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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갈라디아서(새벽)

갈라디아서 2:1-10

 갈라디아서 2:1-10
찬송가 329장 ‘주 날 불러 이르소서’

사도 바울은 앞서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받아 하나님의 사도가 되었으며, 그 이후에 예루살렘을 찾아 게바와 야고보 사도를 만났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말씀은 바울이 다시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교회 지도자들의 재가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한 바울과 일행(1-5)

(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십사 년 후라는 말은 갈라디아서의 기록 연도에 대한 주장에 따라서 예루살렘을 처음 방문하고 십사 년이 지난 시기를 뜻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1장 18절에 연결되는 말씀으로 보아 바울이 회심한 지 14년 후를 뜻한다고 보기도 합니다. 후자의 입장에서 보면 이 말씀은 사도행전 11장의 정황과 연결되는 내용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기근으로 고난을 받는 유대의 성도들을 돕기 위해 구제금을 가지고 안디옥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바나바는 이미 널리 알려진 교회의 어른으로서 함께했고, 디도는 수행하는 제자로서 따라갔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행전 11장 28절을 보면 아가보라 하는 선지자가 성령으로 천하에 큰 흉년이 들 것을 예언합니다. 이에 제자들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합니다. 바울은 이 계시를 따라서, 혹은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받은 계시를 따라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했다고 합니다. 특별히 유력한 자들, 즉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을 사사로이 만났다고 하는데, 이 말은 공적인 자리를 마련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만났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본인이 달려왔고, 또 달리고 있는 일이 헛된 것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사도 바울이 그때까지 확신 없이 복음 사역을 계속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이미 바울은 1장에서 자신이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를 받아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자신이 전했던 복음과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거나, 혹여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염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사도권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자들 때문에 자신의 복음 사역과 교회 공동체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하지만 예상한대로 예루살렘의 어르신들은 디도에게도 할례를 받으라고 종용하지 않았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속였지만, 정통 중의 정통인 예수님의 제자이자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바울은 분명히 밝힙니다.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바울은 이런 문제가 발생한 이유가 거짓 형제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훼손하고, 율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심지어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할례를 주장하는 이들에게 격분하여 갈라디아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의 핵심 이슈는 할례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2절에서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고 하며, 12절에서는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 말은 표피를 베어버리라는 뜻으로, 교회에서 할례를 주장하는 자들을 오히려 할례하여 제해 버리라는 과격한 주장입니다.
바울은 가만히 들어와 엿보는 그들의 은밀한 행위가 자유를 빼앗고 종으로 삼으려는 시도로 파악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무엇입니까? 특별히 갈라디아서는 자유를 여러 차례 언급하는데, 일반적으로 자유란 적극적인 의미에서는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음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고, 소극적인 의미에서는 제약을 당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음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기본적으로 할례로 대표되는 율법의 요구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를 뜻합니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율법 자체가 악하거나 사람을 속박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현대의 법조문조차 그 자체로는 악하다 선하다 규정할 수 없습니다. 법은 법관의 해석을 거쳐 적용이 되어야만 실효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율법도 그러합니다. 유대인들은 점점 율법을 문자적인 제약으로 해석하고 적용하면서, 그 뼈대와 형식만 중시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은 육체를 자랑하는 형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율법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하시고 적용하셔서 율법을 완전히 살아내심으로 완성하셨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말씀으로 정리됩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해설하시며 유대인들의 허위의식을 폭로하셨고, 삶으로 율법의 정신을 구현하셔서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신 죽으심으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구원하시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제껏 세상에서 존재했던 모든 이들 중에 가장 자유로운 이는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고 율법의 정신을 실천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가장 온전하게 성취하신 예수님은 모든 사람, 모든 관계, 모든 제약으로부터 자유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 예수님을 따라 살아갑니다.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하지만 율법의 껍데기에 복종하면 자유를 잃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게 조금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자유란 큰 대가를 치러야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갈망하지만, 자유를 감당하기 벅차기에 오히려 포기하기도 합니다. 자유하기 위해서는 항상 진리 위에서 스스로 판단하고, 결단하고, 실행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는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가 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화형대에 올리던 중세 스페인의 이단 심문관이 기적을 베푼 예수님을 잡아서 화형을 시키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대심문관은 예수님이 마귀의 세 가지 유혹을 그대로 받았다면, 사람들은 그런 기적을 베푸는 예수님을 거부할 자유가 없었기에 오히려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인류가 자유로운 의지로 예수님을 선택하고 따르면서 고통을 받게 되었다고 강변합니다. 예수님은 그 대심문관의 뺨에 입을 맞추는 내용입니다. 이 이야기는 자유가 주는 고통을 잘 드러냅니다.
게다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형식과 내용의 균형을 잘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자유란 어렵습니다. 자유라는 내용 또는 본질조차 일정한 형식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어느 정도 형식을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용을 완전하게 담은 형식일지라도 불일치가 일어납니다. 형식이 내용을 옥죄거나 내용을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내용은 자유인데, 형식은 오히려 자유를 억누르는 것이 됩니다. 율법이 좋은 예입니다.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 내용은 희미해지고 오히려 형식이 그 내용을 억누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율법이라는 형식의 올가미를 마침내 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이 된 이방인들 또는 유대인들은 육체에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온 자들이었는데, 각각의 이유로 다시 육체로 돌아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유를 지킬만한 내적인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내용이 아닌 형식을 붙잡게 되는 현상입니다. 또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그런 외적인 행태를 남에게 강요하고 자신은 우월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현상을 보고 기겁하여 비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그 가운데 있어 한시도 복종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복종하지 않는 삶은 피곤하고 위태하여 목숨을 그 대가로 요구합니다. 하지만 성령님은 언제나 목숨의 위협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주시고, 그리스도를 나타내심으로써 우리가 자유하게 살아가도록 힘을 주십니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은 바울(6-10)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바울은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라는 말로써, 그 지도자들을 과대평가할 것이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사람조차 외적 형식이 중요하지 않고 내적인 내용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들은 기둥 같이 여겨지는 자라고 말하며 형식도 인정합니다. 그 유력한 자들도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과 그가 행하는 전도 사역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고 형식도 더 부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들 모두 형식이 아닌 내용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9)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바울은 그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두 가지 면에서 자신을 인정했다는 점을 말합니다. 첫 번째는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음과 같이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사도임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기둥 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도 바울이 받은 은혜는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서로 친교의 악수를 나눴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경쟁자도 아니며 오히려 함께 섬기는 동료임을 확인했던 것입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그리고 한 가지만 부탁합니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자유는 무엇을 위한 것인지에 대한 해답이 여기에 등장합니다. 자유는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거나, 나의 욕구를 충족하는 일에는 그 무엇에도 제약받지 않겠다는 태도나 사고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유란, 예수님이 본을 보여주신 대로 남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남을 위해서는 나라는 속박에, 나의 욕구라는 한계에 제약받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삶의 양식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돕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잠언 14:31은 말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멸시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공경하는 자니라.” 가장 약한 자를 대하는 태도가 바로 그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입니다. 일찍이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는 자로 널리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웃을 위해 모든 것을 아끼지 않고 내놓는 모습이야말로 기독교가 지금의 위상을 얻을 수 있던 원동력이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표현에 그 정수가 담겨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나 내 자유를 주창하고 추구하는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몇 가지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자유를 위협하기 위해 우리를 엿보면서 가만히 들어오는 거짓 세력이 있습니다. 우리의 틈을 노리고 언제든지 우리를 장악하려고 하는 악한 자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리가 항상 영원하신 말씀을 근거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자유의 무거운 짐을 기꺼이 감내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육체를 자랑하는 형식에 멈출 위험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위험 요소를 겸손하게 인식하고 파악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을 지니게 해달라고, 그 눈이 가리지 않게 해달라고 항상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유를 얻은 자로서는 자신을 즐겁게 하고 욕망의 배를 채우는 일에 몰두하지 않고 다른 사람, 특히 약한 사람을 위해 내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그때야 우리는 자유를 누리기에 합당한 자가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에 종노릇 하지 않고 무겁고 어렵지만 소중한 복음의 진리로 자유롭게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원하신 말씀에 근거하여 영적인 눈으로 자신과 주위를 언제나 둘러보아 거짓 세력을 경계하며, 복음의 진리 가운데 항상 거하게 하시옵소서. 그래서 가난하고 약한 자를 위해 그 자유를 사용하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다른 사람이 나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않을지라도 지금까지 달음질한 것이나 달음질하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있습니까?
2. 나에게, 또는 내가 속한 공동체에 가만히 들어와 우리를 엿보면서 종으로 삼고자 하는 요소는 없습니까? 그런 요소가 있을 때 어떻게 대응하고 계십니까?
3. 한시도 육체에 복종하지 않고 복음의 진리 가운데 거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계십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지키기 위해 어떻게 힘쓰고 계십니까?
4.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돕기 위해 자유를 사용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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