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이 주시는 平安
요한복음14:27
2003년 12월 14일 주일 낮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설교:
세상에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하고 가치 있는 단어를 하나 꼽아보라면 여러분은 어떤 단어를 선택할 것입니까?
사랑, 행복, 은혜, 기쁨, 돈, 기타 여러 가지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의 기초에는 바로 이 單語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평안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 인사가 다 각각 다르지만 대부분의 나라 인사는 평안과 관련된 인사입니다. 대표적인 인사가 우리나라의 안녕, 이스라엘의 샬롬이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원하는 것이 平和입니다. 그래서 노벨상중에 가장 귀하게 여기고 가치 있는 상이 평화상인 듯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참 평안이 무엇인지?, 이 평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인지?, 어떻게 그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인지를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1. 이 평안 어떤 것일까요?
주님은 평안에 대해서 두 가지로 구분하고 계십니다. ‘내가 주는 평안’과 ‘세상이 주는 평안’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은 무엇이고,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무엇일까요?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주님께 속한 평안입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평안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주는 평안은 고난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이고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즉, 우리 주님이 누리고 계시는 평안, 그 평안은 단순히 조용한 상태가 아닙니다.
만약에 고요한 것이 평안이라면 저는 그런 평안은 받고 싶지 않습니다. 그 삶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지겹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가장 고요한 곳은 공동묘지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가 공동묘지에 평안이 있다고 말합니까? 거기는 고요하지만 생명이 없고 기쁨이 없습니다. 다만 고요만 있을 뿐입니다.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은 기쁨이 있는 평안입니다. 외적으로는 평온하지 못하지만 내적으로는 기쁨이 용솟음치는 평안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겉으로만 평안인 것 같으나 그 속에 고통이 있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를테면 돈이 주는 평안입니다. 이것은 우리를 평안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 같으나 어떤 이는 돈 때문에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많은 부분 돈이 평안을 빼앗아 갑니다. 얼마 전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자취를 감추고 소리 없이 숨어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친구들과의 관계, 형제부모들과의 관계, 직장생활 모든 관계에서 단절을 시켰던 것입니다. 왜요? 그 돈을 빼앗아 갈까 두려워서 입니다.
權力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주는 것은 일시적 평안입니다. 그것 때문에 오히려 평안을 잃게 되는 경우가 더 많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주는 평안은 다릅니다. 그 평안은 어떤 환경이든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그 평안은 우리를 둘러싼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쁨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주님은 이 본문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의 평안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요한복음에서 이 말씀을 하실 때는 십중팔구 아람어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람어로 '平康' '平安' '平和'라는 말은 히브리어와 같이 샬롬입니다. 그러면 '샬롬'의 본래 의미는 무엇인가? 이 샬롬는 “완전하다” “건강하다” “건전하다”라는 단어에서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그렇습니다. 완전하고 건전하며 건강한 상태가 참 평안입니다.
2. 이 평안은 누가 주는 것일까요?
“나의 평안을 주노라” 참평안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주셔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님은 이 평안을 우리가 누리게 하십니다.
참 평안은 ‘관계의 안녕’을 통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관계의 완전함과 건강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경험해 본 자만이 압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완전하지도 건강하지도 못할 때 경험하는 고통이 얼마나 큽니까?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공동체 안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모릅니다.
그 온전하지 못한 관계를 회복하기까지는 늘 마음의 고통이 따라 다닙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세상을 悲觀합니다.
하나님과 관계가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부모 없는 자의 마음과 같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때가 없습니다. 부모는 친구와도 달라서 어떠한 경우에도 나를 수용하는 분입니다. 설사 그분에게 꾸중을 듣고 매를 맞을 때에도 그것은 나를 해하거나 잘못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은 사랑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압니다. 자녀가 언제 가장 不安해 하고 공포에 떠는지 아십니까? 매를 때릴 때가 아닙니다.
부모가 나를 버렸다는 느낌이 들 때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화할 때 불안과 공포를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의 언어적인 특징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빌어먹을 놈의 세상!” “원수 같은 인간들!” 이런 말들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요? 통쾌하고 카타르시스가 일어날까요? 천만에 말씀입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자신을 향한 정죄하는 마음, 하나님을 원망하는 마음으로 苦痛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욕하고 그를 믿는 자들을 경멸하는 자들의 마음은 결단코 평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결단코 그 고통의 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를 구주로 믿어 구원을 얻은 자라야만이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즉, 救援의 은총을 누려야 하고 성령으로 변화가 이루어져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구원이 없는 사람에게는 세상 그 어떤 것도 평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앞에 영원한 심판이 있는데 어찌 평안을 이야기 한단 말입니까? 그러기에 진정한 평안은 예수 안에서 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통한 참된 평안을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성경 구절을 하나 소개합니다. 빌립보서4:6-7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염려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염려하지 않으려고 해도 현실을 보면 염려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염려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염려할 시간에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할 것들을 찾아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염려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시리라” 고 하십니다.
염려할 시간에 기도하고 감사하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 평안을 주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3. 이 평안을 깨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님께 속한 평안,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을 깨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의심이고 하나는 불신입니다. 이 둘의 밑바탕은 罪입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불안전하게 하며 건강하지 못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입니다. 그 극단적인 모습을 창세기 3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를 깨는 것은 죄였습니다. 좌가 들오니 책임을 전가합니다. 죄가 들어오니 부끄러워 숨게 됩니다.
로마서의 증언에 의하면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고 그래서 모든 인간은 의에 이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즉 모든 인간은 하나님과 불화하게 되었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평안함을 상실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죄로 인하여 생겨난 깨어진 평안을 임시방편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눈 가리고 아옹하려고 합니다.
마치 타조와 같습니다. 저는 동물원에 가서 타조를 보면 신기합니다. 그의 몸집은 저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크고, 그에 비해 그의 머리는 너무나 작았습니다. 호주에서는 사람을 태우고 다니는 정도로 크고 빠른 것이 타조입니다.
그런데 그 타조는 궁지에 몰리게 될 때, 머리를 쳐 박는 답니다. 그 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무섭고 두려우면 머리만 구멍에 쳐 박고 그 상황을 피하려 한단 말입니다. 위험과 위기를 당하였을 때, 대처하는 타조의 방법이었습니다. 이것을 저는 타조의 平安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타조의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순간의 위기만 모면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는 양 착각하며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외면해 버리는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고통을 회피하기 위하여 술의 힘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술에 취하여 있을 동안에는 잠시 그 고통을 잊을 수 있지만 술이 깨어나면 여전히 현실은 그대로 있습니다.
또는 고통의 사건이나 문제를 애써 잊어버리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심리학적으로 억압이나 부인이라고 합니다. 결코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그의 무의식에 얽매어 두는 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어진 평안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완전한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왜요?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죽음의 값을 치룬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를 통해 죄 문제를 해결 받을 때 누릴 수 있습니다.
다윗의 경우를 통해서 살펴보도록 합니다. 다윗이 자기 신하의 아내를 범하고 저지른 범죄, 이것은 그야말로 天人公怒할 범죄입니다. 간음, 살인, 거짓말, 온갖 범죄가 다 섞인 것입니다.
그러나 겉으로 볼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평온을 유지하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인 나단의 눈에 볼 때, 다윗은 심각한 영적이고 정신적인 위기에 직면한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불안이 그의 심령 속에 가득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신적인 질병이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동안 눈에 보이지 않게 누적되어 온 문제가 무의식 가운데 쌓여 있다가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아가 견디지 못하게 되면 폭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바로 이러한 위기에 봉착하게 된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어 다윗의 무의식에 감추어져 있는 문제를 그의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리게 합니다. 나단의 비유를 통해서 비로소 다윗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그의 의식의 세계로 끌어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때서야 다윗은 이유 없는 불안의 실체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우리에게도 똑 같습니다. 그것도 가장 완전한 평안을 위해서 가장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 놓으셨습니다. 어쩌면 다윗은 스스로 범죄한 것 때문에 아들이 죽고 가정에 칼날이 그칠 날이 없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이 모든 대가를 미리 지불해 놓으셨기 때문에 사죄의 은총을 값없이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가 치루어야 할 것은 우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죄를 발견하고 고백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유 없는 불안의 실체인 나의 감추어진 죄성과 죄를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주님이 주시는 참다운 평안을 위해서는 회개기도가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일에만 이용하고 있습니다.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도피처로 기도를 이용합니다.
이것은 타조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기도가 끝나도 현실은 변하지 않고 문제는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기도를 통하여 문제의 본질에 직면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아직도 여러분 속에 참된 평안이 없다면 혹 아직도 타조처럼 평안을 누리려고 하고 우리 죄악을 감추고 있는 것은 없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분께 우리의 죄악을 아뢰고 고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모든 죄악을 사하시고 용서하십니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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