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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2:9-12)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마2:9-12)

 


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0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2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아기 예수님은 요셉과 마리아의 가정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본시 갈릴리 나사렛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태어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예수님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탄생하시지 않고, 유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을까요? 그렇게 된 배경이 눅2:1-7 말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이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 되었을 때에 첫번 한 것이라

3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인고로 갈릴리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 그 정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되었더라

6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 맏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그 당시 유대 나라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황제 아구스도는 로마의 통치를 받고 있는 모든 나라의 백성들에게 호적을 하도록 명했습니다. 그 목적은 세금을 징수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도 각기 자기 족속으로 되돌아가서 호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과 마리아는 “다윗의 동네”인 유대 베들레헴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때 아기 예수님이 탄생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그곳의 사관, 곧 여관에는 있을 곳이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은 마구간의 구유에 누우셔야만 했습니다. 흔히들 바로 이 때에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서, 구유에 뉘이신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고 예물을 드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마2:11은 예수님이 마구간(stable)의 구유(manger)가 아니라, 집(house)에 계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온 때는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나서 상당한 기간이 흐르고 난 뒤였다고 추정이 됩니다. 누가복음은 아기 예수님에게 있었던 일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먼저 눅2:21입니다.   


할례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예수님은 태어나신 지 팔 일이 되어 할례를 받으셨습니다. 또 눅2:22-24 말씀입니다.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 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 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 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 함이더라


결례의 날이 찼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님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비둘기 한 쌍이나 어린 반구(산비둘기) 둘로 제사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아기 예수님을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좀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레12:2-4 말씀을 읽어봅니다.


2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여인이 잉태하여 남자를 낳으면 그는 칠 일 동안 부정하리니 곧 경도할 때와 같이 부정할 것이며

3 제팔일에는 그 아이의 양피를 벨 것이요

4 그 여인은 오히려 삼십삼 일을 지나야 산혈이 깨끗하리니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기 전에는 성물을 만지지도 말며 성소에 들어가지도 말 것이며


여자가 아들을 낳을 경우는 사십 일이 지나야 깨끗할 수 있었습니다. 딸인 경우에는 그 배의 기간인 팔십 일을 지나야 깨끗할 수 있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은 아들이시니까, 결례의 날이 차려면 사십 일이 필요했습니다. 결례의 날이 차게 되면, 그 다음에 해야 할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레12:6과 레12:8 말씀입니다.


6 자녀간 정결케 되는 기한이 차거든 그 여인은 번제를 위하여 일년 된 어린 양을 취하고 속죄제를 위하여 집비둘기 새끼나 산비둘기를 취하여 회막문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8 그 여인의 힘이 어린 양에 미치지 못하거든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을 가져다가 하나는 번제물로, 하나는 속죄제물로 삼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를 위하여 속할지니 그가 정결하리라


보통은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힘에 미치지 못한다면,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로도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보통 드리는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만큼 그들이 가난했다는 뜻입니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았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입니다. 그들은 동방 박사들에게서 귀하고 값비싼 예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도 얼마든지 어린 양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으로 제사를 드리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아직은 동방 박사들의 방문을 받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보아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건은 예수님이 탄생하신 지 적어도 사십 일 이후, 어쩌면 몇 개월이 지난 후에 되어진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자기들의 가정에 탄생하셨기 때문에, 이제는 자기들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가 있을 때까지는 베들레헴을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집을 얻었습니다. 계속해서 마구간에만 머물러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마구간에서 집으로 옮겨서 머물고 있을 때,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동방 박사들의 내방을 그들이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마2:1-8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되어진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본문인 마2:9-12 말씀은 베들레헴에서 되어진 일을 다루고 있습니다. 내용상 세 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동방 박사들의 기쁨입니다(The Joy, 9-10절).

둘째, 동방 박사들의 경배입니다(The Adoration, 11절).

셋째, 동방 박사들의 귀국입니다(The Return, 12절).

오늘 본문의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동방 박사들의 기쁨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Joy, 9-10절).


본문 9절 말씀입니다.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1) 출발(The Departure)

동방 박사들은 헤롯 왕의 말을 듣고 출발했습니다. 그들은 헤롯에게서 “유대인의 왕,” 곧 메시야가 탄생하실 곳은 베들레헴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들은 헤롯에게서 두 가지의 임무도 부여받았습니다. 첫째는 아기에 대해여 자세히 알아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는 아기를 찾거든 자기에게 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동방 박사들은 설레는 마음으로 베들레헴을 향했습니다. 당시 그 지방 사람들의 관습은 밤에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는 낮에는 쉬고, 서늘한 밤에 별을 따라 방향을 정하고 여행을 하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습니다. 따라서 그들도 밤에 베들레헴으로 가는 여행길에 올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의 종교인들을 비롯한 그곳의 사람들은 아무도 동방 박사들과 동행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면, 그들도 마땅히 그곳으로 달려가야만 했을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2) 별(The Star)

오늘 본문 9절 하반부의 말씀을 다시 한번 읽어봅니다.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1) 문득 2)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3)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오늘 본문은 메시야의 별에 대해서 우리에게 세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 동방에서 나타났던 그 별은 사라졌다가 문득 다시 나타났습니다.

둘째, 그 별은 동방 박사들을 앞서 가면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셋째, 그 별은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 위에 머물러 섰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서 메시야의 별은 실제 하늘에 떠있는 별들과는 질적으로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보통의 별들은 어떻습니까? 별들은 우리가 가면 함께 가고, 우리가 서면 함께 서기 마련입니다. 

지난 주일 우리는 메시야의 별의 실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메시야의 별은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징조로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이 언제나 빛난 광채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눅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저희를 두루 비취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마17:2 저희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행9:3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계21: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췸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 양이 그 등이 되심이라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는 곳에는 언제나 빛난 광채가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바로 이 빛난 광채가 하늘의 별처럼 밝게 빛나면서 동방 박사들을 앞서 가며 인도했던 것입니다. 이는 마치 출40:34-38에 있는 광경을 연상케 합니다.


34 그 후에 구름이 회막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하매

35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수 없었으니 이는 구름이 회막 위에 덮이고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함이었으며

36 구름이 성막 위에서 떠오를 때에는 이스라엘 자손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 앞으로 발행하였고

37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에는 떠오르는 날까지 발행하지 아니하였으며

38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성막 위에 있고 밤에는 불이 그 구름 가운데 있음을 이스라엘의 온 족속이 그 모든 행하는 길에서 친히 보았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갈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에서 나오는 빛난 광채가 낮에는 구름 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밤에는 불 기둥처럼 떠올랐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앞서 가면서 그들을 인도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메시야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이제는 별처럼 환하게 빛나면서 동방 박사들을 아기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3) 기쁨(The Joy)

오늘 본문 10절 말씀을 읽어보면, 우리는 동방 박사들이 메시야의 별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얼마나 기뻐했는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오늘 본문은 몇 가지 말로 그들의 기쁨을 반복해서 고조시켰습니다. 말하자면 동방 박사들은 최고의 기쁨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쁨은 최고의 절정에 달했습니다. 그들의 기쁨의 잔은 넘쳐흘렀던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탄생하신 메시야에게 경배하며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 먼 길을 달려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여행 목적이 곧 달성될 시점에 놓였습니다. 그뿐 아니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친히 우리를 인도해주시는구나!”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고 또 감격했겠습니까?

그런데 이 기쁨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는 전연 없었습니다. 자신들이 기다리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으면, 마땅히 그들도 기뻐했어야 할 것입니다. 이방 사람들이었던 동방 박사들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더 기뻐했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헤롯과 더불어서 소동만 했을 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행여 남들은 성탄절이라고 좋은 선물들을 주고받고 하는데, 나는 그러하지를 못한다고 낙담하거나 불평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로부터 예수 구원이라는 최고의 선물을 받은 자들입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가리키는 별만 보고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탄절을 맞이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큰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동방 박사들의 경배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Adoration, 11절).


오늘 본문 11절 말씀입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1) 경배의 대상(The Child)

동방 박사들은 별의 인도에 따라 아기 예수님이 머무시는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마구간은 아니었습니다. 흔히들 보는 그림 가운데, 동방 박사들이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리고 있고 그 옆에서 목자들이 지켜보고 있는 광경을 그린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은 성경적으로는 정확하지 못합니다.

목자들은 눅2:16에 기록된 대로, 분명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에게 경배했습니다. 그러나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찾아온 것은 그 때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흘러서였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동방 박사들이 찾아왔을 때 아기 예수님은 더 이상 마구간에 계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는 어느 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오늘 본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몇 곳 읽어봅니다. 공통점이 무엇인가를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마2:13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마2:14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마2:20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마2:21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아기와 그의 모친이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의 순서가 어떠합니까? 언제나 아기가 먼저 나오고 있습니다. 강조점이 모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아기에게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며칠 전 유치원 아이들이 모인 자리에서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성탄절은 누가 우리를 찾아오신 날인가요?”

아이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산타클로스요!”

이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성탄의 주인공은 예수님이십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성탄의 주인공이 되셔야 합니다. 물론 동방 박사들은 요셉을 보면서, 마리아를 보면서 반갑게 인사를 했을 것입니다. 경의도 표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에게 경배했습니까?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그들은 오직 아기 예수께만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볼 수 있듯이 요셉은 동방 박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에는 요셉의 이름이 아예 기록조차 되고 있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는 오직 우리 예수님만이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2) 경배의 의미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기 위해서 단순히 무릎만 꿇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땅에 대었습니다. 아기 예수님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면서 경배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경의만 표한 것이 아니라, 경배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경배는 언제나 하나님에게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마4:8-10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귀는 예수님이 자기에게 경배하면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예수님에게 주겠다고 예수님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경배를 받으셔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행10:25-26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경배와 같은 단어임)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경배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도 사람이기에 경배를 받을 수 없음을 밝혔습니다. 경배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22:8-9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사도 요한이 천사에게 경배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천사는 그에게 오직 하나님께 경배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처럼 경배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동방 박사들은 헤롯에게도, 요셉에게도, 마리아에게도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경배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오직 아기 예수님에게만 경배했습니다. 예수님만이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었습니다.


(3) 경배의 예물

동방 박사들은 그들의 보배합을 열었습니다. 그리고는 아기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대상16:29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가지고 그 앞에 들어갈지어다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그렇습니다. 동방 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린 것은 경배에 덧붙여서 드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에게 경배하는 한 요소로서 예물이 드려졌던 것입니다.

그들이 아기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은 귀하고 값진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주는 것이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오리겐(Origen, 185경~254경) 이래로 황금은 왕이신 예수님에게, 유향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 그리고 몰약은 사람이신 예수님에게 드려졌다고 해석되어져 왔습니다.

1) 황금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왕상 10장에는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부요함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금이라는 단어가 열 번 이상이 사용되었습니다. 그가 앉는 보좌를 비롯해서, 그가 쓰는 방패들, 심지어는 그가 마시는 그릇까지 죄다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이 자기를 상징하는 신상을 만들되 어떤 신상을 만들었습니까? 단3:1에 기록된 대로 그는 금으로 신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바사 왕 아하수에로가 에스더에게 자기 손에 있는 홀을 내밀었을 때, 그 홀이 무엇으로 만든 홀이었습니까? 에5:2에 있는 말씀처럼 그것은 금으로 만든 금홀이었습니다. 이처럼 황금은 왕권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에게 왕권을 상징하는 황금을 예물로 바쳤던 것입니다.

2) 유향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출30:37 말씀입니다.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유향은 하나님에게 드려지는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유향이 드려지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3) 몰약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막15:23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요19:39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처럼 몰약은 죽어가는 사람의 고통을 덜기 위한 마취제나 혹은 시체의 방부제로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동방 박사들이 예수님에게 몰약을 예물로 드린 것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님의 인성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동방 박사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 드린 예물의 상징적 의미를 충분히 깨닫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매우 적절하고도 상징적인 예물을 아기 예수님에게 드렸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물들이 어떻게 쓰여졌는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예수님의 가족이 애굽에 피난을 가 있는 동안에 그것들은 유용하게 쓰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리는 것은 경배의 한 요소입니다. 행여 우리가 먹고, 마시고, 선물을 사는데는 풍성하면서도, 예수님에게 예물을 드리는 일에는 인색하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물 한 방울, 피 한 방울 남기지 아니하시고 다 쏟아주셨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서 귀한 예물을 드리면서 예수님에게 경배합시다.


셋째로, 동방 박사들의 귀국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The Return, 12절).


오늘 본문 마지막 절인 12절 말씀입니다.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1) 계시의 통로

이미 말씀드린 대로 그 당시 사람들은 밤에 여행을 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도 밤에 예루살렘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까지는 불과 8km였습니다. 걸어서도 두세 시간이면 충분하게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동방 박사들은 이른 밤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경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뒤에 그들은 여행의 모든 목적을 달성했다는 성취감에서 평안한 심정으로 잠시 눈을 붙였을 것입니다. 그 때 그들은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성경이 완성되기 이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꿈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기도 했었습니다.


(2) 계시의 내용

계시의 내용은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헤롯은 동방 박사들에게 아기를 찾거든 자기도 그에게 경배하도록 자기에게 돌아와서 고하라는 임무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기를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비록 동방 박사들은 헤롯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동방 박사들의 꿈을 통해서 그들에게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 것을 지시하셨습니다. 그리함으로서 하나님은 동방 박사들도 지켜주시고, 아기 예수님도 지켜주셨던 것입니다. 


(3) 계시의 결과

동방 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다른 길로 자기들의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좋은 길을 두고서, 다른 길로 돌아간다는 것은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고국에서 메시야의 탄생을 기쁘게 전했을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동방 박사들의 모습을 통해서 성탄절을 맞이하는 바른 자세가 무엇인가를 깨닫게 됩니다.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크게 기뻐해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아기 예수님을 가리키는 별을 보고서도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 말씀들이 우리가 기뻐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제시해줍니다.


마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2:6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셔서 우리를 지키시고, 인도하시며, 우리에게 모든 좋은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큰 기쁨으로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엎드려 경배해야 합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탄생을 알았습니다. 헤롯도 알았습니다. 대제사장들도 알았습니다. 서기관들도 알았습니다. 온 예루살렘이 다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동방 박사들만이 아기 예수님께 엎드려 경배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보배합을 열어서 아기 예수님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이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고린도 교회에 알려주면서, 고후8:8에 이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하나님에게 예물을 드리며 헌금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도 동방 박사들처럼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합시다. 그리고 정성이 담긴 예물을 예수님에게 드림으로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진실함을 증명해 보입시다.  

셋째로,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동방 박사들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이전과는 다른 길을 걷기 마련입니다. 전에는 내가 나의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왕이신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삽니다. 이전에는 헤롯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세상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직 하나님의 음성에만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살아갑니다.

고기 잡는 어부였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기록한 마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본시 세리였던 마태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더 이상 세리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완전히 다른 인생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는 180도로 완전히 다른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왕 되신 예수님의 진정한 경배자가 되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길, 곧 진리와 생명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뜻깊은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동방 박사들처럼 우리 모두도 크게 기뻐합시다. 왕이신 예수님에게 엎드려 경배하며 그에게 합당한 예물을 드립시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라진 삶의 모습을 하나님께 보여드림으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립시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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