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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풍성한 연보 (고후 8:1-9 / 2008년11월09일 주일예배)

 

헌금을 하라는 이야기를 하기가 힘든 세대입니다.

돈 문제에 관한 한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으려는 것이 요즘 교인들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당연히 드려야 하는 헌금의 문제에 관해서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너무 많은 편법들이 등장을 하고 있습니다.

공식적으로 성도들 앞에서는 돈 이야기를 안 하는 것 같은데

실은 돈 이야기가 주가 되어있는 분들도 참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헌금 이야기가 없으니까 갖가지 설들이 등장을 하고

심지어는 헌금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성도나 세상이나 할 것 없이 교회에 대한 더 큰 기대를 갖고도 있습니다.

교회가 이 땅의 어려운 사람들을 위한 나누고 베푸는 삶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간의 교회들의 잘못도 있습니다.

너무 자기 교회를 위한 투자에만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자기네 교회 성전 크게 짓고, 자기네 이름 드러내는 일에 더 많은 생색을 내고,

자기들이 즐기고 누리는 것에만 우선해서 운영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웬만한 교회의 크기이면 다들 기도원이나 수양관 하나쯤은 다 갖고 있고,

해외에 나들이 삼아 다닐만한 선교지 하나쯤은 다 갖고들 있습니다.

교회가 부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많은 구제도 하고 나누기도 하고 섬기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여전히 세상으로부터 자기들만 아는 공동체라고 욕을 먹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렇다 저렇다 하더라도 교회에 돈이 있어야만

교인들의 기대나 세상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부응은 못하더라도 운영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럼 그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옵니까?

교인들에게서 나와야 하는 겁니다.

때문에 헌금에 대한 설교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근거한 정당한 설교를 해야만 하는 겁니다.

 

문제는 정당한 설교를 하지 않고 엉터리 근거로 설교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헌금을 원하고 바라는지를 설교하지 않고

항상 교회의 원하는 바대로의 헌금만을 강요한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성전 짓는다고 내라는 건축헌금입니다.

아마 대한민국의 교회가 성전 건축헌금 드린 것만으로 따지면 천문학적인 액수일 겁니다.

20세기 이후에 세계 최고일 겁니다.

 

그러면 왜들 그렇게 건축헌금을 했습니까?

복 받는다고 했습니다.

복 받겠다고 했습니다.

복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정말 복 받았습니까?

물론 복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 복의 대부분은 부동산이 올라서 받은 복입니다.

그게 복입니까?


 

오늘 처음으로 헌금에 대한 성경적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이 칭찬을 하고 마게도냐 교회의 연보, 즉 헌금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의 헌금을 이야기 하면서 저들이 극한 환난의 많은 시련 속에서

오히려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으로 풍성한 연보를 드리게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오히려 더 기뻐하면서 더 많은 헌금을 드릴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이 도운 예루살렘 교회는 지리적으로 볼 때

전혀 자신들과는 관계가 없는 그런 교회입니다.

한 번도 왕래해보지 않는 그런 곳입니다.

연보를 드려도 전혀 생색이 나지 않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자기들도 살기 어려우면서 최선을 다해서 연보를 드릴 수 있었던 이유는 뭘까요?


롬 5:3-4 “다만 이 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왜 환난 중에도 기뻐하면서 저들이 알지도 못하는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서 섬길 수 있습니까?

그것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서 훌륭하게 만들어 내는 과정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시련과 연단의 과정을 거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흔들림 없이 서는

자녀로 만들어질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자세가 없다면 우리는 바른 헌금을 드릴 수 없습니다.

 

바른 헌금이 무엇입니까?

드린 헌금으로 인해서 내가 좀 더 많은 물질적인 축복을 받을 것을 기대하지 않는 헌금입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 앞에 드리는 자로서 쓰임을 받는 것에 감사하고,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붙드는 믿음으로 드리는 헌금이 바른 헌금입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에게서도 받으시는 것이 있음을 감사하는 믿음으로 드리는 겁니다.


5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때문에 마게도냐 교인들은 단순히 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게 아니라

자신을 먼저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돈만 드리고 갈 수 있습니다.

 

나무목교회가 개척교회니까 어려울 테니까, 힘들테니까 생각하면서

물질로 헌금만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런 분들도 가끔 계시고요.

 

그러나 정말 더 바람직한 헌금은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나무목교회를 섬기고 살겠다고 하는 겁니다.

교회의 아픔과 어려움을 함께 지고 가겠다는 생각입니다.

그것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 자세가 있으면 뭘 해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교인들에게는 이런 생각들이 갈수록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야 대문만 열고 나가면 천지인데 어디 다니면 어때? 라는 생각이 너무 많습니다.

때문에 교회 공동체의 삶 속에 깊이 빠지기를 싫어합니다.

다니기는 다니는데 거죽만 다닙니다.

그냥 출석만 합니다.

출석인원이 몇 천 명이 되는 교회에도 실 등록인원은 천명이 안 되기도 한답니다.

그냥 예배만 드리러 다니는 겁니다.

 

그러니 그 안에 나 같은 것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을까요?

그냥 돈만 달랑 드리고 가는 겁니다.


7절을 보세요.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 같이 이 은혜에도 풍성하게 할찌니라”


단순히 돈만 많이 내라. 열심히 예배만 드려라가 아닙니다.

삶의 모든 부분이 하나님의 은혜 앞에 풍성한 것입니다.

 

‘그저 제가 어찌 살든지 신경 쓰지 마시고 이 돈 받으시고 복만 많이 내려주세요.’ 가 아닙니다.

믿음, 말, 지식, 간절함, 형제 사랑에 풍성한 것과 같은 의미로서의 풍성함입니다.

 

뭔가의 대가를 바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자기 것을 받으신다는 기쁨으로 아무 원하는 것 없이 드리는 겁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것은 신앙적인 지식과 믿음생활에 뜨겁다는 사람들이

오히려 남을 돕는 것에 더 냉랭합니다.

남들보다 더 많은 축복(?)을 받았다는 사람들의 마음이 오히려 더 말랐고

가슴이 더 굳어 버렸습니다.

받은바 은혜를 생각하면 남들보다 심장이 훨씬 더 뜨거워야 하는데 그냥 입만 빠릅니다.

별별 핑계를 다 대면서 자기가 참여를 안 하는 것은 물론이고

오히려 남을 돕는 것에 딴지를 겁니다.

자기는 하지도 않을 거면서 남들이 하는 것에 대해서 감 놔라, 대추 놔라가 많습니다.

 

교회의 어려움이 눈에 들어오면 자기가 피할 길부터 찾습니다.

자기가 빠질 핑계들만 우선 찾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도움을 받아야할 사람이라고까지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러나 성숙한 성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자발적이고 적극적입니다.

그러면서도 소리가 나질 않습니다.

 

8절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만약에 날씨가 추운데 성전의 창문이 열려 있으면

그냥 아무 소리 없이 닫아주는 것이 성도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닫으면서 꼭 한마디 합니다.

‘아니 추워 죽겠는데 누가 문을 열어 놨데?’

 

어떤 사람은 아예 닫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욕은 합니다.

‘손가락 몽댕이를 분질러 놔야해.’

 

또 어떤 사람은 조용히 문을 닫아 줍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기 할 일을 합니다.

이 사람 괜찮은 사람이죠?

 

그런데 더 괜찮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문을 닫기 전에 누가 이거 필요해서 열어 놓은 것은 아닌지 돌아봅니다.

자발적인 성숙입니다.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 넓게 행동하는 겁니다.

 

바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남들을 도우라는 건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랍니다.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면 당연하게 나타나는 증명서와 같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라면 당연하게 나타나 보이는 태도인 것입니다.

 

왜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9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위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신 부요함을 버리시고 십자가의 고통을 우리를 위하여 당하셨습니다.

때문에 우리 같은 죄인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거룩하고 부요한 자리에 서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고 사는 우리가 이제 나눠야할 차례입니다.

그렇다고 우리도 예수님처럼 생명 드리면서 다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필요도 없구요.

다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명과도 같은 물질로 나눠야만 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물질은 단순한 돈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내 신앙의 표현입니다.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가 어느 정도인지를

깨닫고 사는 정도에 따라서 드리시면 됩니다.

 

액수는 문제가 아닙니다.

다만 내 형편과 처지를 헤아려 보는 것을 우선하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주심이 얼마나 감격인지를 먼저 생각해보시면 좋겠습니다.


 

다음 주에 추수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올 한 해 동안 얼마나 많은 감사가 있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올해는 정말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시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당연하게 가르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는 기쁨을 이 땅의 것으로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드리는 것으로 더 어려운 삶을 감당하시는 분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 나무목교회의 성도들이 귀하게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미리미리 준비하시라고 봉투를 나눠 드립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생각하시고 기도하셔서

성령님께서 여러분 마음에 감동을 주시는 대로 담아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갈 6:8-9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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