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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자가로 화목 / 엡 2:14-18 (신 312쪽)

오늘날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의 근본정신을 이야기하려고 하면 

가장 먼저 어떤 것이 생각이 나십니까? 

생각나는 그 근본정신을 다른 이와의 관계를 가지고 한 번 생각을 하고 적용을 해보세요. 


예를 들어서 

구걸을 하는 거지가 우리를 찾아와서 해장국이라도 한 그릇 사 먹도록 돈 만원이나 달라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이 십자가요, 예수님이요, 우리 기독교의 근본정신입니까? 

해장국에다가 소주 한 병까지 사 마실 돈을 주는 겁니까? 

아니면 돈을 안 주고 해장국을 직접 끓여 주는 겁니까? 

아니면 없다고 그냥 보내는 겁니까? 


돈 만원이 없다고 그냥 가라고 할 때 거지가 문을 발로 차고 가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게다가 그 거지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인데 

사랑의 종교가 배고픈 사람한테 돈 만원도 못 주느냐고 따진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늘날,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 하신 다음부터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오해를 당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만큼 세상 사람에 의해서 오해를 받는 진리가 없습니다. 

십자가가 오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해를 받으시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오해를 받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론이 되고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이 내 목표하는 것을 이루어주시는 분으로 이해가 될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가 이 세상을 힘 있고 재주 있고, 능력 있게 살아가는 수단이 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의지하고, 예수를 믿고, 기독교에 속해 있어도 

언제나 삶이 도덕적 수준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심지어는 경제적 수준의 신앙 정도 밖에 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 믿으면 이번 문제 다 해결해주신다는 겁니다. 

40일 새벽작정기도를 하면 내가 목표하고 있는 아파트 들어간다는 겁니다. 

예수 믿으면 겸손해지고 착해진다는 겁니다. 

물론 결과론으로 볼 때는 이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목표로 두고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것은 뉘앙스가 아주 다른 것입니다. 


문제 때문에 예수 믿고, 

아파트 때문에 십자가 붙들고, 

겸손하고 착하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쉽게 빠지는 오류 중에 하나가

“사랑하라, 희생하라, 양보하라, 겸손하라, 인내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는 

마치 새마을 운동 같은 식의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런 설교 할 때가 꽤 많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소리를 주장하거나 강요하거나 운동하는 곳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다 어떤 일의 결과일 뿐입니다.


마 3:5-12 “이 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요단 강 사방에서 다 그에게 나아와 자기들의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니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세례 요한의 이야기입니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면 도끼에 찍혀서 불에 던져진다는 겁니다. 


그럼 좋은 열매를 맺으려면 어떻게 해야만 합니까?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하는 겁니다.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나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과 어리석음과 죄악됨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지해서 새롭게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살아계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열매는 저절로 열리는 겁니다.



오늘 본문 16절에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16절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둘이 한 몸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이제 율법을 알고 살던 유대인과 율법을 모르던 이방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났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고, 

그러면 사람들과도 서로 화목할 수 없는 겁니다. 

예수 십자가 없이는 그 어떤 화목도 화목이 아닙니다. 

예수 십자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화목의 통로입니다. 

예수 십자가로 인해서 하나님과 화목해야만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십자가가 없으면 이웃과 화목하지 못하는 겁니다. 


교회의 하는 일은 예수 십자가를 세상 가운데 드러내고 소개하는 겁니다. 

성도가 하는 일도 예수 십자가를 지는 것을 자랑하는 일입니다.


고전12:13-27절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만 아니요 여럿이니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만일 다 한 지체뿐이면 몸은 어디냐 이제 지체는 많으나 몸은 하나라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느니라 그런즉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그럴 필요가 없느니라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귀중함을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이렇게 한 몸이 되는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보고 서로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한 몸 안에서는 서로 싸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 몸에 병이 들었으면 싸울까, 정상적인 한 몸이라면 서로 의지하고 살게 됩니다. 

결코 시비하거나 투정하지 않습니다. 

화장을 얼굴에만 했다고 해서 

배가 얼굴더러 너 혼자만 예뻐질 거냐고 따지지 않습니다. 

한 몸이면 누가 알아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관계없이 

자기 맡은 일은 자기가 알아서 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서로 화목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십자가가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바라는 것을 이루는 능력이 되는 것 같습니까?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는 마술램프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아닙니다. 

내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춰서 똑바로 보는 겁니다. 

내 허물과 내 잘못과 내 죄악을 보는 겁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이들에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여주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면 그 어떤 가능성도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겁니다.


‘나도 예수 십자가가 아니면 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모습을 똑바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나를 붙들어 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지를 똑똑히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갖고 누리고 먹고 마시는 것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는 경지에 까지 가는 겁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내게는 그 어떤 가능성도 없는데, 

그 십자가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경지에 이르는 십자가의 신앙이 되는 겁니다.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그런 십자가가 없으니까 도무지 자랑할 것이 세상의 것 밖에 없는 겁니다. 

아니 빚을 내서라도 자기의 삶을 세상의 것으로 도배를 해서 잘난 척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고후10:17-18절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그러나 주 안에서 자랑하는 겁니다. 

주 안에서 자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실 자랑할 것이 전혀 없는 겁니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가 다 주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똑같기 때문입니다. 

누가 더 낫다고 할 것이 없습니다. 

누가 더 못한다고 그럴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 특별해서 남들보다 더 많이 안다고 하니까 문제인 겁니다. 

더 많이 안다고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것은 정말 제대로 더 많이 아는 것이 아닙니다.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나를 먼저 보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악당이고, 악랄한 죄인이고,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인가를 알게 되는 겁니다.


마10:38-39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리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십자가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죽음입니다. 

그리고 부활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십자가는 바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죄에 대해서는 죽는 것이고, 의에 대해서는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으로는 다 죽는 것이고, 하나님의 것으로는 사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압니까? 

알지 못합니다. 

아는 것은 고작 자기들의 욕심을 채울 수단으로서 밖에 모릅니다. 

때문에 예수 믿는 우리와 세상과는 대화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와 세상은 결코 평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평화는 고사하고 심지어는 가족끼리도 원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저들은 십자가로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사랑을 보여줘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르는 겁니다. 

그저 돈만 보이는 겁니다. 

당장에 입으로 들어갈 소주 한 잔, 해장국 한 그릇만 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한 잔 마실 소주 값을 내놓으라고 사랑을 외치고, 

쓰린 속 달랜다고 해장국 한 그릇한다고 사랑으로 거품을 무는 겁니다. 


그러니까 안 줘도 됩니다. 

무조건 다 준다고 그것이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대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십자가를 다 내려놓고 대화한다고 하는 것에 열을 내는 기독교가 되니까 문제입니다. 


때문에 언제나 적당히 하는 겁니다. 

자기의 체면과 사회적인 위치와 도덕적인 염치 때문에 뭔가 좀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세상 가운데 들어가서는 세상보다 더한 열심을 갖고 엉망진창으로 사는 겁니다.


십자가로 화목한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것이 다 없어지고, 사라지고, 잃어버려도 

하나님 은혜만 있으면 산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 희생을 하고 

손해를 보고 

양보를 하는 삶이 되는 것도 들어있겠지만 

그보다는 하나님만으로 내 삶을 다 채우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때 만족함이 없어서 쳐다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만족이 전혀 없을지라도 그 하나님만 쳐다보면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나 세상이나 다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가 아니면 절대로 서로 화목할 수 없고 평화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십자가를 전하는 전도를 하는 겁니다. 

무엇을 하든지 십자가를 가운데 놓고 해야 하는 겁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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