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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설교/전병욱목사

칼럼6

현장으로 가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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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꾼들이 보이지 않는 현장으로 가라"

  지난 한 주간동안 평범한 사건들 속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꼭 붙들어야 하는 중요한 가치를 깨닫게 되었다. 아름다움과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투자하는 성도들이 되어야겠다.

1. "현장" 속에 답이 있다. - 육군사관학교 예배를 갔다. 뜨거운 기도와 헌신이 있는 곳이었다. 헌신적인 목사님들의 사역의 열매를 볼 수 있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열정과 헌신으로 1,000개의 군인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군목 제도의 한계로 인하여 250명의 군목 밖에는 없다고 한다. 그래서 750개의 교회는 목사님이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리거나, 똑같은 훈련을 받는 군종에 의해서 이끌려 간다고 한다. 교회가 파송을 하면, 얼마든지 일반 목사님들도 예배를 인도할 수 있다고 한다. 신학교마다 신학생이 남아돈다고 한다. 목사님 넘쳐난다는 신문기사를 접하게 된다. 그러나 정작 필요로 하는 곳에는 목사가 없다. 캠퍼스에서도 목사가 없다고 아우성인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다 어디로 갔는가?  자리는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다. 현장에서 역할을 감당하면, 자리가 생기는 법이다. 성도들도 현장 속에 들어가 보라. 자리의 문제가 아니라 충성의 문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신의 능력의 한계를 느끼며 더 큰 능력, 더 많은 동역자를 구하는 기도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2. "인재 양성"이 관건이다. - 오늘 저녁 예배 때는 총신대학 신입생 장학금 수여식이 있다. 1년에 4,000만원의 장학금을 전달하는 의식이 있는 날이다. 아무리 어려워도 인재를 양성하고, 후진을 키우는 일은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좋은 교회를 만들고 싶은가?  좋은 목자를 잘 양성해야 한다. 물질이 있는 곳에 우리의 관심도 있다.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증거의 도를 즐거워하였나이다"(시 119:14) 나는 이 구절을 좋아한다.  시편기자는 물질의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만큼 주의 말씀을 사모하고 즐거워한다고 표현한다. 솔직하고, 사실적인 접근이다. 그런데 그 귀한 물질을 투자하니, 그것이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 아닐까?  말이 아니라 돈이 가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이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신학생들을 위해 물질 뿐만 아니라 관심, 그리고 많은 기도가 있어야 할 것이다.  오늘 좋은 책과 함께 여러 선물을 전달하려고 한다. 성도의 기도의 선물과 사랑의 선물도 있기를 바란다.

3. "약자의 친구"가 되는 교회 - 오늘은 장애인 주일이다. 예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일이 연약한 자를 섬기는 일이다.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시 41:1)  우리가 섬기는 장애인 단체를 위한 서명 운동과 헌금을 하는 시간이 있다. 최대의 도움은 그들과 함께 사랑을 나누는 일이다. 그러나 당장의 필요를 위한 서명과 헌금에도 최선을 다해서 돕기를 바란다.  새롭게 교회 건축이 이루어지면, 꼭 장애인에 대한 배려가 있는 건물을 지어야 할 것이다.

더러움이 주는 편안함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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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움이 주는 편안함"


  대만 선교 기간 중에 대만 대학의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다. 민회은 형제의 방에서 1주일을 생활하면서 많은 생각과 잃어버렸던 새로운 감정들이 살아나고 있다.

1. 학창 시절의 부활 : 마지막으로 학생으로 공부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다시금 기숙사 생활을 해보니, 학생들의 의식과 태도에 대한 생각들이 다시금 살아나게 되었다. 우리 교회는 많은 학생들이 있다. 이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기회와  이해할 수 있는 접촉점을 찾게 된 것 같아 기쁘다. 선교 뿐만 아니라 이런 새로운 경험이 목회의 폭을 더욱 넓혀 줄 것이라고 생각된다.

2. 옛사람의 문화의 충돌 : 기숙사는 어디나 그렇지만 늦게 잠을 잔다. 나만 홀로 일찍 자려고 하니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것을 통해서 세상의 밤 문화와 싸우는 성도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면서 점차 새벽문화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조건 일찍 깨서 못 자게 만들면 그 다음날부터는 일찍 깨게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권한을 다 동원해서 새벽에 일어나게 만들라. 그리고 새벽에 만나게 만들라. 그러면 밤에는 자지 말라고 해도 잔다. 요즘 민회은은 거의 나와 같은 시간에 자고 같이 깨곤 한다.

3. 더러움이 주는 편안함 : 정말 더러웠다. 세상에 이렇게 더러운 방이 다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지나니까, 이것이 편해졌다. 인간의 타락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좋은 것을 보지 못한 사람은 항상 나쁜 것을 추구한다. 이제 기회가 되면, 민회은을 데리고 깨끗한 곳에도 많이 가야겠다.  그런데 나도 천성인지, 이런 환경이 점점 좋아지는 것은 왜 일까?

4. 예절 캠페인 : 호림가에 파송된 임유성 자매가 있다. 아시아나 승무원이다.  세련된 매너와 웃음으로 많은 사람을 전도하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은 예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모든 일꾼들과 안내하는 사람, 간사들은 모두 이 예절에 승부를 걸어야 할 것 같다. 매 주일마다 1가지씩 예절 교육을 하려고 한다. 모두 신사와 숙녀가 되도록 하자.
지각은 범죄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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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은 범죄이다!

  한국 문화의 고질적인 악습이 하나 있다. 그것은 지각이 하나의 문화로 정착했다는 사실이다. 즉 "코리안 타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심지어 예배 시간에도 적용된다. 예배의 중간에 들어오고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약속을 모르는 민족, 지각을 상습화하는 젊음에는 미래가 없다. 그러면 왜 한국 문화에서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지각하는 것인가하는 이유를 몇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VIP에 대한 전통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의 전통은 아랫사람들이 모두 모여 정렬을 한 후에, 가장 높은 사람이 들어와 착석하면 모임이 시작되곤 하였다. 그래서 늦게 오는 사람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는 것이다. 지각하는 사람의 의식 속에는 "나는 결코 아랫사람이 아니다"라는 고집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지각생을 VIP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깨어있지 못한 게으름뱅이로 여긴다. 그들에게는 문이 닫혀지고, 눈물로 호소해도 맞아들여지지 않는 버림받은 자로 묘사한다.(마25:1-13; 열처녀비유 참조) VIP 좋아하다가 값비싼 댓가를 치루게 될 것이다.

  둘째, 필요한 부분에만 참석하겠다는 태도이다. 이것은 리모콘 시대의 비극이다. 텔레비전의 필요한 부분만 돌려 보듯이 예배도 필요한 부분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이다. 나는 설교만 듣겠다, 또는 찬양만,  심지어 축도만 받겠다는 생각으로 지각한다. 예배를 부페 식사로 생각한 것이다. 이것은 예배의 본질이 "드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발상이다. 예배란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준비"가 필요하다. 예배 시작 전에 기도와 찬양으로 준비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셋째, 약속 시간이 진짜 모이는 시간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항상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시작했다는 경험의 논리이다. 내 머리가 세 자리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미리가서 바보 노릇하느냐는 생각이다. 이것은 지도자에게도 책임이 있다. 지도자는 정직하게 약속시간을 정하고, 회원들은 정당하게 시간을 지켜야 한다. 엉터리 시간을 정해놓는 것은 지도자의 범죄행위이다. 그렇다고 이것을 예상하고 지각하는 사람도 더 나을 것이 없는 공범자라 할 수 있다. 이런데 머리 쓰라고 하나님이 이성을 허락하신 것이 아니다.

  넷째, 몸에 밴 게으름이다.  특별한 생각없이 느린 몸 뒤척이다보니 늦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비난해서는 안된다. 이런 사람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동정의 대상이다. 불쌍히 여겨야 한다.  온 교회가 모여 머리에 재를 뿌리며 금식 기도해 주어야 할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식사의 즐거움에 참석시켜서는 안된다.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3:10) 이것은 개인 윤리가 아니라 공동체 윤리이다. 먹지 말라가 아니라 먹게 해서는 안된다는 외침이다.

  지각의 근거가 될만한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지각은 잘못된 전통, 교만, 잘못된 이성의 사용, 게으름에 기인한 것이다. 약속의 자녀답게 철저히 시간 지키는 성도가 되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12:11)

5%리더 vs 95% follower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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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leader vs. 95% follower"

  일본 선교가 지속되면서 많은 부분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 같다. 이 시점에서 일본 선교에 대한 몇가지를 점검해 보도록 하자.

1. 5%의 리더 : 일본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꺼이 순종하려는 자세가 있다. 보통 사람을 만나면 왜 일본이 강한가하는 의문을 품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경솔한 판단이다. 일본은 5%의 리더가 95%의 추종자들을 이끌어 간다.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5%의 리더를 이해해야 한다. 과연 한 사회에 리더가 많아야 하는가는 검토해 봐야 할 문제이다. 미국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보통 시민으로 살아간다. 단 5%의 리더가 나라를 이끌어 가는 것이다. 우리의 약점이자 장점은 모두가 리더가 되려고 한다는 점에 있다. 리더는 중요하다. 그러나 랄로워도 중요하다. 그리고 리더의 자질이 없는 사람이 모두 리더가 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다.  또한 리더가 세워졌을 때, 따르지 않는 것도 문제이다. 섬기고, 순종하는 훈련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2. 한 팀 12명의 효율 : 대규모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것은 일본선교에 맞지 않는다. 교통비도 무척 많이 들고, 움직이는 시간도 만만치 않다.  40명이상이 움직이면 작은 일본 교회는 위압감에 사로잡힌다. 그런데 12명 정도되는 대원이 움직이니까, 섬기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리고 위압적이지 않고, 서로 친근감있는 관계가 형성된다.  보통 승용차 3대만 동원하면, 전체가 움직일 수 있다. 일본선교에 있어서는 12명의 한계를 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3. 게릴라식 전도 : 다른 선교와는 달리 일본 사람들은 한 자리에 오랜 시간 머무르지 않는다. 모두 바쁜 사람들이다. 이들에게 큰 규모의 회중 집회보다는 5명 이내의 작은 규모의 전도가 중요하다. 5명 모이면, 전하고 다시 보낸다. 이것을 반복하다 보니, 저녁 집회에 많은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또한 대학 캠퍼스 안에서는 일본어보다는 영어로 증거할 때, 더 친근하게 복음을 받아들인다.  일본 선교도 영어는 중요하다.

4. 논리적 설교 : 아가페 교회에서 7번의 설교를 했다. 팔복의 말씀을 증거했다. 논리적인 설교, 체계적인 설교를 일본 사람들은 매우 만족해 했다. 그리고 실제로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동시에 설교 이후에 안수기도를 했다. 그때 그들 속에 숨겨진 아픔이 터져 나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물과 함께 자복하고, 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인 대상 설교에 대한 많은 노하우를 쌓게된 선교가 되기도 하였다. 어디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다. 복음으로 인한 변화에 더 집중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더 큰 열매를 얻게 될 것이다.

영적전진을 막는 세가지 함정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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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퉁이돌 원고 41- 2002.1.6

                      "영적 전진을 막는 세가지 함정"


  살아있는 것은 성장이 있다. 살이있는 교회, 살아있는 성도는 반드시 성장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영적 성장을 가로막는 마귀의 함정이 있다. 그것은 세가지 정도로 분석할 수 있다.
 
1. 마귀의 함정1 -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태도이다.
  꿈을 말하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꿈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이다. 마귀는 항상 이런 탁상공론으로 이끌어 간다. 이것은 함정이다. 꿈을 붙들고 철저한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 영성이 흐릴 때의 특징은 무엇인가? 항상 준비가 없는 것이다. 매사에 당황해한다. 기록이 없다.
아이디어와 준비는 사랑과 비례한다.. 사랑이 없으면, 기억나지 않는다. 사랑이 없으면,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소인배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기 이익에 관한 문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이익을 얻을 아이디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대의를 위한 아이디어와 준비는 전혀 없다.  그러면서 외치는 것은 하나님은 약한 자를 쓰신다는 것이다. 이 말을 하나님이 불순종한 자를 쓰신다는 말이 아니다. 1달란트를 땅에 묻은 자를 쓰신다는 말인가? 아니다. 이것은 세상에서 강하고 더 많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준비없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준비없이 부름받을 수 있다.그러나 성령의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철저하게 준비한다.

2. 마귀의 함정2 - 바리새인의 형식주의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은 영향력을 의미한다.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세상에 의해 변화가 되면 되는가? 교회는 세상의 세력을 막는 싸움을 벌이는 곳이 아니다. 내적인 충만을 추구하는 곳이다. 즉 삼투압의 싸움이다. 수돗물에 구정물이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적 수압이 강하기 때문이다. 수압이 없으면, 아무리 틈을 막아도 더러운 물이 들어온다. 세속의 힘을 이기는 길은 강한 내적 무장이다. 외식은 형식주의이다. 겉만 꾸민다. 속에 대한 관심이 없다. 본질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꾸미지 말라. 진짜에 신경쓰라. 정말 변화되었는가? 무엇에 익숙한가? 찬송과 예배 형식이 아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에 집중해야 한다.

3. 마귀의 함정3 - 사두개인의 물질주의이다. 사두개인은 겉으로는 거룩을 가장한다. 그러나 가장 관심은 물질, 돈이다. 현실주의적인 사람들이다.  성전에서 장사하게 하고, 그 중에서 돈을 뜯어내는 자들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돈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그러면 돈으로부터의 자유로운 길은 무엇인가?  십일조 생활이다. 철저한 십일조를 하는 사람치고 물질의 노예가 되는 경우는 없다. 십일조는 절대로 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한다. 돈을 멸시하라. 절대로 돈이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 돈이 지배하려고 하면, 박대해 버리면 된다. 구제하라.  그러면 절대로 돈에 매이지 않는다.

바쁜사람에게 일하나 더 시키라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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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컬럼(36).2001.12.2
                    "바쁜 사람에게 일 하나 더 시키라."

  이곳은 LA의 글렌데일의 "Best Western"이라는 사랑의 빛 선교교회 집사님이 운영하시는 호텔이다. 시차 때문에 미국에 오면, 새벽에 일어나기가 쉬워진다. 새벽기도회를 앞두고 짧게 떠오르는 단상들을 삼일의 성도들과 나누었으면 한다.

1. 바쁜 사람에게 일 하나 더 시키라 : 흔히 남에게 부탁을 할 때, 한가한 사람보다는 바쁜 사람에게 부탁하라고 한다. 대개 바쁜 사람이 그 부탁을 들어줄 가능성이 크다는 삶의 경험 법칙일 것이다. 왜 그런가?  책이 출판되면, 과거에는 몇 권 정도는 주변의 가까이 보낸 분들에게 선물을 할 때가 있었다. 그때마다 느끼는 것은 너무 바쁠 것 같은 분들일수록 감사하다는 메일이나 전화를 주시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다. 오히려 한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바쁘게 사는 분일수록 시간을 활용하는 요령을 터득하게 되었고, 미루지 않는 부지런함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졌다고들 말한다. 이 말은 맞으면서도 틀린 것이다. 왜? 그 시간을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천차만별의 모습을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정신의 문제요 자세의 문제인 것이다.

2. 아침 시간의 섬세함 : 똑같이 주어진 24시간을 잘 활용하는 길은 무엇인가? 종종 큰 딸을 학교까지 태워다 준다. 차를 태워주지 않으면 마을 버스를 탄다. 그런데 대개 시간에 맞추어서 분주하게 아침을 보내곤 한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8시 30분 마을 버스를 타야 한다. 조금 늦으면 8시 36분이 마지노이다. 이 차까지 놓치면 지각이다.  "아빠 빨리해, 1분밖에 안남았어!" 초등학교 4학년의 입에서 분에 대한 개념의 말이 흘러나온다.  아침은 어린아이에게조차도 분단위로 반응하는 시간이다. 반면에 밤은 어떤가?  "8시 30분에서 40분까지 안부 전화를 걸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대개 밤에 전화하면 되지라고 생각한다. 긴장감이 떨어진다. 이 말은 밤시간은 쉽게 낭비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텔리비전 앞에 앉아서 1-2시간 보내는 것은 다반사인 것이다.

3. 밤시간을 줄인다. : 결국 시간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밤시간은 줄이고, 새벽시간은 늘이는 수 밖에 없다. 나는 보통 새벽 3시에 깬다. 버릇들이기 나름이다. 대개 12시까지는 책과 기도하는 일에 보낸다. 9시간의 시간은 엄청난 시간이다. 이 시간이 나의 사역의 비밀이 다 담겨져 있는 시간이다. 밤은 될 수 있으면 빨리 자는 것이 성공하는 길이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만큼 인생의 성공 가능성은 커진다.  아침에는 짧은 시간에도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생산성으로 말한다면, 새벽의 생산성만큼 큰 것도 없다.  12월3일부터 1달 동안 특별새벽기도회이다. 새벽을 통해서 부르짖는 기도의 용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인생을 망치는 잘못된 시간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일찍 자면 흥하고, 늦게 자면 망한다."  만고의 진리이다.
잡초인생의 역전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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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컬럼(35).2001.11.25
                    "잡초 인생의 역전"

1. 목포 집회 : 목포 크리스천 아카데미 주최의 목포 청년 집회가 있었다. 기독교 전래 100년이 넘는 전통이 말해주듯, 목포는 뜨거웠다. 부흥의 잠재력이 무한한 지역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제 불은 붙었으나 바람이 불면 된다. 성령의 바람이 부는 목포 선교가 되도록 기도하자. 유달산에 오르니 "목포의 눈물"이라는 노래비가 있었다. 이제는 복음으로 "목포의 기쁨"을 노래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 선교가 "목포의 기쁨, 통영의 감격"이 되도록 하자.

2. 영광교회 헌당 : 성도들의 헌금으로 군인교회인 영광교회의 헌당이 있었다. 작은 힘들이 모이면, 엄청난 일을 이룰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모기도 모이면 천둥소리를 낸다고 하지 않는가? 모이는 힘은 무서운 것이다. 모인 힘들을 건설적인 곳에 계속해서 사용하는 삼일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3. 잡초인생의 역전 : 요즘 축구 이야기로 잔잔한 감동이 흘러나온다. FA 컵 대회가 있는데, 프로와 아마가 모두 참여하는 경기이다. 그런데 막강한 프로팀들을 차례로 꺽고 8강까지 올라온 팀이 있다. 그 팀이 한국 철도이다.  1년 예산이 5억이고, 인건비 빼면 7천만원으로 운영하는 팀이다. 축구화도 다른 팀은 30만원짜리를 신는데, 이들은 4만원짜리를 신는다.(나도 이것을 신는다) 그리고 시장표 운동복으로 만족한다. 그런데도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부상과 버림으로 축구판을 떠나야했던 불우한 선수들이 모였기 때문이다. 신판 공포의 외인구단인 셈이다. 그리고 이현창 감독의 카리스마있는 지도력도 한몫했다고 한다. 자신이 직접 음식을 만들어서 선수들을 먹이면서, 그들의 헌신적인 모습을 끌어낸 명장인 것이다. 진제도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한국철도의 잡초인생의 역전이다. 모든 것이 다 부족하다. 부족을 탓하기 보다는 연약한 조건에서 승리를 이끌어내는 기적을 창출해야 할 것이다. 골리앗을 물리치는 다윗을 각진에서도 보여주기를 소망한다.

동역이란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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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컬럼(34).2001.11.18
                    "동역이란 가치를 공유하는 것이다."

1. 진체제 출범의 의의 : 이제 교회가 10개의 진으로 나누어져서 출범하게 된다. 진체제는 단기적으로 볼 때는 오히려 교인들이 줄어들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왜?  숨어 있거나, 방관하거나, 헌신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을 곳이 점차 없어지기 때문이다. 교회는 건강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거품 성장이 아니라 헌신된 제자로서의 성장이 필요한 일이다. 아픔이 있더라도 옳은 길, 건강한 길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중고등부의부흥 :  실제적으로 진체제가 강조하는 것은 중고등부의 부흥이다.  또래집단이 모였을 때, 서로에게 줄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가 거의 없었다. 이제는 청년과 장년과 같이 교육함으로 말미암아 그 뜨거운 신앙을 전수하는 일이 필요한 때가 되었다. 장년들이 자신의 안일로 청년을 놓쳤듯이, 청년들도 안일에 빠져서 청소년을 놓칠 수 있다. 진체제는 희생을 요구하는 체제이다. 자기 문화보다 성장세대를 살리기 위해서 그들의 문화를 붙드는 것을 의미한다.  일년 이후에는 중고등부가 1,000명이상으로 성장된 모습으로 서있기를 기대한다.

3. 기도하는 교회 : 교회는 기도하는 모임이다. 예수님도 "내 아버지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다. 교회는 기도할 때 영광이 임한다. 소위 지도자들이 있다. 그들이 공유된 가치를 지지하지 않으면 힘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된다. 교역자, 간사, 리더 들은 삼일교회의 공유된 가치가 새벽기도라는 점을 인식하고, 이 가치에 동참할 수 없을 때에는 리더십을 포기하기를 바란다. 가치 공유가 없이는 팔로워는 되어도 리더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4. 특별새벽기도회 : "기도하는 한 사람이 기도없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는 주제로 7차 특별새벽기도회가 열린다. 이것이 진의 부흥과 능력을 배가하는 귀중한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불길은 위로 올라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옆으로 퍼지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게 될 것이다.

오래 웅크린 새가 높이 날수 있다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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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 웅크린 새가 높이 날 수 있다."

  추석 연휴로 말미암아 지나치게 오래 쉰 것 같다. 명절 이후에 감당해야 할 많은 사명들이 기다리고 있다. 오래 웅크렸다. 그러나 오래 웅크린 새가 높이 날 수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높이 날아 오르는 가을이 되기를 바란다.

1. 신간 출간 : 금주에 초신자들을 위한 성경적 판단의 기준을 알려주는 "하나님의 사람의 선명한 기준"이라는 소책자가 출간된다.  기준이 없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확실한 기준은 성경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실제의 기준들을 붙드는 책이다.  18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짧은 책이다. 아마도 1시간이면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주변의 연약한 신자들이나, 초신자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리고 책은 서점에서 정가를 주고 사도록 하자. 서점이 살아야, 기독 출판이 살아남는다.

2. 윤형주 장로님의 찬양 : 저녁 예배 때는 윤형주 장로님의 찬양과 간증의 시간이 있다. 한 사람의 일평생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도 귀중한 교훈이 될 수 있다.

3. 축복은 피흘림이다 : 10월 14일 주일에는 전 교인 헌혈이 있다. 많은 청년들이 모인 교회이고, 우리는 피가 깨끗하지 않은가?  술을 하는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는 것도 아니고, 마약을 하는 것도 아닌 경건한 자들의 피를 기다리고 있다. 축복은 피흘림이라는 것을 알고, 다음 주에는 목욕하고 오기를 바란다. 적어도 팔뚝은 깨끗이 씻고 오기를!

4. 겨울 선교의 확정 : 진제도로 개편 이후에 첫 번째로 겨울 선교를 떠나게 된다. 아마도 통영과 목포 그리고 강원도 동해가 선교지가 될 것 같다. 잘 준비된 선교가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 준비 위원장을 중심으로 체계를 잡아가는 주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5. 필리핀 마닐라 청년 집회 : 한 주간 동안 필리핀 마닐라를 간다. 마닐라에만 1만명의 청년들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영혼에 불을 붙이는 집회를 계획하고 있다. 이 사역에 하나님의 흘러넘치는 은헤가 임하도록 기도해 주기를 바란다.

6. 방송선교 : 10월부터 극동방송과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설교와 컬럼이 나가게 된다. 방송을 통한 선교에도 잘 섬길 수 있는 교회가 되도록 기도하여야겠다.  전파가 닿는 곳에 영혼의 회복이 있기를!

보수냐 진보냐 전병욱목사 칼럼

2006.09.15.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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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보수를 지지하나, 진보를 지지하나?"

  최근 사회의 전 분야에서 보수, 진보 논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정치권에서부터 시작된 논쟁이 다른 사회 분야까지도 파급되는 현상이라고 생각된다. 사회 통합이라는 가치도 매우 중요한 가치인데, 이런 분열이 유익한 영향보다 손실을 주는 쪽으로 가는 것 같아 안타깝다.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을 그냥 "보수"라고 부르지 않고, "수구 반동"이라는 비하하는 표현으로 공격하고 있다. 반면에 보수주의자들은 진보주의자들을 "급진 좌파" "사회 선동세력"이라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적당히 양비론으로 나가는 것이 최상의 길인가?  그것은 성도의 길이 아니다.
  이 논쟁에서 성도들이 붙들어야할 가장 중요한 핵심은 "이상으로 여기는 목적"을 점검하는 일이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가 원하는 곳, 우리가 원하는 이상"인가?  이것은 논쟁의 문제가 아니라 일종의 가치관이요 신념이요 믿음이다. 이것은 어떤 전제를 가지고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는 공리이다.

  우리는 모두 "진보"를 원한다. 딤전 4:15을 보면,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진보란 "우리가 가고자 하는 곳에 점점 더 가까이 간다"는 뜻이다. 진보란 더 멀리 간다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이상과 목표"로 더 가까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C.S.Lewis)
  그러므로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기에 앞서서 우리가 원하는 이상이 무엇인가를 확인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말씀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상으로 삼을 수도 있고, 인본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인본주의적 유토피아를 이상으로 삼을 수도 있다. 만약 성경이 말하는 말씀이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상으로 삼는다면, 진보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구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유일성, 예배의 중요성 등을 이상으로 여긴다면,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진보요,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보수주의자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들은 말씀을 보수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진보주의자가 되어야 한다.  반대로 말씀을 저버리면서 멀리간다라는 의미의 진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배교요 진리를 떠난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이교일 뿐이다. 말씀이라는 차원에서는 성도는 언제나 보수주의자이다.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는 버려야 할 옛 구습들이 있다. 현실에는 뛰어들지 않고, 뒤에서 비난하는 악습, 약속을 지키지 않는 모습, 불합리한 관행 등은 기꺼이 버려야 한다. 비합리에서 합리로, 몰상식에서 상식으로, 이기주의에서 희생의 모습으로, 미숙에서 성숙으로 나가는 것은 진정한 진보라 할 수 있다. 전통,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불합리한 것들을 붙들고 있으면서 보수라고 말하는 것은 반성경적인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신교의 이념은 개혁주의이다. 개혁주의란 날마다 이런 비합리적, 비성경적인 부분들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인들은 본질상 진보주의자일 수 밖에 없다. 비합리를 개혁한다는 의미에서 성도는 언제나 진보주의자이다.

  결국 보수니 진보니 하는 싸움의 핵심은 무엇을 최종 가치로 여기는가 하는 것에 달려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유일성을 부인하는 종교 다원주의나 포스트 모던 신학 류의 접근은 아무리 달콤한 말을 한다고 할지라도 진보가 될 수 없고, 그것은 배교요 변질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면에 아무리 성경의 말씀을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자신의 불합리를 변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된다면 그것은 보수가 아니라 말씀을 팔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던 바리새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문제의 핵심은 이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는가?  무엇이 주님의 기쁨이 되는가?  이 질문을 가지고 말씀 앞에 서있을 때에만 성도는 진실해 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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