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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내가 져야할 십자가/사53:1~6 마16:24/2003년 4월 13일

내가 져야할 十字架

사53:1~6 마16:24

2003년 4월 13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종려주일 설교

53:1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53: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欽慕)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53:3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53: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마태복음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설교:

여러분은 다음주에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아는 것이 좋을까요? 모르고 살다 죽는 것이 좋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고 살다가 죽는 것이 좋을 것이라 생각하실 것입니다.

왜요? 인간은 내가 며칠에 죽는다는 사실을 알면 죽는 그 순간까지 안 죽으려고 발버둥을 치다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암으로 판정을 받아 사형선고를 받은 분들이 아주 괴롭게 살다가 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언제 죽으실지 알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두려워  하지 않고 갈 길을 가십니다. 누가복음 성경을 보니 “예루살렘으로 앞서서 가시더라.”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은 단순히 이해하면 안되는 부분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당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못해 가신 길이 아니라 앞서서 올라가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십자가의 죽음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오늘은 종려주일입니다. 여러분은 종려주일(棕櫚主日)의 의미를 아십니까? 

부활절 직전의 주일에 그리스도가 베다니에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入城)한 것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어린아이들과 많은 군중들이 길거리에 나와서 자신들의 겉옷을 길에다 깔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호산나, 호산나”를 외쳤습니다. 그래서 종려 주일이란 말이 나왔습니다.

어떤 분은 종려를 여행을 마치는 주일(終旅)로 해석하기도하나 종려주일의 본래 의미는 종려나무 가지로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환영한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때의 모습을 신약성경에는 여러 곳에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전체에서 이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디 한군데도 당신이 당하실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십자가를 지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 우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마지못해 지시거나 도망치려고 발버둥을 치려다가 붙들려 십자가에 매달렸다면 우리 구원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복음은 가짜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천국을 확신하고 부활을 확신하기에 조금도 두려워 않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주님은 십자가를 져야 했나요?

크리스챤이면 누구나 이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속죄키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그 십자가를 왜 예수님이 지셨던 것입니까?

그만이 죄를 속죄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만이 죄 없으신 분으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는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었고 그러기에 그분만이 우리를 대신하여 罪값을 치룰 수 있는 유일한 분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우리도 져야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십자가를 져야 합니까?

찬송가에 나와 있는 367장을 보세요.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 이제부터 예수로만 나의 보배 삼겠네. 세상에서 부귀영화 모두 잃어버려도 주의 평안 내가 받고 영생 복을 얻겠네.”


그렇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주를 따라간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떤 십자가를 지고 가십니까?

안타깝게도 너무나도 많은 분들이 십자가가 뭔지도 모르고 살고 있고 또 자기 십자가가 어떤 것인지도 모르면서 이 찬송을 부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것이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입니까? 일반적으로 몇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

1. 주님이 맡긴 사명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사명/ 이것이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십자가입니다. 제게는 목회가 십자가입니다. 여러분은 맡은 직분이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어찌 보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듯이 보이나 그러나 동시에 이 십자가는 축복입니다.

그 사명 때문에 우리가 살고 그 사명 때문에 하나님이 영광을 들어내게 되고 그 사명 때문에 면류관을 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허락하신 환경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십자가는 우리가 처한 환경일수 있습니다. 육체적 장애도 십자가일 수 있고 또는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여건도 십자가일수 있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자녀가 뇌성마비로 어려서부터 고생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그 아들 때문에 엄청나게 힘든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왜 하나님은 내게 이런 어려움을 주셨나?” “남들은 건강한 자녀들 두어서 다들 잘 크고 고생도 덜 하는데 왜 유독 나만 이 아들 때문에 고생을 하는가.” 울면서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이 어느 날 “딸아 그것이 네게 십자가요, 너만이 감당할 수 있어서 내가 네게 맡긴 것이다” 하시더랍니다. 그렇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십자가입니다.

때로는 자식이, 또는 남편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또 아내가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또 어떤이에게는 부모가 십자가일수도 있습니다. 어떠튼 그것은 미워서 죄가 많아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상 주시려고 맡기신 무거운 십자가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보면 詛呪같고 징계같이 보이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십자가는 복을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셉이 당한 13년의 고난은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복주시기 위한 십자가입니다. 바울이 당한 환난과 고난도 복음전파를 위해 당한 십자가입니다. 잘감당하면 상이 있고 면류관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져야 할까요?


1. 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내 생각, 경험, 판단을 앞세우면 절대로 질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 길을 막으면서 막았습니다. 성경대로 말하면 “간하여 그리하지 마옵소서.” 라고 했는데 영문성경에는 예수님을 “책망하며(rebuke) 그리하지 말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사단이라고 책망 받은 이유가 뭘까요? 주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앞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십자가 지려면 내 생각과 경험을 버려야만 질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입니다.

쉬우면 십자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내 생각, 경험, 판단을 접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됩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믿음 없이는 질 수 없는 것입니다. 


2.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이 십자가는 누구 것입니까?

어찌 보면 주님의 십자가 같으나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 십자가”라고 분명히 말씀 하십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는 주님만이 질 수 있는 십자가입니다. 내가 져야할 십자가는 내가 감당해야 합니다. 남의 십자가를 간섭하지 말고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의 십자가는 잘 집니다. 그것도 입으로 얼마나 잘 집니까?

“집사님 이것은 집사님 십자가에요” “기도하세요. 침으세요.” 하면서 잘 집니다. 그런데 막상 그런 것이 자기에게 닥치면 “자기” 십자가라고 생각을 안합니다. 재수가 나빠서 당한 것이고 어쩌다가 당한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 생각과 경험을 앞세우고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려고 노력합니다.

아닙니다. 져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부여한 사명일수 있습니다. 힘들어도 감당해야 합니다. 그것이 견디기 힘든 환경일수 있습니다. 견뎌내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는 육체적인 가시일수도 있습니다.

교회문제, 직정문제, 그리고 가정문제, 심지어 신체적 장애, 자식의 문제...이런 것도 내게 주신 십자가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으로 감당하시며 나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게 주신 십자가는 내가 지어야 합니다. 물론 남들이 질수도 있으나 그러면 상급이 없습니다.


3. 주님만 따라가야 합니다.

“나를 좇을 것이니라.” 했습니다.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세상을 따라가거나 명예, 권세 재물을 따라가 그것으로 해결하려면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나를 따라오라는 말은 주님처럼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주님처럼 지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요?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모습은 이사야 53장에서 살펴보게 됩니다.


우리 예수님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셨나요?

인정받지 못해도 참았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메시야로 인정치도 않았고 멸시했고 귀히 여기도 않고 오히려 대적했습니다. 연한 순 같고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고운모양, 풍채도 없었고 우리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었던 분입니다.

한마디로 부당한 대접을 받았던 분입니다. 말도 안되는 환경에서 태어났습니다. 베들레헴 구유에서 태어났습니다. 이방 땅과 같은 갈릴리 나사렛에서 목수의 아들로 자라나셨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도 없고 인정하지도 않고 그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참고 견디어 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지는 자세입니다.


여러분 사명, 여러분 환경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참고 견디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얼마나 고독하고 외롭습니까? 그래도 감당해야 합니다.

선교사들이 제일 힘든 것이 무엇일까요? 언어장벽? 재정문제? 핍박?, 자녀교육문제? 등등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으나 제일 힘든 것은 고독함입니다. 아무도 안알아주는 것입니다. 누구도 그 고생을 인정해주지 않습니다. 간혹 귀국하여 한국교회에 서면 성도들과 후원자들이 수고했다고 하나 그것도 일시적이고 또 들어오고 싶다고 아무 때나 들어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도 십자가이기에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남을 대신해 처참한 고난을 당했습니다.

내가 받을 죄 값이라면 능히 감당하고 당연히 감당해야 할 것이지만 자기 죄값이 아닌 타락한 인간의 죄값으로 죽어야 합니다. 전혀 상관없는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질고를 졌고 슬픔을 당했고 가시와 못에 찔렸습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이 채찍에 맞았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다 양 같아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당연성도 없는 대신 진 십자가, 보통 사람도 아닌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당하신 십자가!

어떻게 그것을 감당하셨을까요? 오직 이유는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니면 절대로 질수 없는 십자가인 것입니다. 그 사랑! 그 사랑이 십자가를 감당케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사랑이 없이는 질수 없습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 없이는 질수 없고 교회에 대한 사랑 없이는 질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식도, 가족도 사랑 없이는 안됩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 하신 질문이 사랑인 것입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이 시간 십자가를 져야 할 여러분에게 주님이 묻습니다.

집사야, 성도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교회를 사랑하느냐? 네가 가족을 정말 사랑하느냐? 

 

더나가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괴로울 때에도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 떨 깎는 자 앞의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이말은 원망 불평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과 공회원들 앞에서도 원망 불평치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우리 자세는 원망과 불평이 가득하지는 않습니까? 왜 내가 이 짓해야 하냐며 원망하지 않습니까? 어쩌다 내가 저 원수를 만나서 이 고생이냐고 불평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한마디도 입을 열지 않으시고 묵묵히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찬송과 기쁨이 넘쳐나셨을 것입니다. 원망 불평안하는 것으로 그치지 마시고 한걸음 더나아가 찬송과 감사, 기쁨이 가득한 마음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십자가는 무거운 것이 아니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은 어떻게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주님이 지신 것처럼 지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믿음으로, 그리고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오직 감사로 져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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