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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기도/민수기(새벽)

민수기 1:47-54

 민수기 1:47-54 


찬송가 3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는 인간에게 감지되고 이해되는 세상입니다. 선악과 먹어 신이 되어 버린 인간은 나를 위해서라면 보이는 세상에 있는 어떤 것들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신도 포함됩니다. 모든 종교가 증거하듯 인간이 만든 신은 인간을 위한, 인간이 이 땅 위에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신입니다. 심지어 기독교 안에서도 하나님을 그저 나의 잘됨을 위한 도구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걸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반면, 보이지 않는 세상은 예수 중심입니다. 마치 바다 안에 있는 물고기가 바다 밖 세상을 상상조차 할 수 없듯이, 나 중심으로 사는 인간들에게 예수 중심으로 살라는 말은 받아들여질 수도 이해될 수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보이는 세상이란 죽음의 바다에서 들림 받은 성도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그 분께서 주신 구원의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레위 지파와 다른 지파들과 비교하며 구분 짓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레위 지파에게만 허락한 특수한 역할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입니다. 바로 없음의 역할입니다.

계수(47-49)
(47-49) 그러나 레위인은 그들의 조상의 지파대로 그 계수에 들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레위 지파만은 계수하지 말며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 계수 중에 넣지 말고

계수는 보이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수입니다. 전쟁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만 계수하는 까닭은 싸우지 못하는 사람은 국가 유지와 확장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존재, 즉 보이는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보이는 세상에 살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은 자들입니다. 히브리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외국인이요 나그네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계수에서 빼심으로써 세상에 포함되지도 않은 없음의 존재에게 성막과 제사를 관리하는 요직을 맡기십니다.

없음의 삶, 즉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 일은 제쳐놓고 종교생활에만 몰두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종교생활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보이는 세상의 가치를 좇을 수 있음을 우리는 바리새인들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없음으로 산다는 것은 나를 부인하는 삶입니다. 나는 죽고 예수만 높아지는 삶, 나의 증인이 아니라 예수의 증인으로 사는 삶. 이것이 없음의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사신 분이 예수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와서 자신의 뜻대로 행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뜻 만을 행하셨습니다. 자신의 영광을 구하지 않으시고 오직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셨습니다. 그렇게 생명의 주관자시요 자존하시는 유일한 있음이 보이는 세상에서 없음으로 사시며 스스로 있음임을 주장하는 죄 된 인간을 구원하시는 것, 즉 없음을 통해 있음이 구원받는 원리, 이것이 십자가 사건의 본질입니다.

없음(50-51)
(50) 그들에게 증거의 성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게 하라 그들은 그 성막과 그 모든 기구를 운반하며 거기서 봉사하며 성막 주위에 진을 칠지며

레위인들은 성막과 그와 관련된 기구와 모든 부속품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았습니다. 이 또한 레위 지파가 이 땅에서 없음의 역할을 맡았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스라엘 다른 지파는 모두 각자의 직업이 있었습니다. 열심히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워서 사랑하는 가족들도 먹이고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레위인들은 아닙니다. 제사가 그들의 업이었는데 제사는 우리를 먹여주고 입혀주지 않습니다. 제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만 유용하지, 보이는 세상을 사는 데는 아무런 쓸모가 없습니다. 인간은 그래서 제사보단 돈벌이가 되고 세상살이에 유익한 것들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뉴스만 봐도 죄다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있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 뿐입니다. 하지만 레위인은 이러한 것들이 아닌 성막과 관련 기구와 부속품들, 즉 하나님의 일에만 관심을 두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에 대해 죽고, 주님에 대하여 산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앞에서도 말씀 드렸듯이 주님은 홀로 있음이시지만 이 세상에서는 없음이 되셨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생명을 받은 성도는 이 땅에서 없음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 의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반드시 십자가의 길을 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51) 성막을 운반할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걷고 성막을 세울 때에는 레위인이 그것을 세울 것이요 외인이 가까이 오면 죽일지며

레위인만이 성막을 옮길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은 가까이 오면 모두 죽는다고 합니다. 성막은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50절에 보면 성막이란 단어 앞에 증거라는 단어가 붙어 있고 이 증거란 단어는 히브리어 단어 'ēḏûṯ'로 증거, 말씀, 율법 등의 의미로 히브리어 성경에서 사용됩니다. 다시 말해, 성막을 말씀의 성막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를 통해 주님의 말씀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과 그와 관련된 모든 부속품들은 오직 레위인들에 통해서만 이스라엘과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없음을 통해서만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백성과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선악과 먹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말씀과 대면했을 때 반드시 자아의 죽음을 경험합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경험하던지 육적인 죽음 후에 경험하던지로 나뉠 뿐,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습니다. 레위인이 성막을 옮길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그들은 계수에도 포함되지 않은 없음, 즉 죽은 존재로 이 땅에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죽은 자들만 하나님 말씀과 함께 거할 수 있습니다. 없음의 삶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내가 하기 싫은 것들을 하지 않고 참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나의 실체를 깨닫고 나에게서는 어떠한 선도 나올 수 없다는, 그래서 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리게 되는 것이 진짜 죽음입니다. 이건 절대 성령없는 자들은 깨달을 수 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 온전히 죽은 자들만 하나님 말씀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부동산(52-54)
(52-54) 이스라엘 자손은 막사를 치되 그 진영별로 각각 그 진영과 군기 곁에 칠 것이나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 사방에 진을 쳐서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 진노가 임하지 않게 할 것이라 레위인은 증거의 성막에 대한 책임을 지킬지니라 하셨음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그대로 행하되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더라

막사를 치고 진영별로 군기를 세운다는 것은 거주할 곳을 표시하는 행위입니다. 내가 거주할 수 있는 땅. 요즘 시대로 치면 부동산입니다. 부동산이 생기면 소유주는 부동산에 종속되어 그 부동산을 지키는 것을 목적으로 살게 됩니다. 나의 것을 지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때문에 레위는 부동산이 없습니다. 그들은 성막 사방에 진을 쳐야 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자들입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명기 10장 9절에 보면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고 합니다. 이 땅에 기업이 없다는 것은 이 세상에 나의 소유가 없다는 말이며 소유가 없다는 것은 내가 지킬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지킬 것이 없는 자들, 부동산이 없는 자들만이 주님을 기업으로 삼고 나그네처럼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모두 이 땅에 지킬 것이 있습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지킬 것들이 생깁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내가 이룬 업적 등 꼭 토지를 소유하고 있거나 건물주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이 땅에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 부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을 하고 있건 하지 않고 있던 이 땅에서 우리의 것을 지키기 위해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 머리 둘 곳도 없던 분이 계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살고는 계셨지만 아무런 소유가 없으셨고 그래서 이 땅을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이 삶으로 나타난 것이 요한복음 5장 30절이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입니다.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며 자신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좇는 삶. 그게 없음의 삶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진영을 보면 사방에 지파들이 둘러 싸고 그 중심에 레위 지파와 성막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하는 성막이 이스라엘 중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스라엘 구원 역사는 사실 그 주목적이 이스라엘의 구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즉 언약 성취해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레위가 성막 사방에 진을 치지 않으면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임하는 것입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이 주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성막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이시는 것은 목적에 맞지 않습니다. 성막이 이스라엘보다 먼저라는 뜻입니다. 이와 비슷한 그림이 여리고성을 무너뜨릴 때도 재현됩니다. 여리고성을 돌 때, 이스라엘은 그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들고 있었습니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증거하기 위함이라는 뜻입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물을 열어주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나갈 때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언약궤를 들고 있던 제사장의 발이 요단강에 닿는 순간 강물이 멈췄습니다. 언약궤 위주지 이스라엘 위주가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를 주셨다고 생각한다면 예수의 십자가 또한 그저 나의 구원을 위한 도구로 전락하고 맙니다. 십자가의 목적은 하나님의 언약 성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의 주 목적이며 우리는 그것의 결과물로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에 관심이 없으시거나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를 아끼지 않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으셨습니다. 하지만 십자가를 단순히 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로만 본다면 그것은 그저 나의 자아를 구축해 주는 또 하나의 도구가 되어 버립니다. 이를 잘 설명해주는 것이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나오는 밭에 감춰진 보화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밭을 사는데 그 사람은 그 밭이 얼마나 큰지, 그 토양이 얼마나 옥토인지, 그 땅이 재개발이 될지를 궁금해 하지 않습니다. 오직 보화의 유무만 봅니다. 그 보화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보화 덕분에 덩달아 땅도 사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사는 오직 보화입니다.

레위 지파는 세상에 살고 있긴 했으나 세상에 속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죽은 존재로 이 땅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를 높이고 나를 증거하기 위해 살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교우님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증거하는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진리의 말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은 인생동안 이 진리의 말씀만을 증거하며 살 수 있도록 은혜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계수에 들지 않는 자들은 어떤 자들입니까?
2. 이 세상에서 없음으로 산다는 것, 즉 세상에 속해 있지 않는 자들의 삶은 어떤 모습입니까?
3. 내 삶 속 부동산은 무엇입니까? 나는 소유가 없는 자처럼 살고 있나요?
4. 하나님께서는 나의 무엇을 보고 구원하셨나요? 마태복음 13장에 나와있는 비유를 통해 묵상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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