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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예수의 피 / 엡 2:11-13 (신 311쪽)

거의 한 달을 오늘 본문을 가지고 설교를 해왔습니다. 

그만큼 엡 2장 11절에서 13절의 본문에는 중요한 메시지가 들어 있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복음의 모든 핵심이 이 본문 안에 다 들어 있습니다. 

오늘은 그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피, 예수의 피에 관한 내용입니다.


사실 우리 사람은 피에 대한 선천적인 공포를 갖고 있습니다. 

멀쩡하다가도 피만 보면 두려움을 느끼거나 힘들어 합니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 또래의 친구들하고 싸움을 하면 먼저 코피가 터지는 친구가 지곤 했습니다. 


피라고 하면 왠지 모르는 두려움이 우리 사람에게 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의 피에 관한 오해도 우리의 두려움만큼 많았습니다. 

사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피가 꼭 필요한 것임을 계속해서 이야기해오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따져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우리 사람은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창 3:19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흙으로 돌아가라는 말은 

이제 사람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벌이 이 세상에서 반드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누구든지 예외 없이 다 통과해야만 하는 삶의 마지막 관문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뿐 만 아닙니다.


창 3:22-24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그가 그의 손을 들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생할까 하노라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 동산에서 

그를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 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영생을 아는 나무를 아담과 하와의 시야에서 영원히 숨겨 버리셨습니다. 

때문에 이제 사람의 노력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까지 

우리에게는 죽음이라고 하는 권세가 가장 두려운 존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오셔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허락하신 일이 

우리처럼 그냥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죽으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람의 죽는 모습 중에 가장 부끄럽고 수치스럽고 저주 받은 모습이었습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실패한 사역이라고 생각하고 거부하는 

반신앙적인 경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단들의 공격입니다. 

예수는 실패했지만 나는 실패하지 않았다, 

또는 실패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이비이단들이 넘쳐 나고 있습니다. 

문선명, 박태선 등등 자기가 재림 예수라고 주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여기에 속하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가 실패를 상징한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뭐 이런 주장들은 아예 겉으로 다 드러나기 때문에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쉽게 구분할 수 있는데도 빠져드는 것이 문제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라고 광고하는 사람을 보면 이단이라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뭐냐면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가만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전혀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겁니다. 

오늘 나오신 분들에게 한 번 여쭤볼까요?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부끄럽습니까? 

아니면 자랑스럽습니까? 

아니 우리가 예수 믿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합니까? 

아니면 자랑스러워해야 합니까?



우리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을 정도로 우리가 형편무인지경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무런 방법과 도리와 대책이 없었습니다. 

있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시는 죽음으로만 가능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겁니다. 


그러니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을 얻었다, 또는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한 만큼 

내가 악당이었고, 

형편없었고, 큰 죄인이었다고 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늘 부끄럽고, 창피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이 처절한 

자기 인식, 

자기 이해, 

자기 확인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우리에게 있어야만 하는 겁니다. 

때문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대부분의 신앙용어들은 사실 다 우리의 부끄러움입니다. 


은혜, 믿음, 사랑, 헌신, 충성, 봉사 이런 것들은 몽땅 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대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 때문에 갖게 되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나를 확인한 다음에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그것으로 내 자랑을 삼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같이 추운 날 예배당에 나오는 것이 자랑스러우시겠지만 

이것은 나를 확인하는 차원에서는 절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내 공로와 내 실력 때문에 드리는 시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시려고 

거룩한 피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 시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을 감당하고 살더라도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피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이미 

내 더러움과 부끄러움, 어리석음, 초라함, 연약함, 악함 들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하는 바는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의 존재 자체가 이미 다 그렇습니다. 

더 이상 바닥을 갈 수 없을 지경의 바닥으로 간 것이 우리들입니다. 

태어난 태생 자체가 이미 다 그렇습니다. 

때문에 다른 것으로는 도저히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 흘리신 겁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씀을 드린 것처럼 정말 문제는 뭐냐면 

우리가 그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교묘하게 변질시켜서 산다는 겁니다. 

아니 변질이라기보다는 포장을 완전히 다르게 해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변질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절대 변질되지 않습니다. 

다만 포장을 바꿔 버린 겁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포장을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고 하는 포장으로 바꿔 버린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이 자랑이 되어 버렸습니다. 

내 죄악과 허물과 부끄러움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더 당당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예수 믿고 사는 것이 남에게 공격용 무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공격을 하지 않더라도 자랑용 훈장이 됐습니다. 

때문에 무례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가 니들을 위해서 이러는 건데 왜 그것 못 받아들여?’ 라고 

오히려 더 강하게 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다 너 복 받으라고 그러는 거야!’ 라면서 위협과 협박을 하는 겁니다. 

복을 받는다고 하면 

그 어떤 반론도, 

논의도, 

검토도 필요 없는 무조건적으로 따라야만 하는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그토록 없애고자 했던 세상의 가치를 

오히려 더 열심히 따라 살도록 만들어 버렸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살아가는 성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팔아 세상의 것을 사는 장사꾼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빌 3:7-9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해서 

세상에서 얻은 모든 것을 배설물처럼 생각하고 버리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인해서 

배설물을 더 많이 가지고자 애를 쓰는 지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가졌다고 자랑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심지어는 성경을 증거로 갖다 들이밀면서까지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존재의 본질을 제대로 보고 읽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읽는 것까지도 우리의 자랑이 되는 겁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결론으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왜죠? 

우리 사람에게는 아무런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는 도무지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 것을 성경은 이야기하는 겁니다. 

성경이 이야기하는 것은 우리가 죽어 마땅한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죽는 것도 우리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죽어서 갚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에 예수께서 죽으신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의 성경 말씀은 

왜 이렇게 우리처럼 악한 존재의 구원을 강조해서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요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열매를 맺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열매는 우리가 죽어야만 열리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다 죽어야만 하는 겁니다. 


오장 육부뿐만 아니라 

뼈, 가죽, 성질, 자존심, 마음까지 다 죽어야만 

하나님의 바라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다고 해서 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내 안에 있는 이런저런 것들을 다 뽑아내고, 

또 뽑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없어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뽑아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뽑고 또 뽑더라도 완벽하게 다 뽑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전혀 다른 방법이 없었지만 포기 하지 않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까지 흘려서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랑입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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