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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성도의 인강관계 승리법/갈6:1~5/2003년 2월 23일

 

성도의 인간관계 승리법

갈라디아6:1~5

2003년 2월 23일 주일낮 최일환 설교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 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6: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

6: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만 있고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6: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설교:

사람은 2가지 秘密속에 살아갑니다. 하나는 개인의 종말, 즉 죽음을 언제 어디서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지난주간에 있었던 대구 지하철 참사는 우리에게 값비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각 전철역에서 형제 가족들이 그 전철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이 녹화된 CCTV로 잡힐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요? 어떤 분은 닫히는 문을 향해 달려 들어갑니다. 좀 늦어 안탔으면 그런 변고가 없었을 텐데 하며 웁니다. 그 전철에서 죽은 분들 가운데 ‘내가 오늘 죽을 것이다’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 예수님의 재림이 언제 있게 될지 아무도 모르게 살아갑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말은 내일 오실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두가지 비밀을 한번에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저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상관없이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리고 오늘 오시나 10년후에 오시나 상관없이 주님 맞이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열심히 전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소중한 것입니다.

  제가 어떤분에게 전도할 기회가 있어 전도했더니 예전에는 교회 예전에는 교회 다녔는데 지금은 안다닌답니다. 이유를 물으니 예수쟁이 꼴보기 싫어 안다닌다는 것입니다. 참 가슴이 아프더군요.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우리는 고백합니다. 그러기에 교회의 모든 사람들은 부족하고 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다니던 많은 사람들이 실족하고 실망을 합니다. 기대했던 사람들, 특히 목사, 장로, 집사들이 기대이하의 모습을 보일 때 실망하고 시험에 들어 교회 출석을 포기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은 완전한 자가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기를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사람 쳐놓고 완벽한 사람 없으며 동시에 허물과 죄악이 없는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사람들은 교회에서 시험에 듭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온전한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도간의 인간관계가 제대로 맺어져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도 온전하게 정립 되어야 하지만 성도와의 관계 또한 온전하게 정립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람의 신앙생활은 건강한 생활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온전하게 맺지 못하는 것일까?


왜 사람 때문에 상처를 받고 시험을 당하는 것일까요? 

1. 사람에 대한 無知때문입니다.

사람이 죄로 말미암아 타락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을 모릅니다. 그래서 사람을 믿고 사람을 신뢰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솔직히 사랑할 대상이지 믿을 대상은 아닙니다.


인간처럼 무서운 존재가 어디 있으며 인간처럼 믿을 수 없는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짓을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존재입니다. 그 원인은 죄로 말미암은 타락입니다. 전적타락, 어느 한부분이라도 온전한 것이 없는 타락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을 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며 인격적인 교재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 가운데 빠지게 된 후 돌변한 것입니다. 최초의 인간인 아담의 아들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그 후예들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얼마 안되어 하나님이 인간 지으심을 한탄합니다. 그처럼 무섭게 변한 것입니다.


요즘 되어져가는 일들을 보세요. 끔찍한 일들이 저질러집니다. 자식이 부모를 처참하게 죽이고 아내가 보험금타려고 남편을 죽이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이 누군지,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 때문에 넘어지지 않습니다. 

  

2. 자신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사람에게 상처를 받느냐? 인간의 못된 습성 때문입니다. 그중에 하나는 자기 허물은 잘 보지 못하고 남의 허물은 잘 보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왜 나는 안보일까요? 사람들이 이중 잣대를 갖고 사람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것입니다.


내가 하면 창조적인 광고이고 남이 하면 거짓말이며

내가 하면 로맨스이고 남이 하면 스캔들이며

내가 침묵하면 생각이 깊은 것이고 남이 침묵하면 생각이 없는 것이며

내가 자리를 비우면 바쁜 만큼 유능한 것이고 남이 자리를 비우면 어디서 또 노는 것이며 내가 화를 내면 소신이 뚜렷한 것이고 남이 화를 내면 원래 그릇이 작은 때문이며 내가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 것이고 남이 약속을 어기면 사람이 신뢰성이 없어 그런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이중 잣대는 결국 자신을 멸망의 수렁텅이에 떨어트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믿는 성도가 온전하게 하나님을 섬기려면 자기의 허물과 죄악을 보아야 하기에 성령을 부어주신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자기가 보이고 성령을 받으면 죄가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성결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나님의 몸 된 교회 안에서 문제가 일어날 때 어찌해야 하나요?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세가지입니다.


1. 온유한 심령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주되 정죄하는 자세가 아닌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아 주라고 명하십니다. 그 온유한 심령은 따뜻한 마음을 말하고 사랑하는 자세를 의미합니다. 또한 이 말속에는 그 사람 자세를 멸시하지도 말고 경계하는 자세도 없어야 하며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대하시는 예수님을 보세요. 베드로가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때 예수님은 그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한번도 심판하지 않습니다. 회개한 죄이기에 그를 사랑으로 품고 긍휼로 어루만져 치유합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은 베드로의 아픈 상처를 치료하시는 주님의 온유입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온 여인을 대하시는 예수님을 보세요. 주님은 그녀를 향해서 달려드는 심판자들에게 “죄 없는 자가 치라” 하십니다. 그때 사람들이 슬그머니 사라지자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경계하시여 보내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게 성도를 대합니까?

남의 허물과 실수, 죄악을 어떻게 대합니까? 혹, 심판자적 자세는 아닙니까?

나는 전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식의 정죄의 자세는 내게 없습니까?  또 남의 실수와 허물을 험담하며 즐기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그런 우리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계심을 아십니까? 여기에 온유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矜恤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이 있고 빛이 보입니다. 

2. 나 자신을 돌아보아 나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남의 허물과 죄악을 비판하고 정죄하는 행위“나는 저 사람과 같지 않다”는 생각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고하십니다. 혹 나도 그런 사람 아닌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나도 똑같은 사람이라면 그 정죄에 나도 걸려드는 것입니다. 결국 내가 내 얼굴에 침 뱃는 격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늘 나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도 똑같은 실수를 하며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그랬습니다. 왕 다윗이 충성스런 신하의 아내를 빼앗았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시어 곧바로 죄를 지적치 않고 비유로 죄를 언급합니다.

어떤 한 성의 부자가 아무것도 없고 가난한 자의 양 한 마리 가진 것을 빼앗아 손님을 대접했다고 말합니다. 그때 다윗이 그것이 자기 이야기인줄도 모르고 크게 노하며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고 합니다.

왜 다윗이 그렇게 분노하며 맹세를 하면서 까지 저주를 했을까요? 그것이 자기인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자기 허물은 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스스로를 볼수 있게 하셨습니다.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죄를 들쳐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영적 거울이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보세요.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세요. 보입니까?

성경은 죄를 숨기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들쳐냅니다.

야곱의 4째 아들 유다가 며느리와 성관계를 맺는 망칙한 일도 들쳐 내고 다윗이 신하의 아내를 빼앗는 모습도 상세히 기록합니다. 크게 들어 쓰임 받은 인물들의 허물을 여실이 들어냅니다. 어지간하면 감출만도 한데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왜요? 그것이 우리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나도 넘어질 수 있다. 나도 인간이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하고 그러기에 조심하고 조심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는 상관없어 자만하면 안됩니다. 다윗도 넘어졌습니다. 아브라함도 넘어졌습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베드로도 넘어졌습니다. 더우기 나는 말할 것 없습니다. 그러기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18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3. 마지막으로 서로 짐을 져야 합니다.

여기서 서로 짐을 진다는 말은 사랑으로 그 고통과 아픔을 나누며 격려하고 돌보고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이 뭡니까? 사랑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의 짐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견디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당하게 선포하십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11: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그렇습니다. 모든 인생에게 고통스럽고 무거운 짐들이 걸려 있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짐을 나누어 질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를 초청합니다.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


성도 여러분! 우리 짐을 벗겨 준다하지 않습니다. 오면 쉬게 해주는데 어떻게 쉬게하느냐? 내게 배우라 합니다. 그러면 마음이 쉼을 얻게 되고 결국 마음이 바뀌면 짐은 가볍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무거운 짐의 解決者는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 나와 그분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어떤 자세입니까? 우리를 쉬게하고 무거운 짐을 가볍게 하는 그것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긍휼이고 둘째는 사랑이며 셋째는 용서입니다. 이것만 우리에게 무장되어 있다면 그 누구라도 품을 수 있고 그 누구라도 변화시킬 수 있으며 더나아가 그 누구와도 온전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주님은 우리 모두가 한 공동체로서 복을 누리기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이 예수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사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그리고 주님은 어떻게 하셨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성도의 인간관계의 승리 법은 성경에 있습니다. 그 승리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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