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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3:1-14

갈라디아서 3:1-14
찬송가 549장 ‘내 주여 뜻대로’

바울에 의하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분명히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이신칭의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하여 할례를 받을 필요도 없었고 율법을 지킬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으며, 성령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됨을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과거 아름답게 신앙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믿음은 위기를 맞았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진리를 망각하고 유대인들의 율법주의적인 기준을 적용하려 하였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었는지를 잊고, 거짓된 이들의 주장을 따라 구원의 완성을 위하여 스스로 옭아매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점과 이것이 복음의 핵심임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바울은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믿음과 율법 행위(1-5)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바울이 보통 편지를 쓸 때, ‘사랑하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과 비교하여 ‘어리석도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에서 강렬한 안타까움이 나타납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복음을 좇는 갈라디아 사람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갈라디아 교인들을 유혹하였고, 그들은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였다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미혹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눈으로 보기에도 분명한 사실인데 미혹에 넘어갔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혹은 결코 불확실한 것만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선한 것인지 악한 것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은 것으로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다가옵니다. 더 무서운 사실은 확실한 일과 관련하여도 우리에게 유혹이 다가온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처럼 확실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이 이 십자가 사건에 대하여 확실한 인식을 가지고 있을 때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신앙이 확실한 사람일수록 더 강한 유혹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미혹 당하지 않도록 깨어 준비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의 영적인 문제를 교정하기 위하여 네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먼저 그들의 성령 받음의 기원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여기에서 율법과 믿음을 대조시킵니다. 율법은 행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고, 믿음을 일으키는 요소는 들음에서 시작됩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당연히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가 아닌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은혜이듯, 성령을 받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들의 삶의 모습 속에 구원받은 성도의 증거가 이미 나타났습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이것을 다시금 깨우치기를 원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된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과는 전혀 관련이 없었습니다.

둘째로 그들의 신앙의 시작과 끝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신자가 되는 것은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음입니다. 문제는 성령으로 시작하였으나 이제 육체로 마치려 하는데 있습니다. 시작은 잘하였지만, 지금 이제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는 죄성을 의미하며 어떠한 행위를 뜻합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받은 구원을 육체의 행위로 완성 시킬 수는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대속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 시키셨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구원의 조건을 자신들이 내세우고 싶은 율법적 행위에서 찾고자 하였습니다. 시작은 영광스러웠으나 끝은 비극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너무나 답답하였습니다.

셋째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고난의 의미를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큰 고난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 때문에 갖은 고난과 모욕을 당하였고, 바울과 바나바가 떠나고 남아있던 각 지역의 성도들 또한 동일한 고난을 겪었을 것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로 인해 새롭게 발견한 복음으로 인하여 차별과 폭력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자신들이 받은 고난이 헛된 것이냐고 질문합니다. 새로운 신앙 때문에 기존 유대인들로부터 그렇게 고난을 받았는데 왜 이제와서 유대인의 율법을 지키겠냐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이 생각을 돌이켜 회개하기를 바라였습니다.

넷째로 그들이 받은바 하나님의 은혜의 기원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성령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의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신자는 이에 대하여 감사할 뿐입니다. 과거 갈리디아 교회 성도들은 구원 밖에 있었으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구원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떤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위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자들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가운데 사모하는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바울은 이제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 믿음을 설명합니다.


구원을 위한 믿음의 가능성과 율법 행위의 불가능성(6-14)
(6-9)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는 모세의 율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은 율법을 지키는 행위에서가 아니라 그의 믿음으로 인함이었습니다. 그가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려 한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고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듯, 믿음에 의하여 구원을 받은 이들 역시 하나님의 자녀로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그 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어떤 의로운 행위나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영원하신 택하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혜를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에 대해 설명한 바울은 이제 율법의 불가능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먼저 율법과 관련하여 행위에 불가능성에 대해 설명합니다.

(10-12)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믿음으로부터 난 자들은 복을 받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로부터 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율법과 가까운 자들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으로 율법을 행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결코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없고, 그 결과는 저주 아래 있는 것, 즉 영원한 죽음입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그들이 따르는 율법에서 찾습니다. 누구도 율법에 기록된 대로 모든 것을 항상 행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은 완벽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있어서 일부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전체를 지키지 못한 것과 같습니다. 의인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결코 율법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율법을 잘 준수한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온전히 율법을 지키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율법은 우리를 구원할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저주를 직접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히 무능력한 존재임을 겸손히 깨닫고 온전히 그리스도를 믿음을 통하여 구원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13-1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종된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속량하다는 의미는 대가를 지불하고 사서 풀어준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셨다’고 표현합니다. 그만큼 십자가의 구속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그 결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저주는 이방인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복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된 성령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령은 우리를 강하게 하고 시련 중에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에 집중한다면 우울과 실망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실패와 좌절 속에서 살아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죄로 인해 절망과 좌절 속에 몸부림 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영원히 굳게 서 있는 말씀 앞으로 나아감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누려야만 하겠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오늘도 하나님 앞에 신실함으로 나아가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죄악으로 점철된 우리 삶의 모습을 생각하면 좌절하고 낙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선한 것 하나 내어놓을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옵나니 저희에게 한없는 은혜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저희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가게 하여 주옵시고,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의 삶과, 삶의 예배를 통하여 주님과 더욱 친밀하여지는 오늘이 되게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어리석다고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2.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성령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3. 아브라함은 무엇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까?
4. 믿음으로 말미암아, 영과 진리의 삶을 살기 위하여 무엇을 결단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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