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2:11-21

갈라디아서 2:11-21
찬송가 : 88장 ‘내 진정 사모하는’

복음의 진리(11-21절)
최초의 이방인 교회였던 안디옥 교회는 복음에 기초해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가 되는 복음적인 교회로 성장해나갔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연합)라는 복음의 진리대로 살아갔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예루살렘에서 베드로가 안디옥 교회를 방문하였고, 이방인들과 서로 교제를 나누고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11-1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할례자들)이 오자,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던 게바(베드로)가 갑자기 그 자리를 떠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상황이 이랬습니다. 일부 유대인 지도자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도 할례를 비롯한 유대주의적 관습을 지키게 해야 한다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행15장의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베드로는 유대인도 능히 감당하지 못하는 율법의 멍에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으며, 바울과 바나바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을 용납하셨다고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공의회에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 및 율법을 강요하지 않도록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베드로는 이방인과 식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부정적인 영향이나 손해를 입힐 것 같은 생각이 들어, 눈치를 살피면서 식사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면서 신앙인의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숨기는 모습입니다. 사회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밝히면 무언가 손해를 볼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주일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평일은 비신자의 모습으로 극명하게 구분되어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습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일에만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월요일에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은 주일만이 아닌 일주일을 가정과 일터에서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으론 옛 미신적인 관습을 떠나지 못한 모습도 있습니다. 시험일에 미역국을 먹지 않기, 빨간색으로 이름 쓰지 않기, 문지방을 밟지 않기 등 말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생각해봐야 할 것은 복음의 진리 안에서 할례자와 이방인을 구분하는 차별이 존재했다는 것입니다. 복음 안에서는 모두가 똑같고 동일합니다. 복음은 구분과 차별이 없는 평등이자 공평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초기 사도들조차도 이 대전제를 지키지 못했습니다. 오늘 날 우리의 모습은 어떤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내 마음과 행동이 복음의 진리에 맞게 살고 있는지, 아니면 차별과 선입견으로 채워져 있는지 말입니다.

이와 같은 베드로의 실수는 개인적인 문제를 넘어, 함께 식사하던 바나바를 비롯한 다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같은 실수를 범하게 만드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습니다.(13절) 이런 베드로의 실수를 통해 교회에 미칠 악영향이 클 것임을 인지한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헛되이 하지 않고, 다른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범하기 않기를 바람으로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도권을 더욱 증명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바울은 베드로의 잘못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가 실수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12절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베드로는 할례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이는 사람을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할례자인 유대인들이 자신을 책망하고, 이로 인해 자신에게 어떤 부정적 영향이 생길지에 대한 두려움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자도 죄인이고, 무할례자도 죄인입니다. 즉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래서 죄인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면 언제나 사람의 눈치만을 살피게 됩니다. 사람의 눈치를 살피다 내 자신의 가치도 잃고, 신앙적으로 복음의 진리를 놓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사람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사람을 움직이시는 것도, 그 사람의 영향이 내게 못 미치게 만드시는 것도 결국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잠언 29:25에서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15-16)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바울은 15-16절에 누구도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므로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다고 합니다. 이게 바로 이신득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17-19)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17-19절에서는 바울은 믿음 안에서만 사는 자신의 굳은 확신을 천명함으로써, 율법주의의 부당성을 재차 피력하고 있습니다. 과거 자신이 율법으로 인해 의로워지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정죄의식만 커지고 절대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음을 얘기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으며, 오히려 우리를 죄인 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율법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20절의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 짧은 구절에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과거 옛 사람의 모습은 십자가와 함께 단절하고, 새로운 변화의 삶을 향해 가는 바울의 고백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온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내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나는 죽었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은 율법적인 내가 아닙니다. 내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긍휼 안에서, 성령님의 보호를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실존적인 삶이며, 우리의 고백인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 안에서 사는 삶은 3가지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나 대신에 그리스도가, 율법 대신에 믿음이, 과거의 옛 사람 대신에 새 사람이 내 마음>에 존재해야 합니다.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옳다 인정을 받을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 됩니다. 만약 누군가가 복음도 믿고 율법도 지키자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믿음이 어릴 때에는 율법을 가르치고 믿음이 성숙해질 때 은혜를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만드는 것임을 이야기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율법은 <내 의로움>이며 <헛된 영광>입니다. 내 의로움을 나타내거나 헛된 영광을 따르다보면 보면, 갈등과 문제가 생기고, 하나님과 반대되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미 19절에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으로 죽었는데, 어떻게 내 의로움과 헛된 영광을 구하고 따르며 살 수 있겠습니까? 나는 이미 죽었고 하나님에 대하여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할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따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 영원히 굳게 서 있는 말씀을 마음에 품고 그 말씀을 전하는 복된 삶이 될 것입니다.

<기 도>
하나님. 우리가 호흡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칭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주님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며 살아가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혹 옛 사람의 습성으로 인해, 복음의 진리를 삶속에서 투영하지 않고, 차별하고 구분 지었거나, 혹은 내 의로움을 구하고, 헛된 영광만을 바라는 삶이 있었다면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따르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묵상을 돕는 질문>
1. 내 안에 옛 습성을 따라 버리지 못한, 차별적이거나 선입견적인 부분이 있다면 나눠봅시다.
2. 혹 사람을 두려워하여 신앙적인 후퇴를 보였던 모습이 있었다면 나눠봅시다.
3. 율법은 내 의로움이며, 헛된 영광입니다. 이를 버리기 위한 신앙적 노력은 무엇인지 나눠봅시다.
4.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은, 결국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살기 위한 신앙적 결단은 무엇인가요?

'새벽기도 > 갈라디아서(새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갈라디아서 3:15-22  (0) 2023.02.24
갈라디아서 3:1-14  (0) 2023.02.24
갈라디아서 2:1-10  (0) 2023.02.24
갈라디아서 1:11-24  (0) 2023.02.24
갈라디아서 1:1-10  (0) 202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