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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하나님의 화평 / 엡 2:14-18 (신 312쪽)

지난주에는 똑같은 본문으로 우리의 화평이라는 제목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번 주에는 하나님의 화평, 좀 더 엄격하게 따지자면 주님의 화평이라는 말씀입니다. 

똑같은 본문에서 어떻게 하나는 우리의 화평이 되고, 또 하나는 하나님의 화평이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화평이 성경에서 본래 의도하고 있는 화평과는 

상당한 거리와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화평의 최대치는 이웃과 다투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와 나라가 전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서로 반목하지 않는 것입니다. 

속으로는 어떨는지 모르지만 겉으로 드러나고 나타나 있는 것은 으르렁 대지 않고 사는 것입니다. 

얼굴 보면 인사하고, 악수 하고, 좀 더 심하면 껴안고 등 두드려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의 속은 잘 모릅니다. 

나한테 대해서 그저 적대감을 갖지 않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가까워지지도, 더 멀어지지도 않습니다. 


교회를 오랫동안 다니다보면 그런 것에 아주 익숙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교회를 다녀야만 시험 들지 않고 오랫동안 다닐 수 있다고까지 합니다. 

그냥 술에 술 탄 듯, 물에 물 탄 듯 변화도 없고 반응도 없는 채로 다닙니다. 

솔직히 우리 나무목교회 같은 개척교회에서는 

그렇게라도 교회를 다녀주는 것조차 감사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화평한 수준의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있는 화평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자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적극적으로 나가자는 겁니다.


15절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본문에서 우리를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고 할 때의 새 사람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깨끗하게 만드신 정도의 새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 사람의 속에다가 포장만 입힌 것이 아닙니다. 

완전하게 다른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고후 5:15-21절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여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는 이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육신은 아직도 옛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라서 이제 세상을 화목하게 할 책임을 가지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뭡니까? 

아직도 옛 육신의 모습대로 살던 때를 추억하면서 그 방법과 그 생활을 따라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내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삶을 사는 겁니다. 

여전히 모든 가치관을 육신의 삶이 주는 방식을 따라서 사는 겁니다. 

그래서 잘 해주는 사람한테 잘 하고, 

자기 아는 사람한테 잘 하고, 

자기 울타리 안에만 잘 하는 겁니다. 


사도 바울이 고후 5장 20절에서 하나님과 화목하라고 하는 

말씀의 의미를 제대로 잘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용납하시고 받아들이신 것을 

근본적으로 이해를 잘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그 삶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5:43-48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고 하면서 

여전히 자기와의 개인적인 관계의 한계 안에서 

타인을 대하고 있지 않는지를 생각해봐야만 하는 겁니다. 

여전히 

내 인간적인, 

세상적인, 

또는 세속적인, 

물질적인 필요와 가치를 따라서 섬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개 숙일만한 지위와 권세가 있으면 

비굴할 만큼 고개 숙여서 따라다니고, 

보잘 것 없고 도움 될 것도 없다하면 

가차 없이 무시해버리는 이중적인 태도로 살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분을 내도 의로운 분을 내어야만 하는데 

고작 해서 자기하고 관계된 것에 대해서만 

성질내고 화내고 큰 소리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화평은 

그 어떤 것도 구분하지 않고 계산하지 않은 순수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화평을 우리의 숨은 욕심과 만족과 요구사항을 담아서 

차별적으로 베풀고 있지 않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늘 같은 문제와 같은 내용의 한계 안에서 시험 들고 갈등하고 있는 것입니다. 

늘 시험이 드는 같은 문제와 같은 내용이 뭡니까?


마20:20-21절 “그 때에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그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께 와서 절하며 무엇을 구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엇을 원하느냐 이르되 나의 이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


오늘날 성도들의 시험 드는 모든 문제는 다 여기에 들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를 알아달라는 겁니다. 

기도를 해도 내 이름을 넣어 주고, 

내 하는 사업이나 일에 주보 광고를 꼭 내달라는 겁니다.

예수 믿고 사는 신앙생활에서 내가 드러나고 나타나고 폼이 나게 해달라는 겁니다. 

아니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남들보다 처지게는 말아 달라는 겁니다.


왜 교회 안에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줄 아십니까? 

원래 여자들이 시집가고 나면 이름을 사용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옛날에는 사실 이름도 변변하게 없었습니다. 

갖난이, 언년이, 이쁜이, 분이라고 불리다가 

시집가고 나면, 또 거의 대부분 무슨 댁이라고 불렸습니다. 


요즘에도 별다르지 않습니다. 

누구 엄마라고 불리든지, 아니면 

집에서는 거의 “어이, 야, 이봐!” 라고 불리고 

밖에서는 “아줌마”라고 불리는 것이 고작입니다. 

그런데 교회에 오면 꼭 그 이름을 불러주거든요. 

자기 존재를 알아준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생각을 과연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행세하려고 교회를 다니고, 이름 내려고 신앙생활을 합니까? 

요즘은 또 직분들을 가지고 난리입니다. 

교회 안에서 제일 꼴 보기 싫은 단체들이 

목사회, 장로회, 권사회, 안수집사회, 호남향우회, 경북향우회, 충청향우회 같은 겁니다. 

왜 그런 단체들을 만듭니까? 

봉사하려고 만듭니까? 

충성하려고 만듭니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기들의 세력을 과시해서 뭔가 힘을 가지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들이 모임을 만들었으니까 장로들도 만들어서 해봐야지 그러는 겁니다. 

그래서 연줄을 만들고, 

줄을 세우고, 

인연을 만들어서 서로 힘을 과시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세상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끼리 만나면 

우선 고향부터 묻고, 

학교 묻고, 

인연을 물어서 

뭔가 작은 줄이라도 하나 서로 같은 게 있으면 반갑다고 난리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앞세워서 자기의 인간적인 영역을 늘려나가려고 하는 겁니다. 

‘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모임이다, 누가 참석하는 모임이다.’ 라고 하면 

결사적으로 참석하려고 합니다. 

여기저기 줄을 대고서라도 참석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영역을 넓혀 가려고 하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 안에서도 

이제 사람의 인연이 없으면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는 겁니다.


마10:34-38절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바로 이런 과거의 인간관계의 고리들을 끊으러 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화평은 

죄악으로 가득 찬 인간관계의 연결선 상에서의 화평이 아닙니다. 

내 아는 사람, 내 도움 되는 사람, 내 이익을 주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얻어지는 화평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다 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바라보는 화평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누구에게도 차별하지 않고 

악인이나 선인에게 똑같이 허락하신 은혜의 화평입니다. 

때문에 나를 아는 것 때문에 내가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전혀 그를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 하나로 인해서 내가 기꺼이 섬기는 화평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무시당할 수밖에 없는 실력과 형편과 환경이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한 형제요, 자매요, 지체라고 하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의 주머니에서 뭔가가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 주머니가 그를 만나기 때문에 텅텅 비어가더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뭔가 더 주고자 하는 진실한 섬김이 되어야 하는 겁니다. 

반대로 나는 뭔가 해준 것이 있기 때문에 

이 정도는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때문에 신앙생활에서 

출석도 잘 하고, 

성경도 많이 읽고, 

헌금도 많이 하고, 

봉사도 많이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만 

인격과 성품이 변화하는 것도 그것만큼 중요합니다. 

그런 변화가 없다면 

아무리 인간적인 여러 열심을 갖고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건 나만의 착각입니다. 


새 사람,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만 합니다. 

눈을 좀 더 크게 뜨고, 넓게 봐야만 합니다. 

내게 도움 줄 사람을 찾는 눈이 아닌 내가 섬겨야만 할 대상을 찾는 눈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이 온 세상을 섬기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려 죽게 하신 하나님의 화평입니다. 

그 화평을 진심으로 제대로 잘 누리셔서 칭찬 받는 그리스도인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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