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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3:15-22

갈라디아서 3:15-22
찬송가 546장 ‘주의 약속하신 말씀 위에 서’

갈라디아서 3장과 4장에는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기 위하여 율법과 언약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이신득의(以信得義)의 진리를 변증하는 이유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현혹되어 마음이 요동하는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을 안타까워하는 바울은 3장 1절에서는 그들에게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고 말하며 그들이 진리 안에 다시 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의롭게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을 고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변증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아브라함을 예로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들의 조상이자 율법주의자들도 존경하는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이 의롭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율법을 행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었음을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이를 뜻하는 성경 구절이 바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입니다. 어제 본문은 바울의 다소 격양된 어조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책망하였다면 오늘 본문은 책망의 이면에 진리로의 회복을 소망하는 사랑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사람의 언약이라도(15-18절)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사도 바울은 1절과 대조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의 교인들에게 ‘형제들아’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본심입니다. 책망을 통한 진리로의 회복입니다. 사람들이 책망을 듣지 않으면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요즘처럼 코로나바이러스가 대유행하는 시기에 방역을 소홀히 하는 아이들에게 방역 수칙을 잘 지키라고 강하게 말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마음에 방역의 중요성이 깊이 인식되지 않습니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이 그런 아이들에게 강하게 말할 때는 아이들의 건강에 대한 염려와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약속’의 중요성을 사람의 약속과 비교하여 설명합니다. ‘예대로 말하노니’에서 ‘예대로’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따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조차 사람 사이의 언약, 즉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하신 언약을 누가 깰 수 있겠느냐입니다. 이신득의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왔기에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을 폐하거나 더할 수 없습니다.

16上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도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 약속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바는 16절 하반절에 있습니다.

16下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복수형으로 말씀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단수형으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성경 구절이 창세기 22장 18절입니다.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하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려고 했을 때 들었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중 ‘네 씨’는 ‘아브라함의 씨’, 즉 ‘아브라함의 자손’을 뜻하는데 단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니라 자손 중 한 사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 중 한 사람,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갈라디아 교인들이여, 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복,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복을 믿지 못하느냐’입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약속을 ‘후에 제정된 율법’이 폐할 수 없음을 다음 구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430년이라는 숫자는 야곱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했던 시기를 뜻합니다.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 생활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언약이,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출애굽하여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받았던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선약이 나중에 만들어진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유업’의 문자적 의미는 ‘부모로부터 상속받는 재산’을 뜻하지만,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는 용례를 보면 이 단어는 ‘하나님의 나라’를 뜻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곧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뜻합니다. ‘유업’ 대신 ‘하나님의 나라’를 넣어 18절 상반절을 읽어 보면, ‘만일 하나님의 나라가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율법을 행함으로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약속은 무의미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갑니다. 이 진리는 바울 신학의 산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셨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도대체 왜 필요한가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이에 대해 다음 구절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19-21절)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이 구절은 율법의 두 가지 중요한 기능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율법은 인간이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범법이란 ‘기준이나 규범으로부터의 벗어남’을 뜻합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난 것이 범법입니다. 인간이 악을 행하지 않았더라면 율법은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모세를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기 전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인간다운 삶을 살았습니까? 그렇지 못했습니다. 애굽의 죄악된 습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이처럼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 때문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율법은 인간의 범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습니다. 율법이 제정되기 전, 인간은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준을 벗어나도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죄가 죄인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도덕이 무너지고 윤리가 무너지고, 심지어 양심조차 무너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이 없다면,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지 않겠습니까? 율법의 중요한 기능 둘째는,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역할 수행입니다. ‘약속하신 자손’이란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19절의 ‘천사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 율법을 받았을 때 있었던 천사들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7장 38절이 이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이란 하나님께서 중보자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수여하신 것을 뜻합니다. 그 중보자 모세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다음 구절이 알려줍니다.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중보자 모세는 백성의 편만 들 수 없었고, 또한 하나님의 편에만 설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중보자의 역할이 중립자로서 양자를 연결하는 전달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중보자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없습니다. 오늘날 중보자라고 말할 수 있는 중재자는 한쪽으로 치우치면 제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 중재는 실패합니다. 모세의 역할이 이와 같았습니다. 흔히 생각할 때 모세가 하나님의 편에 서야 한다고 하겠지만,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하여 벌을 받을 상황에서는 그들을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을 변호해야 했으며 그들의 죄 사함을 위해 이스라엘 백성의 편에서 하나님께 호소했습니다.
그런데 20절 하반절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는 말은 ‘성부와 성자가 하나이시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과 하나이시기에 모세와 같은 중보자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은 곧 하나님께서 전하신 복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주셨기에 중보자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보다 우위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무용한 것인가 또는 저속한 것인가 라는 의문점이 생깁니다. 이러한 우려를 다음 구절이 불식시켜줍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19절에서 율법의 기능에 대해서 언급하였습니다. 율법은 불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하나님의 악속들과 반대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능히 살게 해 주지는 못합니다. 즉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율법을 전부 행할 정도로 도덕적으로나 의지적으로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인간의 죄성과 영적 무능력함을 깨닫게 할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제한적 역할입니다. 율법이 제한적 역할을 하기에 온전한 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온전한 것이 올 것임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22절)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여기서 성경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다’는 것은 ‘율법이 모든 사람을 죄에 속박시켰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율법을 전부 다 지킬 수 없었으므로 율법 아래에서는 결국 죄인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은 율법을 통해 죄 아래 갇혀 있는 자신의 실존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님만이 죄의 속박에 있는 자신을 건져내실 수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의 역할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의롭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그 말씀이 지금도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 있어 유효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잊지 않고,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말씀을 숙고함으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십시다. 그리고 아직도 이 땅에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약속의 말씀을 전하는 주님의 귀한 통로로 살아가십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하나님의 약속이 폐하여지지 않게 하시어 저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해 주시고, 약속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을 베풀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시고,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오직 주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잊지 않게 하시옵소서. 이 약속의 말씀을 매일 숙고함으로 저희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전해지는 통로가 되게 하시옵소서. 오늘도 약속의 말씀이 고난 중에 즐거움이 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 하신 약속 중 ‘네 씨’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2.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을 폐할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3. 율법의 기능은 무엇입니까?
4.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이 주는 은혜가 무엇입니까?
5.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할 수 있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과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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