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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생각을 바꾸면 /시37:1~9/ 2004년 3월 21일 주일낮

생각을 바꾸면

시편37:1~9

2004년 3월 21일 주일낮 예배 최일환 목사 설교

37:1 行惡者를 因하여 不評하여 하지 말며 不義를 行하는 者를 妬忌하지 말지어다.

37:2 저희는 풀과 같이 속히 베임을 볼 것이며 푸른 菜蔬같이 衰殘할 것임이로다

37:3 여호와를 依賴하여 善을 행하라 땅에 거하여 그의 誠實로 食物을 삼을지어다.

37:4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所願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37:5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37:6 네 義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公義를 正午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37:7 여호와 앞에 潛潛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亨通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不評하여 말지어다.

37:8 忿을 그치고 怒를 버리라 不評하여 말라 行惡에 치우칠 뿐이라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설교:

미국의 뉴욕타임즈에 “Sad people are unhappy as matter of habits 라는 논문이 실린 적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슬픈 사람의 불행은 습관의 문제다.” 라는 것입니다.

이 논문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슬픈 사람이 不幸한 것은 바로 그의 습관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행동이 반복되면 習慣이 생기고 습관이 계속되면 性稟이 되고 성품이 이어지면 운명이 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우리의 습관 하나하나를 고쳐 나가면 우리 인생도 바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말에 “걱정도 八字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사람은 팔자가 걱정을 하게 되어 있어서 環境이 어떻게 바뀌든 그 사람은 늘 걱정만 하며 살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보면 정말 걱정을 한순간도 안하고 지내는 경우가 없어 보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이 기쁨과 감사가 없이 늘 걱정하며 살까요? 그것은 우리 속에 깊이 자라잡고 있는 罪性 때문입니다. 그 죄성은 탐심을 기초로 하고 있는데 그 탐심이 채워지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모습이 걱정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소원이 성취되어서 기쁜 것입니까? 기뻐해야 所願이 성취되는 것입니까?

다시 말하면 환경과 상황의 결과로 기쁨이 나오는 것인가?

아니면 기뻐하기에 환경과 상황이 바뀌는 것일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기쁨이 환경을 만드는 것일까요? 환경이 기쁨을 만드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느 쪽입니까?

그러나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환경이 만드는 기쁨은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잠시 잠간이고 속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부인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에 當選되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 기쁨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근심과 걱정이, 고통과 외로움이 가득찬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술이 주는 기쁨도 잠시 잠간입니다. 사람들은 술만 먹으면 신나고 즐거워합니다. 그러나 그것도 속는 것입니다. 얼마 지나지 못해 쓰라림과 후회 고통과 아픔이 가득 몰려옵니다.


그러기에 참 기쁨은 환경과 상관없는 기쁨이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쁨이란 절대적인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어떤 환경, 어떤 조건 속에서 누리는 것이 아닌 하나님만이 주시는 기쁨입니다.  이런 기쁨이 있을 때 우리는 참된 행복을 맛보고 참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기쁨이 우리에게 임할 수 있는 것일까요?


1. 생각을 바꾸어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뻐해야 합니다. 

오늘본문 4절을 다시 읽어봅시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所願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일반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이 앞뒤가 좀 바뀐 것 같습니다. 우리 소원을 먼저 이루어주시면 내가 기뻐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르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라 그러면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먼저 기뻐하라 그러면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라

먼지 기뻐하면 成功하고 먼저 기뻐하면 亨通하게 되고 먼저 기뻐하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은 기뻐하는 자들을 속에서 일하신다는 것입니다. 환경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그 환경 때문에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은 그 환경이 바뀌면 감사할 것 같으냐? 절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사람은 또 다른 환경 때문에 또 불평을 연이어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까? 홍해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여 건너게 했더니 물이 없다고 불평,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 12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뒤돌아가자고 하며 그 땅에 못 들어간다고 원망 불평이 계속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입의 말대로 그들을 광야에서 다 죽도록 기다렸다가 그 후손들만 들어가게 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기뻐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신앙고백을 통한 교훈입니다. 다윗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그는 하나님 앞에서 승리합니다.

환경 때문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 때문에 하라고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뻐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은 기쁨에 있습니다. 기쁨의 얼굴이 가득하면 저절로 행복을 누리게 됩니다. 그 얼굴은 다른 사람에게도 전염되어 우리 환경을 바꾸어 놓습니다.


아니 기뻐할 것이 있어야 기뻐할 것 아닙니까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까? 기뻐할 것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우리는 수없이 많은 기쁨의 조건들을 받았으나 그것을 다 잊었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그 조건을 찾으란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 한분만으로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신 것만으로도 우리는 기뻐하여야 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것만으로도 기뻐해야 합니다. 기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만족시키겠다고 약속을 하십니다.


제가 중국에 神學校 하면서 여러 목사님들을 만나고 강의 요청을 합니다. 그러면서 목사님들의 새로운 모습을 봅니다. 제가 이분이면 우리 학교에 가서 강의 하셔도 되겠다 하시는 분들을 선정하여 강의를 요청하면 몇가지 반응을 보게 됩니다.

첫째로는 招請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수락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교회 형편이 정말 어려운데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기에 하나님이 보내 주실 것을 믿고 수락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둘째는 形便을 앞세워 사양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시간이 안된다고 사양하는 분도 있으나 대부분이 경제적인 형편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정말 경제적인 형편이 안되는 분도 있으나 실상 그렇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기도도 안 해보고 형편이 안된다고 거절을 합니다.

제가 이일로 깨달은 것은 목회자의 성품입니다. 일단 문제를 부정정적으로 보는 분들이 있습니다. 안돼, 못해, 안될거야, 나가 뭘한다구,,,,

그러나 또 다른 분들은 일단 긍정적인 말을 합니다. 내가 능력은 없으나 준비하겠습니다. 가겠습니다. 어려워도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요. 하면서 수락하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자세는 목회와도 관련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분은 목회를 잘하시는 분입니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시는 분은 목회가 잘 안되시는 분임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목회가 잘되니 긍정적일까요? 긍정적이니 목회가 잘되는 것일까요? 반대로 목회가 안되니 부정적일까요? 부정적이니 목회가 안되는 것일까요?  


여러분은 어떤 일이 닥치면 부정적인 자세를 먼저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키 어렵습니다. 긍정적인 자세로 하나님을 바라고 그분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소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사람을 통해 일하시겠다는데 이것이 얼마나 기뻐할 일입니까? 기뻐하고 감사하며 나가면 하나님은 일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2. 생각을 바꾸어 미래를 맡겨야 합니다.

사람들의 걱정 念慮의 대부분은 내 앞길에 대한 두려움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내가 내 인생길을 만들어 내려고 하니 걱정 염려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내 인생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만드신 분, 나를 이 땅에 내어 보내신 분,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분께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5절을 보세요.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6절, 네 義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公義를 正午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다윗은 자기가 당한 상황을 자기 힘으로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경험과 믿음을 앞세워 하나님께 맡기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맡기시기를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의 앞길,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어찌 우리 앞길을 알수 있습니까? 내일 어떤 일을 당할지, 누구를 만날지, 그러고 어디에 있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全能者이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최고의 선택이 아닙니까?


여러분 자녀 앞길, 그 누가 아십니까? 탈랜트 박영규씨 아들이 몇 일전 미국에서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죽었답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앞날은 누가 책임질 수 있습니까? 일일이 따라다니며 보호할 것입니까?  언제까지요? 운에 맡기며 살 것입니까?


우리 교회 앞 날, 우리나라와 민족의 앞 날,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대한민국호의 앞날은 캄캄합니다. 세계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그럭저럭 버텼는데 이제는 앞이 안보입니다. 

聖經은 뭐라고 합니까?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네 義를 빛같이 나타내시며 네 公義를 正午의 빛같이 하시리로다”


빌립보서 4장 6절 이하를 외우시나요?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기도하되 감사함으로 아뢰면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신다고 하십니다.

應答하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 주신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기도로 맡기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약하기에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에 그렇게 해야 합니다.


내가 한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뭘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제가 지지난주 병원에 입원했을 때 열이 42도로 올랐습니다. 왜 올랐는지 병원에서도 정확하게 모릅니다. 수없이 원인규명을 위해 여러 가지 검사를 했습니다. 피를 수차례 뽑아갔고 소변검사, X레이 검사 수차례 했는데 원인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단지 추정키는 폐렴 초기 증세였을 것이다, 라고 하는데 그것도 분명치 않습니다. 그러더니 “원인불명의 열” 이라고 단정을 내렸습니다.

놀랄만한 것은 43도가 되면 저는 혼수상태에 빠졌을 것이고 뇌가 굳어졌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도 차이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 생명을 내 것이라 하겠습니까? 맡기면,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할렐루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것을 맡기시고 염려와 걱정에서 벗어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생각을 바꾸어 묵묵히 참아 기다려야 합니다.(7~9절)

37:7 여호와 앞에 潛潛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亨通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不評하여 말지어다. 37:8 忿을 그치고 怒를 버리라 不評하여 말라 行惡에 치우칠 뿐이라 37:9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신앙생활 할 때 제일 힘든 부분은 악인이 잘되고 형통한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또 나보다 악하고 불의한 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것을 보면 기쁨과 감사가 도망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생각을 바꾸라고 하십니다. 그럴 때 분노 가운데 화를 내고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는 것입니다. 분을 그치고 노를 버리라고 하십니다.

어떻게요? 9절을 보세요. “대저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나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리로다.”

대저라는 말은 “왜냐하면”이란 뜻입니다.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다.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 의지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꾸 현재만 봅니다. 미래를 내다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세까지 보십니다. 그러기에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도 잠잠하고 묵묵히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멕시코에서는 "분노는 달구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이라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분노를 느낄 때 어떤 뜨거운 것이 마음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것 같은 우리 감정의 상태를 매우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와 같은 표현이라 생각합니다. 우리도 울화통이 치밀어 오른다고 합니다. 

또 서부 아프리카의 맛시 족은 분노를 '썩는 마음'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말에도 "속 썩는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분노는 우리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참습니까? 어떻게 입을 다물 수 있을까요?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성이나 우리의 의지로는 도저히 참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절제의 능력을 우리에게 선물로 줍니다. 그래서 용서하고 이해하며 참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참으로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고 충성하고 복종하고 사랑하는 모든 부분은 명령조로 말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기뻐하라, 맡기라, 기다리라, 왜요? 그것이 복을 누리는 비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먼저 할일과 나중 할일을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나를 보지 마시고 하나님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생각이 바뀌고 우리삶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출처 : 최일환 목사(장안중앙교회)설교 카페
글쓴이 : 최일환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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