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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바울의 변론 2 / 행24:10-23 (신230쪽)

재판에 관한 가장 중요한 원칙은 공정성이라고 지난주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공정성에 따라서

이제 바울이 대제사장과 변사 더둘로의 송사에 관해 변론을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입니다.

 

그가 사도행전 22장에 회중들 앞에서 변론을 한 것과

그 다음 공회 앞에서 변론을 한 것을 계산하면 세 번째의 변론이지만

본격적인 재판에서의 변론은 공회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사도 바울의 오늘 변론은 전적으로

변사 더둘로가 사도 바울의 죄목이라고 언급한 것에 대한 것입니다.

요즘 식으로 표현하자면 재판에서의 피고인 진술을 하는 것입니다.

대제사장들은 자기들의 고소를 대신 말해줄 변사를 동원했는데

사도 바울은 그 고소에 대해서 자기가 직접 변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의 법률적 지식과 율법적인 실력이 어느 정도일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앙적인 평소 실력이 대단했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인 평소 실력이라는 것은 몇 해를 예수를 믿었는가에 있지 않는 것입니다.

몇 대에 걸쳐서 예수를 믿고,

또 신학적인 어떤 과정들을 거쳤는가에

신앙적인 평소 실력이 달려 있질 않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자면 그냥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영어를 수 십 년을 배운 것과 영어를 잘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영어 열풍이 그래서 우스운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영어열풍은 온통 학문적인 것뿐입니다.

학문적이라는 것은 자기 혼자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 말이라고 하는 것이 자기 혼자서 한다고 되는 것입니까?

머리에 알고 있고 책으로 배워서 알고 있다고 해서 가능한 것입니까?

 

미국의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맹활약을 했던

박찬호 선수가 한국에 와서 이야기할 때 보면 어딘가 좀 어색한 듯이 보입니다.

분명히 그는 한국 사람인데도 한국말이 서투릅니다.

그것이 단순히 미국에 오래 살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미국에 살면서 한국말을 자주 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그가 한국말을 모릅니까?

아니면 배우질 않았습니까?

다 알고 있고 이미 다 배웠습니다.

그런데 왜 한국말에 서투른 것처럼 보입니까?

 

자주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으로 미국 말을 더 많이 사용하고 한국말은 거의 사용할 기회가 없었으니까

우리 귀에 듣기에는 한국말에 서투른 것처럼 들리는 겁니다.

 

 

신앙적인 실력이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소에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법률적인 지식이나 상식, 율법을 공부한 경력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몸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삶을 살아가는 것에 능통한 것이고 익숙했던 것입니다.

때문에 이론적으로만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사는 대제사장들의 고소에 대해서

실제적으로 변론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사도 바울의 그 실제적인 변론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11-13절 “당신이 아실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올라간 지 열 이틀 밖에 못되었고

저희는 내가 성전에서 아무와 변론하는 것이나 회당과 또는 성중에서 무리를 소동케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제 나를 송사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저희가 능히 당신 앞에 내세울 것이 없나이다”

 

 

우선은

개인적으로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와서 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뭔가 한 일이 없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자기에 대해서 고소할 내용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곧 사울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들과 유대인들이 덜덜덜 떨만한 영적인 실력이

이미 사도 바울에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있어도 두려운 존재가 진짜 실력자입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음에도

인정해주는 실력자가 진짜 실력자인 것입니다.

굳이 광고를 하고 스스로 떠벌리고 다니지 않아도 되는

강한 포쓰의 실력자가 진정한 실력자입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와서 크게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아시아에서부터 사도 바울을 따라온 유대인들이 그를 먼저 공격한 것 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왜 사도 바울을 공격했습니까?

사도 바울의 실력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왜 사단이 가만히 있는 우리를 공격합니까?

사단이 우리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단으로부터 이런저런 공격을 받으면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사단도 알아주는 영적인 실력이 우리에게 이미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에 대해서 언급을 했습니다.

 

약 1: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기면서 참고 견디라고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믿음이 더욱 온전해지고

그리스도인다운 삶으로 발전을 해나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시련이 오고 시험이 오거든 참고 견디셔야만 합니다.

참기 힘들다고 느껴지면 기도하세요.

하나님 앞에 다 쏟아놓고 이야기하시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받으십니다.

우리로 온전케 해주십니다.

 

사도 바울의 삶이 그랬습니다.

때문에 그는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갔습니다.

 

 

또 하나 실제적인 사도 바울의 변명은 영적으로 그가 가진 믿음의 내용입니다.

 

14-15절 “그러나 이것을 당신께 고백하리이다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사도 바울도 다른 유대인들처럼 역시

나님을 섬기고,

성경의 말씀을 다 믿으며,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는 다는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내용은

이미 유대인들이 믿는 진리요, 복음이고 유대교 전체의 교리라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른 것은

기독교를 유대인들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것뿐이라는 겁니다.

 

여기서의 이단이라는 표현은 오늘 우리가 표현하는 이단과는 다른 뉘앙스입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같은 한 파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성경을 믿고 부활을 믿는 유대인의 한 파라고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말을 합니까?

유대교와는 질적으로 다른 종교라고 왜 말하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만약에 그렇게 주장을 한다면 사도 바울은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죽는 다는 것은

단순히 사도 바울 개인이 죽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죽음 그 이상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도 바울에게는 이방인을 위한,

특히 로마인들을 위한 선교의 사명이 이미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서 이미 죽기로 각오하고 있지만

선교의 사명을 이루기 전에는 죽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만약에 기독교가 유대교와 전혀 본질도, 뿌리도 다르다고 이야기를 한다면

그것은 곧 로마의 법에 따라서 죽는 것뿐입니다.

로마 정부가 인정하고 있는 것은 유대교이기 때문입니다.

 

딤후 1: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죽을 것 같은 고통 중에라도

결코 죽을 수 없는 것은 우리에게 맡기신 귀한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을 다하기 전까지는 결코 죽을 수 없습니다.

아니 죽이시지 않으십니다.

때문에 오늘의 형편과 처지에 관해서 너무 연연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배짱을 좀 두둑하게 가지실 필요가 있습니다.

 

 

또 하나는 사도 바울은 여전히 자기 동족 유대인들에게 대한 구원의 사명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가 비록 이방인을 위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그는 유대교에 속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구원의 열심을 여전히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롬 9:1-3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내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찌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기 동족을 구원코자 하는 마음이

기독교가 유대교와 전혀 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마음이 바로 이 마음입니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쉽지 않은 일입니다.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거 하는 것은

어쩌면 스스로 그 밑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자존심 낮춰야 하고,

체면 버려야 하고,

성질 다 죽여야만 합니다.

 

한마디로 그냥 깨갱하고 그 밑에서 낮은 채로 살아야만 합니다.

그 영혼을 구원할 때까지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바울의 변론은 결국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복음을 위한 것입니다.

자기 하나 살자고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신들에게 꾸준히 묻고 물어야만 할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이 나를 위해서 있는가?

아니면 내가 복음을 위해서 있는가?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는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자기는 복음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다는 믿음의 소신을 담대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내가 가져야만 할 자세는 무엇일까요?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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