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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집은 기도하는 집 (마 21:12-17 / 2009년 4월05일 종려주일 낮 예배)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33년의 생애를 마치시는 그 마지막 한 주의 시간에

예루살렘에 들리신 날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의 한 쪽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것을 각오하시고

예루살렘의 성에 들어오시는 날이 바로 종려주일입니다.

이 날에 수많은 유대인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바로 앞부분인 마태복음21장 1절부터 10절까지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렇게 환영을 받은 예수님께서 불과 5일이 채 안돼서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되신 것입니다.

실제로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결정 할 때 사형집행의 최종결정권자인 로마의 빌라도 총독은

끝까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친 그 때가 유월절이라고 하는 유대인의 가장 큰 명절이었습니다.

명절 때에는 총독에게 사형을 당할 사람 하나를 풀어줄 권리가 있습니다.

그 때 마침 바라바라고 하는 살인죄를 저지른 유대인 사형수도 예수님과 함께 사형집행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빌라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과 바라바 중에서 어떤 사람을 풀어 주기를 원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유대 군중들은 살인자 바라바는 풀어주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합니다.

 

불과 5일 만에 예수님께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180。로 달라져 버린 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이 달라져 버렸을까요?


 

바로 오늘 본문의 일이 유대인들의 마음이 달라져버린 가장 큰 단초입니다.

본문은 “성전 정화”, 또는 “성전 청결” 등의 제목으로 사순절이나 고난 주간에 설교를 많이 하는 내용입니다.

아마 오늘 본문을 가지고 가장 많이 이용하는 곳이 교회 내에서 장사하지 말라는 것일 겁니다.

실제로 교회 내에서 바자회를 하거나 여전도회에서 뭐라도 좀 팔아서 선교비를 좀 모으려고 하면

대부분의 장로님들이 이 본문을 들이대고 반대를 합니다.

교회는 장사하는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이 아주 간단하게 '교회는 기도하는 곳이지 장사하는 곳은 아니다' 라는

생각만을 하게 되는 내용입니다.

물론 그 말은 일부 맞습니다.

교회는 사업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런데 단순하게 교회는 장사를 하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만 하게 된다면

이건 정말 너무 옹졸하게 말씀을 해석하고 적용을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십자가의 죽음을 준비하시면서

가장 먼저 언급을 한 것이 성전이라는 것을 의미심장하게 생각을 해봐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굳이 성전을 건드리신 이유를 잘 찾아봐야만 하는 것입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이 무엇입니까?

성전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떤 의미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면 불과 5일이 안 되어서 유대인들의 마음이 바뀌게 될 정도로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엄청난 역할을 하는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그냥 생활 그 자체였습니다.

그 때의 유대인의 생활이 어떤 생활입니까?

율법의 생활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주신 율법의 말씀들이 그들 생활의 중심이고 기초이고 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성전은 바로 율법의 완성쯤으로 여겨지는 가장 율법스러운 곳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율법의 중심지요, 심장이요, 율법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그들 삶의 능력이 되고 힘이 되고 근간이 되는 하나님은 바로 그 성전에 계시는 분이셨습니다.


합 2:20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이스라엘의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입니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 잠잠해야만 하는 거룩하고 복된 곳입니다.

그런 성전에 가신 예수님께서 과감하게 청소를 하신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스스로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사실 그 동안 아니 오늘 종려주일까지 예수님을 그들이 환영을 한 것은 다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그들의 삶을 좀 더 개선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습니다.

놀라운 기적의 능력들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속된 말로 인생의 대박을 꿈꾸고 싶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가 사용할 말은 아니지만 팔자 한 번 펴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성전을 건드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들 삶의 모든 지지기반이 성전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은 과감히 도전장을 내던지신 것입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영적, 정신적 삶의, 또 실제적인 삶의 지지기반인 성전을 향해서

정말 무모하게만 보이는 이런 과감한 일을 벌이셨을까요?


이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었던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가야만 합니다.


요4:19-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


사마리아 수가 성이라는 곳에서 한 낮에 우물에 물을 길으러 온 여인과 하신 대화입니다.

원래 사마리아 지방에서는 예루살렘과는 다른 성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으로 예루살렘 성전도 아니고 사마리아 성전도 아닌 곳에서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이야기를 하십니다.

놀라운 것은 사마리아 여인은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메시야, 곧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이 바로 내가 그 메시야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앞으로 예배드리는 장소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예배는 어디서든지 드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이제 누구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 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누구를 통해서 드린 답니까?

메시야를 통해서 드리는 것이 되는 겁니다.

메시야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과 합해서 생각해 볼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오늘 단순하게 성전에서 장사하지 말라는 경고만을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 앞으로는 이 성전의 모든 운영이 필요 없게 될 것이라는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성전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필요한 제물들이 이제는 소용없게 될 날이 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제물들을 준비해야만 합니까?

하나님 앞에 나올 때 가지고 와야만 하는 제물을 조건들은 또 얼마나 까다롭습니까?

이젠 그런 조건들이 다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성전 그 자체가 필요없어졌기 때문입니다.


히 7:24-28 “예수는 영원히 계시므로 그 제사 직분도 갈리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거니와

율법 후에 하신 맹세의 말씀은 영원히 온전케 되신 아들을 세우셨느니라”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우리의 모든 제사를 주관하는 대제사장이 되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준비해서 드려야만 할 제물도 되십니다.

사람이 세운 대제사장은 죄인인 사람의 약점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그 자신도 자신의 죄를 위해서 날마다 제물을 드려야만 합니다.

때문에 성전이 복잡하게 운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동안 성전은 날마다 피비린내가 진동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럴 필요가 전혀 없으신 분입니다.

거룩하고 악이 없는 분이십니다.

날마다 제사를 드릴 필요도 없습니다.

굳이 예루살렘 성전까지 와서 제사를 드릴 것도 아닙니다.

어디서든지 예수 이름을 의지하면 하나님은 그 제사 다 받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뭡니까?

여전히 “호산나! 호산나!”를 외치면서 예수님의 뒤를 좇는 어리석은 백성들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오늘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필요 없는 절기입니다.

종려나무를 흔들면서 예수님을 환영했던 많은 무리들이

금요일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무리들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인간적인 욕심을 채우려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결국은 예수님을 팔아먹는 어리석은 성전이 될 뿐입니다.

 

요즘도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예수님을 팔아먹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통해서 신분 상승을 꾀하고,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고, 이 땅에서의 잘되는 모습만을 요구하는

성전의 장사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그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기대를 따라서 적당하게 말씀을 포장하고 손질해서

사람들의 만족만을 꾀하려는 어리석은 모습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선포하시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14:12-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더 이상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성전은 필요없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자리에 계십니다. 

전에는 소나 양이나 염소 등의 제물을 가지고 와야만 했지만

이제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의지하고 하나님 앞에 나와야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의지하고 사는 것입니다.

오로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목적하고 사는 성도여야만 합니다.

아직도 이 땅에는 여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바라바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그 자체가 되어야만 합니다.

썩어질 욕심만 가득한 인간적인 일체의 목적을 다 내던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희생과 순종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목적이어야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가지고 나오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나무목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만 의지하고 목적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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