후부터 ‘우리에게’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안에 가난한 사람이 없었다는 놀라운 기록은 일용할 양식을 이 땅에 전달하시는 하나님의 독특한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행 4:34-35)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아담적 욕망으로 이전에 보지 못했던 다른 사람의 필요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필요를 따라 나누어 주었고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초대 교회 안에 구현되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의 세계를 기계 장치를 통해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구현해 내는 것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그리스도인들을 통해 이 땅에 생생하게 구현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자녀가 된 것은 전적인 주님의 은혜입니다. 이제 우리는 용서 받은 사람으로써 용서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합니다.

(4a)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용서하오니’라는 표현은 조건의 의미이기 보다는 결단의 의미입니다. 헬라어 원문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표현이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보다 선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는 근거는 결코 우리의 선행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행위로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죄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해결 받았습니다. 우리는 일용할 양식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일용할 용서와 사랑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서 양식만 나누는 것이 아니라 용서와 사랑도 나누는 삶을 결단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우리에게 임했지만 아직 완전하게 우리가 누리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해야합니다.

(4b)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시험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시험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해 아브라함의 믿음을 견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시험을 통해 예수님을 넘어뜨리려 하였습니다. 마태복음에 기록된 주님의기도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시옵고‘ 뒤에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표현을 덧붙여 ’시험‘의 의미가 그리스도인들을 넘어뜨리려는 사탄적인 것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시험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를 시험하기 위해 틈을 찾고 있습니다. 주님의기도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름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결단하는 존재론적 기도입니다. 우리는 매일 영적 전쟁 가운데 살아가고 있으며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목적한 바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은 주님의기도를 산상수훈 가운데 배치함으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핵심이 주님의기도에 담겨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반면에 누가복음은 주님의기도 이후에 실제로 기도하는 삶을 살 것을 강력히 권고하는 비유와 권면을 기록함으로 기도를 이론으로 배우는데 그치지 않고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권고하는 비유(5-8)
(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고대 근동의 환대법은 여행객이 도움을 요청할 경우 의무적으로 여행객을 대접하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비유 속에 집 주인은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즉각적으로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도움이 간절했던 여행객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간청했습니다. 마침내 집 주인의 문이 열렸습니다. 집 주인은 여행객이 친구이기 때문에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간절한 요청 때문에 도움을 주노라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비유를 주신 이후에 동일한 강조점을 담은 권면을 주셨습니다.

기도를 권면하심(9-13)
(9-1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은 앞선 비유와 마찬가지로 ’너희 중에 누가‘라는 표현을 통해 ’우리 중에는 아무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상식에 반하는 내용을 통해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는 삶을 살도록 강력하게 권면하십니다. 우리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채우시는 것이 상식적임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실제 삶의 자리에서 기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보다는 여전히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삶을 채우는 방식을 선택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우리 삶을 채우기 위해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해야 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삶을 채워주시는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초대받았습니다. 성령님은 땅으로 향한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로 옮길 수 있도록 도우시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적용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케 하고 우리의 이기심으로 출발하는 기도가 결국에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성령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아시고 우리의 필요를 위해 간구하실 뿐 아니라 기도를 도우십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오늘 하루도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삼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지 못해 세상이 하나님을 오해 하게 만들었음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이제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길 원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길 원합니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위에 것을 구하게 하시고 주님의 선한 청지기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오늘 하루도 은혜로 사는 줄 알고 용서하며 사랑하게 해주십시오. 세상의 유혹과 시험에 깨어있게 하시고 하루를 살아도 영원한 나라를 구하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아버지여‘라는 호칭이 기도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가 마주한 모든 문제 상황들을 도우실 힘이 있으실 뿐 아니라 찾아와 주신다는 사실이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3.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주는 유익은 무엇입니까?
4. 오늘 하루도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5. 주님의기도를 실제 나의 기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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