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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 마음에 안 맞는 성도가 있을 때/ 엡4:1~6 / 2014년 8월 3일 주일 설교(주제: 용납)

내 마음에 안 맞는 성도가 있을 때

에베소서4:1~6

2014년 8월 3일 장안중앙교회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4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설교

얼마 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다가 식당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그분은 조선족 아주머니였는데 과거에 중국에서 교회를 다녔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안다닌 답니다. 왜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기 다니던 교회에 꼴사나운 사람이 있어서 안 다니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제가 “예수님 믿는 것은 하나님 보고 믿어야지 사람보고 믿으면 안 된다” 고 설득하고 예수님을 믿으라고 전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은 가고 싶어도 식당에서 일을 해야 해서 시간이 없어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사람 때문에 실족한 분입니다. 교회를 다니다가 실족하는 경우를 살펴보면 제일 많은 경우가 사람과의 갈등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문제가 돈 문제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가 시간의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실제로 어떤 기관에서 조사를 해보니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을 놓고 조사해 보니 그 중에 60% 가량이 사람과의 갈등 때문에 교회를 포기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20%정도가 헌금 때문이라고 하고 10%가 시간 때문이라고 그리고 나머지 10%가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실족하는 이유가 사람 때문이라면 그 사람을 실족케 한사람에게도 책임이 있지만 실족한 사람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 사람은 왜 넘어 졌습니까? 돌 때문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신이 부주의해서 넘어졌다고 보는 것이 정확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때문에 실족했다는 것은 넘어진 사람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어떤 존재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누구나 완전하질 못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살았기에 실족한 책임이 본인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우리 성도는 교회에 속해 있기에 교회안의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바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 중에 정말 내 맘에 안 드는 성도가 있을 때 어찌해야 할까요? 그 사람 때문에 교회를 옮긴다고요? 그럴 수 없습니다.

옮기면 그 교회에는 천사들만 모여 있을 것 같나요? 거기도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실족을 당하지도 않으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봉독한 말씀을 살펴보면 하나님이 그런 문제의 해결책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향해 하나가 될 것을 호소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나 되라”고 호소하는 것을 보면 에베소 교회 안에 뭔가 갈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성도 간에 갈등이 있을 경우 성도는 어찌해야 할까요?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회 안에서 인간관계를 잘 맺기 위해서는 필요한 몇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 맘에 안 맞는 성도가 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 그 목적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주신 말씀 1절을 보세요.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무슨 뜻인가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목적 없이 부른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이 부르실 때 목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그 부르심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목적이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또 부르신 시기마다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과 하나 되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려면 하나님이 택한 사람과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고요? 하나님과 하나 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 되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 되게 하기 위해서 독생자를 친히 인간의 몸을 입히시어 이 땅위에 보내셨습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그 하나 됨을 이루기 위해 우리를 대신해서 죄의 삯인 죽음을 해결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의 무서운 형벌을 대신 감당하셨습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도 교회안의 성도와 하나 됨을 이루어야 합당한 삶을 이루는 것입니다. 왜죠? 우리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입니다. 그리고 성도는 몸에 붙어 있는 지체입니다. 그러기에 머리와 몸과 지체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는 교회 안에서 다른 성도와 한 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라고 하면 그것은 하나된 것이 아닙니다.

 

마치 왼손과 오른 손이 한 몸에 붙어 있으면서 따로따로 놀면 그것은 건강한 몸이 아닙니다. 장애인입니다. 몸에 붙어 있어도 자기 역할을 못하는 성도가 종종 있습니다. 그래도 한 몸 되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보살피고 섬기고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교회 안에서 부르심의 목적에 합당하게 일하면서 다른 지체와 연합하고 하나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팔이 다리 노릇 할 수 없습니다. 언젠가 “세상에 이런 일이”라는 TV프로그램에서 물구나무서서 남산을 오르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 사람은 두 다리가 멀쩡한데 남들에게 대단하다 소리 듣고 싶어서인지 모르지만 두 팔로 걸로서 올라가는 것입니다. 저는 그 모습 보면서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멀쩡한 다리를 두고 손으로 거꾸로 서서 걸으려 하느냔 말입니다.

자기 역할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는 자기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역할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코가 입이 될 수 없고 눈이 귀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본래 부르신 그 목적대로 자기역할 다하면 하나 되는 복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의 문제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고 분열의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감옥 안에서 그들을 권면합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주안에서 다 한 가족이며 한식구입니다.

옆 사람을 보고 말하세요. /우리는 /주안에서 한 몸이고/ 주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족끼리 서로 하나 되지 못하고 으르렁 거리고 싸우고 미워하면 부모 된 하나님 마음은 어떻겠습니까? 다른 효도는 그만두고 제발 싸우지 말고 화목하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더 더욱이 한 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가 내 맘에 안 들더라도 하나님도 사람을 참고 계시는데 내가 뭐라고 이래라 저래라 할 것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참고 계심을 아십니까?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은 우리가 잘나서 참고 계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잘하기에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형편없지만 그래도 당신이 피 값을 주고 산 당신의 자녀이기에 온전해 지리라 기대를 걸고 참고 계시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 맘에 안 드는 성도가 있을 때 그 주님의 마음을 품고 인내하며 나를 부르신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해야 할 것입니다.

 

2. 사랑 가운데서 용납하라 하십니다.

사랑으로 그 사람을 받아드리라는 것입니다.

2절을 보세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겸손으로, 온유로, 그리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는 말은 아주 간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은 인간관계 승리의 최고의 비결입니다. 우리는 이 모습을 누구에게서 볼 수 있습니까? 겸손, 온유, 인내, 사랑, 용납..., 이것은 바로 우리 예수님에게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을 보세요. 그분은 모든 사람을 대하실 때 우리와 다른 모습이 있었습니다. 몇 가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대할 때 어떻게 하셨나요?

1) 겸손으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사람을 무시하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신 경우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대하실 때 그야말로 겸손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당신 스스로가 자신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셨습니다.

만약 최목사가 이 자리에서 “여러분 저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합니다.” 하면 여러분이 어떻게 느끼실까요? 닭살이 돋거나 하지 않겠습니까? 속으로 ‘웃기시네’ 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교만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이신 우리 주님이 당신 자신을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하는 것은 진실입니다. 그러기에 그렇게 말씀하셔도 마무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2) 온유로 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분이셨습니다. ‘온유’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프라우테스”라는 단어로 쓰는데 우리말로는 부드럽고 따듯한 것으로 해석하지만 성경이 기록된 헬라어 원어에서는 이럴 때 쓰고 있습니다.

1) 사나운 짐승이 길들여져서 주인의 말에 순종하는 상태를 “프라우테스”라고 합니다.

2) 고열로 힘들어하던 환자가 약을 먹고 열이 떨어진 상태를 “프라우테스”라고 합니다.

3) 그리고 거친 파도가 잠잠해지고 고요해 졌을 때 “프라우테스” 라고 합니다.

약하고 힘이 없어서 온유가 아닙니다. 강하지만 힘을 절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특권이 있으나 특권을 힘으로 사용하지 않고 절제할 수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 모습도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중풍병자를 대하실 때의 모습을 보세요. 그리고 문등병자를 향해 손을 내미실 때의 모습을 보세요. 더 나아가서 창기와 세리들을 대하실 때의 모습을 보세요. 우리 주님의 모습 속에 냉랭함이 쌀쌀함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온유로 대하셨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는 나와 다른 생각을 갖거나 내가 보기에 꼴불견인 사람이 꼭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을 향한 겸손과 온유를 베푸는 것은 쉽지를 않습니다. 내 자식이나 내 가족을 향해서는 얼마든지 베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 맘에 안 드는 성도들도 내 가족이고 형제이니 그들을 향해서도 이런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다음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오래 참음입니다.

 

3) 인내와 사랑으로 용납하셨습니다.

누구나 온유와 겸손은 한두 번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온유하고 겸손하려면 무척 어렵습니다. 힘이 듭니다. 자존심도 내려놓아야 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그래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오래 참음입니다.

내 맘에 안 들지라도 오래 참고 인내하면서 온유와 겸손의 자세로 대하면 그것이 곧 승리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 오래 참음이 유지되려면 꼭 필요한 것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떤 가정을 심방을 하다보면 어린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투정을 부립니다. 소리를 지르고 성경책 뒤집고 뭐 해달라고 울고 불고 야단입니다. 그래서 내 자식이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는 자식의 투정을 참아냅니다. 어떻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자식의 모든 것을 예쁘게 보게 만듭니다. 이것이 부모와 남과의 차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정말 사랑의 마음을 가졌었다면 내 맘에 안 드는 성도들도 용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래야 합니다. 골3:13~14절을 보세요.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서로 용납해야 하고 서로 용서해야 합니다. 어떻게요? 주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그리해야 합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우리 맘에 안 드는 사람일지라도 사랑으로 인내하며 겸손과 온유로 용납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를 모르기 때문이고 둘째는, 하나 되기 위해 치루는 희생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 될 때 복이 임하고 하나 될 때 주님을 닮게 되는 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3. 성령의 도우심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3절을 보세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성령은 능력의 영입니다. 그 영을 받은 우리는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모든 성도들과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힘써 지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힘쓰라’는 말일까요? 성령은 지금도 하나 되도록 일하시고 도우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 가운데서 거하기에 사단의 유혹으로 하나 되는 일을 못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힘을 써야합니다. 그래서 지키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잘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래서 하나님 우리에게 보내주신 분이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그 성령님의 도우심을 힘입어야 합니다. 그 성령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감싸 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은 지금도 우리 속에서 계속해서 우리가 하나 되도록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정반대입니다. 사단은 어떻게 해서든지 분열케 하고 나누게 하려고 발악을 합니다. 그러기에 파당을 나누고 이간질하고 비판시기 원망하게 하는 사람은 사단의 종노릇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는 우리의 부끄러운 부분을 볼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성령은 깨닫게 하는 영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를 깨닫도록 도우시고 상대방의 허물이 곧 나의 허물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5~6절을 보세요. 5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6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

 

주님도 하나, 믿음도 하나, 세례도 하나입니다 더욱이 하나님도 하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모든 성도가 하나 되어야 합니다. 하나 됨을 방해하는 적들은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겉만 보고 비판합니다. 이런 것이 사람을 실족케 합니다.

 

영국의 허드슨 테일러 선교사는 1800년대 후반에 중국 내륙에서 선교사역을 한 유명한 분입니다. 그런데 그가 선교사역을 하다가 치쳤습니다.

일이 점점 많아지고 협력자와 선교비가 더욱 많이 필요했지만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정신적 부담되어 밤잠을 설치게 되었고 마침내는 신경쇠약에 걸릴 정도로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성경을 읽다가 요한복음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중에 요15:5절 말씀이 그의 눈에 딱 꽂혔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테일러에게 이 말씀이 가슴에 닿았습니다. “너는 가지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그 순간 갑자기 태양 빛이 비취는 것처럼 그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기 시작했답니다. 그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렇다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그 가지인데 내가 걱정할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주님께서 수분과 양분을 공급해 주는 나무고 나는 가지인데 나는 그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데... 가지인 내가 수분과 양분을 공급하려고 애쓰고 있다니 어리석었구나.”

성령께서 말씀 가운데서 깨닫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간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답니다.

“주님! 이 시간부터는 염려와 근심을 주님께 맡기겠사오니 책임져 주시옵소서.”

그는 그 후부터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는 대로 사역을 하게 되었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포도나무가 공급하는 것을 받기만 하면 됩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공급하는 것을 받기만 하면 입이 나고 씩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저절로 맺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안에서 하나 되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 모든 사람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죄와 허물이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내 맘에 안 드는 사람이라고 하나님의 맘에도 안 든다고 착각하고 살았습니다. 내 맘에 안 드는 그 사람이 하나님의 맘에 드는 사람일수 있는데 우리는 교회 안에 내 마음에 안 맞는 성도가 있을 때 속상해 하고 힘들어 했습니다. 이제 우리를 부르신 목적에 합당하게 행하도록 도와 주옵소서. 그리고 주님처럼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와 사람으로 용납하기를 원합니다. 더 나아가서 내 힘으로 하려 하지 말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섬기며 하나되기를 힘쓰게 해 주옵소서.

우리는 주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우리는 좋든 싫든 주님의 식구들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하나님이 한 몸 되게 해주신 목적을 깨닫고 하나 되어 주님을 행복하게 섬기시는 성도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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