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디어 낼 수 있는 비결
창세기39:19~23
2003년 10월 12일 장안중앙교회 최일환 목사 주일낮예배
39:19 주인이 그 아내가 자기에게 고하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39:22 전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39:23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설교:
오늘은 꿈 이야기 좀 하면서 설교를 시작하려 합니다.
여러분은 요즘 어떤 꿈을 꾸십니까? 저는 간혹 설교하는 꿈을 꾸는데 설교 중에 성도들이 막 떠들어서 조용히 하라고 외치다가 깨기도 하고 어떤때는 제가 꿈속에서 설교를 하는데 너무 은혜가 되어 잠간 깼을 때 메모지에 제목과 줄거리를 적어놓고 잠들기도 합니다. 또 어느 큰 교회에 가서 說敎를 하는데 불이 나서 성도들이 막 나갑니다. 그러다가 애를 때우다가 깹니다. 이 이야기를 하면 어떤 성도는 일일이 꿈을 해석하려 들것입니다.
요즘 어떤 교파 성도들은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믿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 사모님은 교인들이 꿈을 꾼 것을 이야기하면 해석해 주는 은사가 있다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꿈을 해석하는데 그야말로 아전인수 격이고 옛날 우리나라 전통 꿈 해석을 동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셔야합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꿈으로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에 꿈을 꾸고 그 解釋을 통해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경 여러 곳에 꿈을 통해 하나님의 啓示를 받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계시를 마음에 품고 살았던 사람들은 놀라운 복을 누리는 경우를 여러 곳에서 살펴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때는 ‘기록된 성경이 없었던 시대’입니다. 그러기에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여러 형태로 당신을 계시하셨고 당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전하셨습니다. 때로는 꿈으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음성으로 그리고 때로는 자연현상을 통해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에는 하나님이 기록된 성경으로만 말씀 하시고 계심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러기에 더 이상 꿈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히브리서1:1~21: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밤중에 꾸는 꿈에 매달려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돼지꿈”을 꾸었다면 뭘 할 것입니까? 복권을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돼지꿈은 橫財가 생길 꿈이라고 우리는 해석을 합니다. 돼지는 한번에 10마리정도 새끼를 낳습니다. 多産을 상징하는 동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돼지는 부정한 동물입니다. 우리나라는 까마귀는 불길한 존재요, 끼치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존재로 봅니다. 그러나 중동지역에서는 까마귀는 길조로 여깁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잠자다 꾸는 꿈이 아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약속하시는 꿈을 꾸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야 하고 그 말씀을 기초로 꿈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날도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꿈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이 주신 꿈(Vision)을 갖고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그 꿈을 날마다 이루며 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꿈이 있는 성도는 반드시 성공합니다. 왜요? 그 꿈은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동시에 그 꿈은 인생의 목표입니다. 그러기에 꿈을 가진 사람은 약속을 붙들고 사는 사람이며, 동시에 인생의 목표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사람은 아무렇게나 살수 없습니다.
반대로 꿈이 없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그런 사람은 인생의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하루하루를 아무렇게나 낭비하고 살게 되며, 쓸모없는 인생이 되어버립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을 볼 때 어떤 생각을 합니까? 혹시 이런 질문을 해 보셨습니까? “저 사람의 성공의 비결은 무엇일까?” “저 사람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질문해 보셨습니까? 그런 질문과 답변을 찾는다면 우리도 성공할 수 있는 길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질문을 아예 하지도 한고 아예 생각도 못한다면 우리는 성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이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요셉, 그는 어떻게 대 애굽 제국의 국무총리가 될 수 있었을까?
저 사람의 성공 비밀은 무엇일까? 저 사람은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질문해야 하고 또 그 해답을 찾아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꿈이 있었기에 그 꿈 때문에 혹독한 시련을 당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꿈을 갖고 있나요? 그 꿈이 여러분에게 혹독한 고난을 가져다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끝까지 이겨내면 요셉이 누렸던 성공의 기쁨을 우리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요셉은 어떤 자세로 그 苦難과 試鍊을 이겨낼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그가 보디발 장군집의 노예로서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 후 13년의 고난을 어떻게 이겨냈을까요? 여기에 뭔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뭘까요?
1. 하나님이 나와 함께한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임마누엘”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 임재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이 임마누엘 신앙이 우리에게 확고하다면 이것은 어떤 고난도 이겨낼 수 있게 하는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여러분에게 그 임마누엘의 신앙이 늘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그 임마누엘 신앙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신앙은 그의 증조부 아브라함으로부터 내려온 살아있는 신앙의 전수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증조부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삭, 그리고 아버지 야곱을 통해 이어 내려오는 믿음을 요셉이 이어받은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몇 대째 신앙입니까?
신앙의 연조는 매우 중요합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가문의 자손은 그 조상으로 내려오는 믿음의 역사가 그 자손에게 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신실한 크리스챤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할아버지, 또는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믿음을 받아들인 가정이 많습니다.
미국 기독교인의 신앙과 한국 기독교인의 신앙을 비교한 어떤 학자가 말하기를 미국의 기독교인의 신앙은 교회 나와 뜨겁게 난리를 안쳐도 생활 속에서 신앙의 냄새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기독교인은 그렇지 않다고 비판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겨우 100여년의 신앙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도 유교와 불교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는 속에 이만큼 만들어 내는 것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미국은 영국의 淸敎徒들이 건너와 신앙으로 건설한 나라입니다. 그러기에 적어도 수백년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신앙의 전수가 오늘의 미국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제 많아야 4代정도 되는 현실입니다. 보통 1, 2대 신앙인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개척단계의 신앙입니다. 그러니 고난도 어려움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抛棄 할 수는 없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우리 자손들에게 임마누엘의 신앙을 전수할 수 있는 신앙의 전통 가문으로 만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 임마누엘의 신앙은 자녀들에게 그 어느 것보다 가치 있는 유산이 되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의 신앙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교회에서만이 아닌 직장과 사회에서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고 살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임마누엘, 그 이름은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하네 그 이름은 임마누엘♬
2.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과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습니다.
학생들이 다 떠나간 어느 시골 초등학교 운동장 한 구석에 나이가 꽤 들어 보이는 신사 한 명이 서 있었습니다. 잠시 후 청년 한 명이 급히 운동장으로 들어와 그 신사에게로 다가갔습니다.
신사는 어릴 적 친구와 나이 오십이 되면 이 운동장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오늘이 그 날이어서 친구를 만나러 나온 것이었습니다.
"저, 혹시 어릴 적 친구를 만나러 오셨나요?" 청년이 물었습니다.
"예, 그런데 당신은...."
"저의 아버님이 이년 전에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돌아가시기 전에 어릴 적 친구와 약속을 했다면서 오늘이 되면 대신 만나 달라고 저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사는 친구의 죽음이 슬펐습니다. 하지만 약속을 지켜준 친구의 마음이 너무도 고마웠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을 하나 지키지도 못할 때 많고 그 약속을 잊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한번 맺은 약속은 반드시 지키십니다. 구약은 하나님의 옛날 약속이고 신약은 새로운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반드시 성취됨을 성경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요셉은 하나님은 信實하셔서 당신이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노예로 끌려갈지라도, 억울한 陋名을 뒤집어쓰고 죄수가 되었을지라도 그는 그 약속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또, 보디발 장군의 부인이 간교한 誘惑을 할지라도 그가 그 시험을 견디어 낸 것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 때문입니다. 그 약속을 의심했거나 불신했다면 그는 그 유혹을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도 약속을 철저히 믿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수많은 약속을 주셨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상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충성하는 자에게 면류관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머지 않아 다시 오시겠다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3. 하나님의 은혜가 늘 언제나 함께 함을 믿었습니다.
요셉은 노예일지라도, 죄수일지라도,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그가 노예로 일할 때도 주인의 사랑을 받게 하셨고 그가 감옥에 죄수로 있을 때도 그 감옥 간수장에게 인정을 받게 하셨습니다.
21절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사형에 처해지지 않고 왕의 죄수들이 갇히는 감옥에 가둔 것은 보디발도 요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고 또 감옥의 看守長에게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에게 성실해보이고 열심을 낸다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그 길은 형통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 하나님의 은혜는 절대적인 것입니다. 솔직히 그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건강하게 지금까지 산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배우자도, 직장도, 자녀들도 그리고 구원의 은총도 모두모두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 은혜는 간혹 의심을 받기도 합니다.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노예가 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가 되는 것만 볼 때 그것을 어찌 은혜라고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당하는 그 현재만을 볼 때는 은혜가 아닌 저주처럼 보일 때가 있고 성공이 아닌 완전한 실패로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만을 보면 안됩니다. 긴 장래를 내다보아야 합니다.
요셉의 경우를 보세요. 노예로 있는 순간도 하나님은 형통케 하셨다고 했고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고 했습니다. 감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그 당시는 그 길에 하나님의 은혜는 아주 미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조금 더 내다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리지 않았다면 국무총리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총리가 되어서도 그 직무를 감당키 어려웠을 것입니다. 보디발집의 노예, 감옥의 죄수로 사는 동안 그는 경제, 정치를 두루 배웠습니다. 결국 그는 하루아침에 대 애굽 나라의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흉년이 되었을 때 자기 가족을 살려내는 구원자 역할을 해냅니다.
이렇게 볼 때 요셉의 생애는 그야말로 드라마틱한 은혜의 연속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그는 범사에 형통함을 누렸습니다. 물론 그 형통은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과 다른 형통입니다. 여러분에게도 성경이 말하는 형통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그 형통을 누리려면 먼저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져야 하고/ 약속을 신뢰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함께 해야 함/을 잊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를 믿는 것 때문에 고난이 있습니까? 환난이 있습니까? 견디시기 바랍니다. 무조건 견디는 것이 아닌 믿음을 갖고 견디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형통의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통성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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