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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의 화평 / 엡 2:14-18 (신 312쪽)

오늘 본문도 사실 몇 주는 계속 말씀을 전해야만 하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고 원하는 화평과 

오늘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화평은 상당한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가 화평에 대해서 오해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화평은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 

민족과 민족 사이에, 

이웃과 이웃 사이에 싸움 없이 사는 것을 화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일부 작은 싸움은 있을지라도 

그래도 서로 물고 뜯고 죽이는 큰 싸움만 없다면 

그것도 사실 화평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지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면서 지엽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싸움이 없는 것을 화평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을 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말씀을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화평이 겨우 싸움이나 하지 않는 정도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보다 훨씬 더 능동적이고, 적극적이고, 큰 테두리 안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마 5: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원수를 사랑하는 경지에까지 가야만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원래 하나님의 원수였습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그 죄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였습니다. 

그런 원수인 우리를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 뿐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14절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체를 가지고 중간에 막혀 있는 담을 허셨기 때문에 

서로 원수가 되었던 우리가 하나가 되었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지고 생각을 해봐야만 하는 문제입니다. 


원래 예루살렘의 성전은 담으로 구분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사장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고, 

유대인 남자만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있으며, 

이방인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다 따로 존재했습니다. 


사실 이 구분은 원래 직분적인 구분이었습니다. 

각각에게 맡겨진 일들이 따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코 계급적인 구분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 벽을 계급의 구분으로 만들어버렸습니다. 

때문에 서로에게 가까이 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벽이 되어 버렸습니다. 

특별히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는 더욱 그랬습니다. 

함께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서 제사를 드리게 하신 하나님의 원뜻은 철저하게 무시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에 엄청난 반목과 괴리만 존재하게 만드는 차별의 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유대인을 선민으로 부르신 이유가 뭡니까?


창17:1-8절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이 말씀은 

오늘날 유대인의 조상이라는 소리를 듣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이라고 직접 바꿔주시면서 하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단순히 유대민족만 맡기신 것이 아니고 이방민족까지 다 맡기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이방 민족들까지 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7장의 이 말씀이 어디에 가면 확인이 됩니까?


창15: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말씀은 결국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도 믿음을 가지면 누구나 다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고 그 동족 유대인을 선민으로 세우신 것은 

곧 이방인들에게 믿음으로 구원 얻는 길을 가르쳐주고 보여주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차별이 없는 믿음의 구원을 이방인들에게도 전하라고 하는 뜻이었습니다. 

사실 아브라함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브라함의 구원을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8:56-58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아브라함도 예수님 오실 것을 바라고 즐거워했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민족적인 후손인 유대인들과 영적인 후손인 이방인들의 차이가 사실 없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 구분을 계급적으로 이해를 한 것입니다. 

계급적이라고 하는 말은 ‘우리는 너희 이방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라고 생각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자기들과 이방인들이 다르다고 생각하기보다는 

이방인은 다 틀렸고, 자기들만 옳다고 생각을 했다고 하는 것이 옳은 표현일 것입니다. 

완전히 물과 기름처럼 절대 어울릴 수 없는 조합으로 생각을 해 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은 뭡니까?


15절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바로 그렇게 유대인들이 인위적인 담을 쌓았던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완전하게 허물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 누구라도 구분하거나 차별하거나 분리하지 못하는 

완전한 화평을 허락하셨다고 하는 겁니다. 


여기서 “한 새 사람” 이라는 표현은 단순히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은 개인보다는 단체, 

하나보다는 전체를 뜻하는, 

민족과 교회와 같은 공동체를 뜻하는 말입니다. 


그럼 이제 점차 오늘 본문이 확실하게 이해가 되시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가 되도록 하신 것을 우리가 다시 깨지 않도록 해야만 합니다. 

신앙인인 우리에게 죄가 세상의 가치와 기준에 따른 것만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를 지을 가능성이 종교적으로, 영적으로 훨씬 더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짓는 죄가 세상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짓는 죄보다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열심을 내는 것으로 더 많은 죄를 짓기 쉽습니다. 

종교적으로 죄를 짓기 쉽다는 것입니다. 

남들보다 헌금을 훨씬 더 많이 하고 죄 짓습니다. 

주 앞에 더 열심히 나온다면서 더 많은 죄를 짓습니다. 

성경을 누구보다도 더 많이 읽었다면서 오히려 더 많은 죄를 짓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거의 대부분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화평이 되셨다고 하는 말씀을 깨는 죄입니다.


우리는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기껏 새벽기도를 하고, 십일조 생활을 해서 

안하고 못하는 사람들 욕하느라고 그 은혜를 다 까먹어 버립니다. 

전도를 누구보다도 열심히 해서 새로운 성도들을 데려오지만 

교회생활에서 다른 성도들한테 가시 짓을 해서 다 내쫓아 버립니다. 

성경말씀 공부한다고 

평신도가 사볼 수 없는 책도 사보고, 

이런 저런 세미나도 쫓아다니고, 

성경도 많이 읽지만 

그것으로 목사 설교 비판하느라고 차라리 안하느니만도 못한 공부를 합니다. 


다들 너무 쉽게 마귀의 밥이 되고, 사단의 앞잡이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때문에 남들보다 더한 열심을 갖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할 때,

더욱 주의해야만 하고, 조심해야만 하는 겁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가롯 유다가 신앙생활을 다른 제자들보다 못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훨씬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 열심 가운데 마귀가 저를 찾아 왔지만 

자기 잘난 맛 때문에 유다는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눅22:3-6절 “열둘 중의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니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도를 의논하매 

그들이 기뻐하여 돈을 주기로 언약하는지라 유다가 허락하고 예수를 무리가 없을 때에 넘겨 줄 기회를 찾더라”


사탄이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님을 돈 받고 팔아 넘겼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 몸을 다 바쳐서 허락하신 우리의 화평을 

우리 스스로 깨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되돌아봐야만 합니다. 

괜한 자존심 부릴 것 없습니다. 

사탄이 우리를 가장 공략하기 쉬운 부분이 바로 우리들의 자존심입니다.

‘네가 누구보다 못한 게 뭐냐?’ 라고 하는 부분이 바로 자존심입니다. 


솔직히 여기에 안 넘어가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같은 죄인들을 위해서 하늘영광의 보좌까지 버리셨습니다. 

렇게 해서 얻은 구원입니다. 

그렇게까지 해서 누리라고 허락하신 화평입니다. 

그 화평을 오늘 우리 나무목교회 공동체에서 얼마나 누리고 계십니까? 

넉넉하게 누리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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