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 (마2:1-12)
1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2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3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4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5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7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8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에 있는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곧 왕의 자손으로 오셨음을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은 동방 박사들의 입을 통해서 예수님이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셨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1:11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예수님은 태어나실 장소도 마땅한 곳이 없으셔서 마구간의 구유에 누우셔야만 했습니다. 눅2:7입니다.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舍館)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해서, 예수님의 왕 되심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눅19:37-40 말씀입니다.
37 이미 감람 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만일 제자들이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면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하며 경배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루살렘이 잠잠했기 때문에, 온 유대 땅이 잠잠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방인들이었던 동방의 박사들로 하여금 왕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을 경배하게 하시고, 왕으로 탄생하신 예수님에게 귀한 예물을 바치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오늘날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라도 소리를 지르도록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도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합시다. 우리의 보배합을 열어서 귀한 예물을 드립시다. 예수님은 우리를 은혜로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시며,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실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집니다. 전반부는 1절 말씀부터 8절 말씀까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후반부는 9절 말씀부터 12절 말씀까지입니다. 베들레헴에서 되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은 전반부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고, 다음 주일에는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전반부의 말씀을 다음과 같이 세 대지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동방 박사들의 도착입니다(the Arrival of the Magi, 1-2절).
둘째, 헤롯 왕의 소동입니다(the Agitation of Herod, 3-6절).
셋째, 헤롯 왕의 연기입니다(the Acting of Herod, 7-8절).
그 옛날 예수님의 별이 동방 박사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우리 모두에게 환하게 비추기를 소원합니다. 그리함으로서 우리 모두가 빛난 진리 가운데로, 은혜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동방 박사들의 도착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Arrival of the Magi, 1-2절).
오늘 본문 1절 말씀입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세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밝히고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탄생하신 때는 헤롯 왕 때였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유대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셋째, 그 때에 있었던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은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으로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차례대로 간단하게 살펴보겠습니다.
(1) 헤롯 왕(Herod the King)
헤롯 왕에 대한 정보는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38~100경)가 쓴 『유대 전쟁사, The Jewish War』(75~79)와 『유대 고대사, The Antiquities of the Jews)』(93)에 많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묘사되고 있는 헤롯 왕의 인물됨은 3C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능하고(capable), 교활했으며(crafty), 아울러 잔인했습니다(cruel).
헤롯의 아버지는 에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의 말로 표현하면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순수한 유대인이 아니었던 헤롯이 유대 땅을 다스리는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만큼 인간적으로는 유능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 왕은 일명 헤롯 대왕(Herod the Great)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헤롯은 자기를 싫어하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솔로몬이 건축한 성전을 제 1성전, 포로 후에 스룹바벨이 재건한 성전을 제 2성전, 그 뒤에 헤롯 왕이 다시 재건한 성전을 제 3성전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헤롯은 유능했지만 몹시도 교활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정치적 술수와 음모에 능한 자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도 그의 교활한 모습을 충분히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아기 예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동방 박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들에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 본문 8절입니다.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얼마나 위선적입니까? 그는 자기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교활하게도 경건을 가장했던 것입니다.
헤롯은 또한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마2:16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는 그가 얼마나 잔인한 인물인지 그 한 가지 실례를 볼 수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 얼마나 잔인한 짓입니까? 그는 자신의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 자기의 아내, 처남, 장모, 심지어는 자기의 아들들까지도 서슴지 않고 죽였던 사람이었습니다. 헤롯의 잔인함의 극치는 그가 죽기 얼마 전에 내렸던 명령에서 지극히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의 부하들에게 예루살렘의 저명한 인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죽을 때에 그들도 함께 처형하라고 명했습니다. 자기가 죽으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들을 함께 죽도록 만들어서 예루살렘에 큰 슬픔이 있도록 만들겠다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심보였던 것입니다. 바로 이처럼 잔인한 헤롯 왕 때에, 예수님은 유대인의 새롭고도 진정한 왕으로 탄생하셨습니다.
(2) 유대 베들레헴(Bethlehem of Judea)
유대 베들레헴은 예루살렘에서 남쪽으로 약 8km, 곧 20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입니다. 이곳의 또 다른 이름은 에브랏입니다. 창35:19입니다.
“라헬이 죽으매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되었고.”
베들레헴에는 야곱의 아내 라헬의 무덤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룻기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룻이 보아스를 만나서 결혼을 했던 곳이 바로 이 베들레헴이었습니다. 바로 이 베들레헴에서 그들의 후손인 다윗이 태어나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베들레헴은 일명 “다윗의 동네”라고 불렸습니다. 눅2:4 그리고 눅2:11입니다.
눅2: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눅2:11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예수님이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구약에 예언된 말씀의 성취였습니다. 오늘 본문 5-6절 말씀입니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님은 헤롯 왕의 박해를 피해서 애굽으로 가셨습니다. 이것도 역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마2:14-15입니다.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 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헤롯 왕이 죽고 난 뒤에 예수님은 나사렛에 와서 정착하셨습니다. 이 또한 예언의 성취였습니다. 마2:23입니다.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예언된 대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의 말뜻은 “떡 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요6:35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떡 집” 곧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생명의 떡”이십니다.
(3) 동방 박사(Magi from the East)
우리는 동방 박사들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느 나라 사람들이며, 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이며, 그들의 이름은 무엇이고, 그들은 몇 명이나 왔는지에 대해서 전연 알지를 못합니다. 또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타고 왔으며, 그들이 어떤 옷을 입었었는지, 그들이 어떤 길로 왔는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들에 대해서 그저 간략하게 이처럼 기술하고 있을 뿐입니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이것이 그들에 대한 설명의 전부일 뿐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그들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을까요? 성탄의 주인공은 동방 박사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오직 한 분, 곧 예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오늘 본문에 나타난 정보들을 중심으로 동방 박사들에 대해서 몇 가지 사항만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은 그들을 박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니엘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바벨론에는 박사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하는 역할은 왕을 자문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번은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지 못한 연고로 다 죽게 되었습니다. 단2:12-13 말씀입니다.
“왕이 이로 인하여 진노하고 통분하여 바벨론 모든 박사를 다 멸하라 명하니라 왕의 명령이 내리매 박사들은 죽게 되었고 다니엘과 그 동무도 죽이려고 찾았더라.”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다니엘이 왕의 꿈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 다니엘은 박사들의 어른, 곧 박사장이 되었습니다. 단2:48입니다.
“왕이 이에 다니엘을 높여 귀한 선물을 많이 주며 세워 바벨론 모든 박사의 어른을 삼았으며.”
바벨론이 멸망하고 바사 제국이 들어섰을 때도 박사들은 여전히 존재했습니다. 예컨대 에1:13입니다.
“왕이 사례를 아는 박사들에게 묻되 (왕이 규례와 법률을 아는 자에게 묻는 전례가 있는데.”
바사 왕 아하수에로는 왕명을 거역한 왕후 와스디의 일로 인해서 박사들의 자문을 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이들 박사들은 바벨론 시대나 그 뒤의 바사 시대에 와서도 왕의 참모 역할을 하면서 그 나라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바벨론 시대 때, 자기들의 어른이 된 다니엘을 통해서 메시야에 대한 가르침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 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던 많은 유대인들은 바사 왕 고레스 때에 유대 땅으로 되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고 바사 땅에 그대로 남아서 사는 유대인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들 유대인들을 통해서, 그 땅의 박사들은 또한 메시야 사상을 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들 박사들 가운데 몇몇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 1절 끝에 나오는 동사 “말하되”의 시제는 미완료형입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말하고 또 말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이 말한 내용은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다윗의 자손”이 메시야의 별명인 것처럼,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의 왕”이 메시야의 별명이었습니다. 그러기에 헤롯은 오늘 본문 4절에서 동방 박사들이 말한 “유대인의 왕”을 그리스도 곧 메시야와 동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왕도인 예루살렘으로 오면 당연히 그곳의 사람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 지를 다 알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의외로 왕도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아무도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보는 자기들이 만나는 사람마다 계속해서 묻고 또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의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고 있는데, 동방의 박사들은 어떻게 해서 메시야의 탄생을 알았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들이 동방에서 그의 별, 곧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 별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4) 그의 별(His Star)
동방 박사들이 보았던 별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어왔습니다. 헬리 혜성의 출현, 목성과 토성의 대결합, 또는 그 때 특별하게 나타난 새 별 등등 다양한 견해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별의 정체에 대해서 눅2:8-9 말씀에서 성경적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눅2:8-9입니다.
“그 지경에 목자들이 밖에서 밤에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한 한 징조로서 주의 영광이 나타나 그들을 환하게 비췄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동방 박사들에게도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기 위한 한 징조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해서 광야를 지나갈 때를 생각해 봅시다. 그 때 하나님의 영광은 낮에는 구름 기둥이 되고, 밤에는 불 기둥이 되어 그들을 앞서 가시면서 그들의 발걸음을 인도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제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의 빛난 별처럼 밝게 비추면서 동방 박사들을 앞서 가시면서 그들의 발걸음을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면,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징조는 무엇입니까? 마24:30 말씀입니다.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예수님의 재림을 알리는 징조도 역시 큰 영광, 곧 하나님의 빛나는 영광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러한 의문이 생길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로서 하늘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다면, 왜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했느냐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았을 때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출14:19-20입니다.
“이스라엘 진 앞에 행하던 하나님의 사자가 옮겨 그 뒤로 행하매 구름 기둥도 앞에서 그 뒤로 옮겨 애굽 진과 이스라엘 진 사이에 이르러 서니 저 편은 구름과 흑암이 있고 이 편은 밤이 광명하므로 밤새도록 저 편이 이 편에 가까이 못하였더라.”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이루어진 구름 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광명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구름 기둥이 애굽 사람들에는 흑암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동방 박사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환하게 보였지만, 그 외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전연 보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구름 기둥과 불 기둥의 인도함을 받았던 것처럼, 또한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 박사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인 별의 인도함을 받았던 것처럼, 우리들도 날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의 인도함을 받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우리의 삶 속에 늘 환하게 비추어서, 날마다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가는 축복된 삶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둘째로, 헤롯 왕의 소동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Agitation of Herod, 3-6절).
오늘 본문 3절 말씀입니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동방 박사들이 보여준 태도와 헤롯 왕이 보여준 태도는 정반대였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이신 예수님이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고서 너무 기뻐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귀한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기 위해서 그 먼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헤롯 왕의 반응은 전연 달랐습니다. 그는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왔다는 사실과 그들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묻고 다니는 질문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그러할 때 헤롯이 보였던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는 소동했습니다. 동요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소동한 것은 자기의 왕위가 위태롭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서 왔을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는 순수한 유대인이 아닌 이두매 사람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로마의 통치도, 헤롯 왕의 통치도 원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을 바랐습니다. 그래서 열심당에 속하는 사람들은 틈만 있으면 무력을 써서라도 나라의 독립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 동방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의 새 왕이 탄생했다고 여기 저기 소문을 내면서 다니니까, 헤롯 왕으로서는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왕위가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는 위기 의식을 느끼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동방 박사들의 출현으로 인해서 소동을 한 것은 헤롯 왕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함께 온 예루살렘도 더불어 소동을 했습니다. 물론 그 당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몹시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컨대 눅3:15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의논하니.”
그리스도를 기다린 것은 유대인들뿐만 아니었습니다. 인근의 사마리아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4:25입니다.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이는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살던 여인이 예수님에게 했던 말입니다. 이처럼 그 당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사람들이 동방 박사들에게서 드디어 그리스도가 탄생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그들이 마땅히 보여주어야 할 반응은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들도 동방 박사들처럼 기쁨이 충만하여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찾아가 경배를 드려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롯 왕과 더불어 함께 소동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예루살렘 사람들은 그 동안 헤롯 왕이 자기의 왕위를 지키기 위해서 어떠한 짓을 해왔는지 익히 보아왔습니다. 헤롯 왕은 자기의 왕위에 위협을 느낄 경우에는 그 누구라도 가차없이 죽여버릴 만큼 잔인한 인물이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사람들은 헤롯 왕이 동방 박사들의 출현으로 인해서 소동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뒤에 따라오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머지않아 헤롯 왕에 의해서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사실을 예루살렘 사람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도 덩달아 두려움에 떨면서 소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루살렘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헤롯 왕을 두려워하면서, 그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러더니 그들은 결국에 가서 어떻게 하고 말았습니까? 요19:14-15입니다.
“이 날은 유월절의 예비일이요 때는 제육시라 빌라도가 유대인들에게 이르되 보라 너희 왕이로다 저희가 소리지르되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빌라도가 가로되 내가 너희 왕을 십자가에 못 박으랴 대제사장들이 대답하되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하니.”
이 세상 왕의 환심을 사기에 급급했던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그 곳의 유대인들은 결국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서 보내신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무슨 일에든지 늘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힘있게 전적으로 의지하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는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소동하거나 요동하지 않고, 항상 하나님 안에서의 평안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4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헤롯 왕은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었습니다. 헤롯 왕이 그들을 소집한 목적은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는지를 물어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요7:40-42입니다.
40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혹은 이가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1 혹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이처럼 그리스도는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에서 탄생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일반적으로도 널리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헤롯 왕은 성경의 전문가들인 종교지도자들에게서 분명하고도 공식적인 답변을 듣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헤롯 왕이 물었던 질문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소집한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그러니까 헤롯 왕은 동방 박사들이 말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는 바로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방 박사들도 헤롯 왕도 똑같이 그리스도가 나신 곳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전연 달랐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그리스도께 경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가 나신 곳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서 그가 난 곳을 알고자 했던 것입니다.
헤롯이 소집한 종교지도자들은 전문가답게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헤롯이 원하는 바를 알려주었습니다. 오늘 본문 5절입니다.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그들은 그리스도가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도록 되어 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제로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분명 저들은 얼마 전에 들에서 양떼를 지키던 목자들이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께 경배했다는 놀라운 소문도 들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지금 동방 박사들이 와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고 있다면, 마땅히 그들은 여기에 관심을 가지고 베들레헴으로 달려가야 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무관심했던 그들은 결국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들은 뒤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이는 일에 앞장을 섰던 장본인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6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는 구약성경 미5:2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 6절 말씀과 미5:2 말씀을 서로 비교해보면 똑같지는 않고 다소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우리는 여기서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태는 성령님의 감동하심에 따라서 구약성경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인용하지 않고 자유롭게 인용을 했습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 6절 끝에 나오는 말씀, 곧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하는 말씀은 미5:2에서 인용한 것이 아니라, 삼하5:2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전일 곧 사울이 우리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이스라엘을 거느려 출입하게 한 자는 왕이시었고 여호와께서도 왕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 하셨나이다 하니라.”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다윗 왕에게 그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삼하5:2에 있는 이 말씀을 인용하고 있는 마태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마태는 헤롯 왕과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은연중에 비교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 진정한 왕입니까? 헤롯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참 되신 왕이십니다. 헤롯 왕은 교활하고 잔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은혜로 그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는 그 백성을 지키시며, 그 백성을 푸른 초장으로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마태는 바로 이 점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미5:2의 말씀에 삼하5:2의 말씀을 더해서 자유롭게 구약성경의 말씀을 인용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그의 목자이신 하나님이 그에게 베푸셨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노래한 내용을 이 시간 다시 한번 묵상해보십시다.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2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6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이 아름다운 다윗의 고백이 이 시간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헤롯 왕의 연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Acting of Herod, 7-8절).
오늘 본문 7절 말씀입니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헤롯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시도록 되어 있던 곳이 유대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리스도가 태어난 때였습니다. 그리스도가 태어난 장소와 때, 이 두 가지만 알면 헤롯은 자기가 뜻하는 바, 곧 그리스도를 죽이는 일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 박사들을 그에게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가 박사들을 부르되 “가만히” 불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엇인가 떳떳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헤롯에게는 숨은 의도가 따로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헤롯은 박사들을 죽여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에 대한 정보가 다 사라져버립니다. 또 동방의 박사들은 나름대로 그들의 나라에서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들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을 죽인다는 것은 그들의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사실도 헤롯은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동방 박사들을 가만히 자기에게로 불렀습니다. 아마도 그는 큰 연회를 베풀면서 그들을 환대했을 것입니다. 헤롯은 짐짓 그들이 보았던 별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척하면서, 그들에게 그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하게 물어보았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은 동방 박사들의 답변을 기록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마2:16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동방의 박사들이 아무리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하더라도 그들도 역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는 없었습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외모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헤롯의 교활한 연기에 속아서 자기들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다 알려주었을 것입니다. 헤롯은 박사들이 자기가 뜻하는 대로 잘도 속아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동방 박사들을 철석같이 믿고서 그들을 그대로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헤롯은 그들에게 아무도 딸려보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헤롯은 자기 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동방 박사들을 속이려 했던 헤롯은 결과적으로 오히려 그 자신이 속고 말았습니다. 헤롯은 자기가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의 눈은 결코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 8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헤롯은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그들에게 두 가지 임무를 맡겼습니다. 그 첫째는 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아기의 이름은 무엇이며, 그 아기의 부모는 누구이고, 그 아기는 생후 몇 개월이 되었으며, 지금 그 아기가 어느 집에 있는지 등등을 자세히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그 둘째는 그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로 다시 되돌아와서 자기에게 그 내용을 보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헤롯은 박사들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그들에게 허울좋은 구실을 대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리스도로 탄생한 아기에게 가서 경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는 동방 박사들의 진정한 경배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습니다. 헤롯의 경배는 경건을 가장한 그의 위선적 연기에서 나오는 거짓 경배에 불과했습니다. 이러한 거짓 경배는 로마의 군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보여준 태도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마27:27-31 말씀입니다.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관련하여 세 종류의 다른 반응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그 이후의 역사 속에서도 계속 반복되는 현상입니다.
첫째, 헤롯처럼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둘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처럼 예수님에게 무관심한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셋째,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경배하는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경우 가운데 어디에 해당합니까? 물론 여기 있는 우리 가운데는 헤롯처럼 예수님에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줄 압니다. 그러나 행여 우리가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종교인들처럼 우리를 찾아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무감동하고, 무관심하지는 않습니까? 그들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다는 사실을 명십합시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을 우리의 왕으로 경배하기를 진정으로 원합니까?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께 드리기 위해서 우리의 보배합을 활짝 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 시간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게 자문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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