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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1:1-10

본문 갈라디아서 1:1-10
찬송가 149장 ‘주 달려 죽은 십자가’



문안 인사(1-5절)
구약성경에는 선지서가 17권이 있는데, 그것을 분량에 따라서 대선지서 5권(이사야, 예레미야, 애가, 에스겔, 다니엘)과 소선지서 12권(호세아-말라기)으로 나눕니다. 신약성경에는 바울서신이 13권이 있는데, 그중에서 분량이 많은 4권,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를 ‘대서신’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16장이고, 고린도전서도 16장, 고린도후서는 13장이지만, 갈라디아서는 6장에 불과합니다. 그런데도 갈라디아서를 대서신으로 분류하는 것은 그 내용의 중요성에 있습니다.
독일의 신약 성서학자인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sen)은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기독교 신앙의 대헌장_Magna Carta’라고 말했습니다. 또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나의 서신이다. 나는 사실상 갈라디아서와 결혼하였다. 갈라디아서는 나의 폰 보라(von Bora)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폰 보라는 루터의 부인입니다. 그만큼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사랑했고, 갈라디아서를 곁에 두고 연구했습니다. 그래서 분량으로는 갈라디아서가 로마서의 절반이 되지 않지만, 루터는 갈라디아서의 주석을 쓰면서 로마서 분량의 2배를 썼습니다.

갈라디아서에는 별명이 몇 가지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선언문’이라 하기도 하고, ‘율법주의에 보내는 선전포고문’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또 복음의 내용을 잘 정리한 ‘로마서’와 닮았다고 해서 ‘작은 로마서’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의 분위기는 사뭇 대조적입니다. 로마서가 침착한 어조라면 갈라디아서는 전투적인 어조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로마서가 책상에 앉아서 기록을 했다면 갈라디아서는 삶의 현장에서 기록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이 세상을 구원할 참 구세주가 누구인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에 관해 토론하는 모임에서 패널로 참석했다고 가정해 보십시다. 그런데 거기에 나온 사람들이 구세주의 이름으로 이단 교주를 들먹인다든지, 자신의 노력만으로도 구원받을 수 있다든지라는 주장을 듣게 되면, “그럴 수도 있지”하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시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현장에 서 있다고 생각하면서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그 내용이 더욱 또렷하게 들어올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갈라디아서를 씀으로 율법주의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켰고, 루터가 갈라디아서를 깊이 연구함으로 종교개혁의 선두에 서게 했고, 기독교를 새롭게 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모두 6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16장으로 된 로마서가 1-11장까지는 교리(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대한 것이고, 12-16장까지가 실천(어떻게 살 것인가)으로 나누어지듯이, 갈라디아서도 1-4장이 교리(무엇을 믿을 것인가)에 관한 것이고, 5-6장이 실천(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 본문인 1-10절도 두 부분으로 나누면, 1-5절은 문안 인사이고, 6-10절은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이유입니다.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갈라디아서는 바울 서신 중에서 거의 가장 초기에 쓰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에 속하지 않았음은 물론,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보내시는 동안에 예수님을 따르며 말씀을 들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에 대해 살기가 등등하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240km나 떨어진 다메섹에 가서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잡아들이기 위해서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아서 가고 있을 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인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렇게 주님을 뵈었고, 주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고린도후서를 나눌 때도 살폈지만, 고린도 교회가 한때 바울을 거부했던 것은, 그가 진정한 사도가 맞는가 하는 사도권의 진위 때문이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도 심각하게 대두된 것 역시 바울의 사도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사람으로부터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내실 때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던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 편에서 바울은 자신의 출발점을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또렷하게 전해줍니다. 사도바울의 출발점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자신은 주님과 원수 된 관계에 있었고, 율법과 자기에 대한 열심을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는데,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 그 감격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고, 인정해 주지 않아도 묵묵히 사도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 은총을 평생 잊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순교를 앞두고 마지막으로 쓴 편지가 디모데전·후서입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딤전 1:13-15)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바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이 과거에 어떤 존재였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에서, ‘괴수(魁首)’의 사전적인 의미는 ‘못된 짓을 하는 무리의 우두머리’인데, 여기서는 그런 뜻이 아니라 ‘1번’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을 죄가 많은 순서대로 한 줄로 세운다면 자신이 1번, 가장 앞에 서 있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믿음의 출발을 기억하는 것은 자신의 믿음을 성장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자양분이 되고, 척도가 됩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믿음의 출발점을 잊어버린다면, 우리는 라오디게아 교회가 들어야 했던 책망,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는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우리나라 지명으로 전주, 여수, 김천, 통영 등은 도시 이름이고, 이들이 있는 전라도, 경상도는 도 이름입니다. 성경으로도 고린도, 아덴(아테네), 빌립보, 에베소, 밀레도 등은 도시 이름이고, 아가야, 마게도냐, 아시아 등은 지역(도, 道) 이름입니다. 물론 로마제국 내에서입니다. 사도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인데, ‘길리기아’는 지역(도) 이름이고, ‘다소’는 도시 이름입니다.
‘갈라디아’는 지금은 터키 중부 지방을 이르는 말입니다. 이곳은 바울이 1, 2, 3차 전도 행을 하면서 모두 이곳을 들렸습니다. 이곳의 남쪽에 있는 도시가 비시디아 안디옥(Pisidian Antioch), 이고니온(Iconium), 루스드라(Lystra), 더베(Derbe) 등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는 이런 도시에 있는 교회들이 돌려서 읽도록 보내진 서신이라는 의미입니다.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사도바울은 여러 지역의 교회에 편지를 보낼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로 인사합니다. 이것은 표면적으로는 인사말이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가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라면, ‘평강’은 우리 신앙의 종착점과도 같습니다.
만약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없었더라면 갈라디아서는 기록되지 않았을 것이고, 아니 사도바울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심도 없었을 것이고, 구약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시는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은혜’는 값없이 받는 것, 자격이 없음에도 받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것과 함께 은혜는 ‘하나님의 떨어지지 않는 사랑’, ‘하나님의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평화’를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 하는 평화’를 누리는 삶을 이어갑니다.

(4-5)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우리를 죄에서 건지시기 위해서 속죄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송영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400년간 노예살이를 하다가 해방되어 가나안 땅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되기 위해서 자유의 전쟁을 벌였던 것도 아니었고, 몸값을 지불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서 홍해를 열어주셨고, 광야에서는 만나를 먹게 해 주셨으며, 40년 동안 옷이 해어지지 않았고, 발이 부르트지도 않았습니다. 전부 하나님께서 거저 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원수 된 된 관계에 있었고, 죄와 허물로 죽었던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한 것은 무엇입니까? 아무것도 없습니다.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화목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영원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려고 하고, 진리를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것은 우리가 받은 영원한 생명에 걸맞게 살기 위함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쓰는 이유(6-10절)
그럼에도 갈라디아 교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고 부인하는 사람들, 율법주의를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습니다. ‘율법주의’는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가르침입니다.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바울은 이 율법주의를 ‘다른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특히 ‘떠나다(메타티테미, metatithēmi)’라는 동사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삶의 자리를 바꾸는 것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학자가 어제 주장한 것과 오늘 주장하는 것이 상반될 때, 정치가가 이 당에서 저 당으로 넘어갈 때, 군인이 적에게 넘어갈 때 등에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시작한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다른 복음(율법주의)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니까, 마치 변절한 학자를 보는 것 같고, 어제의 친구가 오늘 갑자기 반대편에서 공격하는 것 같으며, 전쟁에서 동고동락했던 전우가 갑자기 적에게 넘어간 듯한 기분이 드는 것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대해서, 얼마나 속상해하는지를 그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6-9)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네 절에 걸쳐서 계속해서 ‘다른 복음’을 말하며 그것을 따르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다고 하고, 다른 복음은 없다고 말하며,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하기까지 하며 경고합니다. ‘다른 종교’보다 ‘다른 복음’이 더 무서운 것은 자신이 진리와 생명의 길, 하나님의 뜻을 따른 길에서 멀어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공동번역성서는 10절 상반절을 이렇게 번역합니다. “내가 지금 사람들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아니면 하느님의 지지를 얻으려고 합니까? 내가 사람들의 호감이나 사려는 줄 압니까?”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기록함으로 ‘다른 복음’이 아닌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을 전했고 또 하나님의 지지를 받고, 하나님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졌습니다. 그 태도와 그 삶이 기독교가 기독교가 되게 했고, 기독교가 땅끝까지 전해지게 하는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 당시에 바울보다 더 유명한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우리는 바울 외에는 아무도 모릅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다른 복음이 아닌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을 수용함으로, 개신교가 출발하게 했습니다. 그러한 것은 그들 모두 주님을 본받아 다른 복음을 좇는 삶을 깊이 슬퍼하고, 애통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며, 비진리의 삶을 사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통하는 마음을 가지면, 우리가 받은 복음이 우리와 우리의 가정, 우리가 서 있는 곳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하루도 복음 안에서 사시는 한 날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바울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얻으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지지를 받기를 소망했습니다. 또한 사람들의 호감이 아니라 하나님의 호감을 얻기 위해서 신실한 사도의 길을 걸었고, ‘다른 복음’이 아닌,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던짐으로 그 복음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쉽지 않은 과정을 통과하고 있지만, 이럴 때 더욱 우리가 영과 진리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삶을 살게 하시고,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에 우리의 삶을 얹게 하시고, 우리의 삶 위에 하나님의 말씀을 올려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바라옵나니 우리가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과 우리를 붙잡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시고, 우리의 매일매일이 하나님의 지지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그런 삶의 길을 걷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바울은 자신이 사도가 된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은 당신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과 지금의 삶의 자리에 있게 된 것이 무엇으로 말미암았다고 고백하시겠습니까?
2. 바울은 다른 복음은 없고,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강하게 말합니다. 당신이 받은 말씀은 어떤 복음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정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3. 바울은 사람을 좋게 하기보다 하나님을 좋게 하는(사람의 지지를 받기보다 하나님의 지지를 받는) 삶을 산다고 고백했습니다. 당신의 삶에는 하나님을 좋게 하는(하나님의 지지를 받는) 것은 무엇이 있습니까? 또 그렇게 산 것의 유익함은 무엇입니까?
4. 다른 복음이 아니리 십자가와 은혜의 복음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삶을 살기 위해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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