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어디든지 평안 / 엡 2:14-18 (신 312쪽)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서 걸어가는 삶이 우리 성도들의 삶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사는 삶이 정석이요, 정답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의 나라에 고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때문에 늘 불안하고, 늘 초조하고, 늘 가볍습니다. 

어느 한 곳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늘 이것저것 따라 다니느라고 바쁘기가 한량없습니다.


행 7:55-60절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집사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 계신 것을 보고

기꺼이 돌에 맞아 죽는 순교를 당했습니다. 

아니 순교를 당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처했다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바쁘고 분주하게 하면서도 

전혀 소득이 없는 삶이 되게 하고, 

또 무엇이 스데반 집사를 돌을 맞아 죽는 순교를 당하면서도 

돌을 던지는 자들까지 용서를 하는 여유를 갖게 합니까? 


우리와 스데반 집사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우스개소리로 

그 이유를 스데반 집사가 신앙생활을 할 때에는 당회와 예배당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인간적으로 싸울 일이 전혀 없는 담담한 신앙생활이었다는 겁니다. 

물론 웃자고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오늘 우리 한국교회의 형편을 보면서 

한 번 더 생각하게 되는 그런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 모습과 오늘의 우리 신앙생활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는 

바로 오늘 본문에서 나오는 “평안”의 문제입니다.


본문 17절입니다.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누구든지 차별 없이 누리게 하신 평안입니다. 

본문의 먼데 있는 너희는 이방인을 말하는 겁니다. 

가까운 데 있는 자들은 유대인을 말합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할 것 없이 누구에게나 누리게 하시는 평안입니다. 


본문의 제목처럼 어디든지 누리게 되는 평안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더러 누리게 하신 신적인 평안입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평안이기 때문에 

이미 다 그렇게 누리도록, 

누릴 수 있도록 완성하신 평안입니다. 

신앙심이 지금보다 더 높은 경지에 가야만 누리게 되는 미래형의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사는 오늘 지금 여기서 누릴 수 있는 평안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신앙의 자리에 따라서 달라지는 평안이 아닙니다.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면 그 누구나 다 누릴 수 있는 만백성의 평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분명히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더러 누리게 하신 평안인데 

정작 우리는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나름대로 한다고 하는데도 

마음에 아무 감동이 없고 

늘 그저 물에 물 탄 듯 하고, 

술에 술 탄 것 같은 모습뿐입니다. 

성령님이 역사하는 충만한 체험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평안이 없는 삶을 누리고 살까요?



사도행전 3장에 가보면 

나면서부터 걷지 못해서 미문이라고 하는 성전의 문 앞에서 구걸을 하는 사람이 등장을 합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아는 대로 이 사람은 베드로의 말 한마디로 인해서 깨끗하게 고침을 받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행 3:6절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누구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입니다. 

나중에 베드로 앞으로 나은 사람과 많은 유대인들이 모이게 됩니다. 

그 때 베드로가 또 다시 하는 말이 있습니다.


행 3:12-16절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그를 넘겨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의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거부하였으니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 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여기서도 역시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온 믿음이 

이 장애인을 낫게 했다고 선포하면서 자기에게 주목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곧 베드로에게 주목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람에게 주목하지 말라는 겁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목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왜 당시 그 사람들은 베드로에게 주목을 했을까요? 

장애인으로 태어난 이 사람이 깨끗하게 나아 일어선 것을 

베드로, 곧 사람이 고쳐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누구 때문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때문에 베드로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고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증거하려고 하는 겁니다. 


처음에 말씀을 드렸던 스데반 집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스데반 집사는 하늘 보좌 옆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했습니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계속 돌을 맞아 죽어가면서까지 사람들을 용서합니다. 


용서의 마음이 곧 화목의 마음입니다. 

화목은 평안으로부터 나오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되니까 평안의 마음이 되어서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하는 것입니다. 

자기한테 돌을 던지는 사람들에게까지 사랑을 전하는 겁니다. 


결국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목해야 하는 겁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들이 평안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사람에게 주목하는 것입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한 가지 기적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마17:14-18절 “그들이 무리에게 이르매 한 사람이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내 아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간질로 심히 고생하여 자주 불에도 넘어지며 물에도 넘어지는지라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에게 참으리요 

그를 이리로 데려오라 하시니라 이에 예수께서 꾸짖으시니 귀신이 나가고 아이가 그 때부터 나으니라”


잘 아실 겁니다. 

예수님께서 변화 산에 올라가서 계신 사이에 

간질로 고생하는 아들을 둔 사람이 

남은 제자들을 찾아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은 제자들이 그 병을 전혀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실망하지 않고 차분하게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고쳐주시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같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 실제로 어디에서 걸려 넘어지게 되는지 솔직하게 한 번 생각해보세요. 

반대로 우리가 늘 누구에게 주목을 하고 사는지도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오늘 내 상태를 한 번 돌아보세요. 

아니 오늘 내가 가진 핑계가 누구에게만 있는지를 한 번 생각해보세요. 

아니 사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오늘뿐만 아닙니다. 

나는 늘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나를 핑계하고 변명하고 외면하고 있습니다. 

더 적극적으로 모든 사람을 화목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당신의 몸을 드려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화목하게 되도록, 

평안의 삶을 누리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못하고 

늘 내 인간적인, 세속적인, 세상적인 기준의 삶을 위해서 

사람을 쳐다보고 살 때가 너무 많은 겁니다. 


때문에 늘 누구 때문에 힘들고, 

누구 때문에 죽겠고, 

누구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 자기 함정 안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혼자 서야만 하는 신앙생활까지도 

누구 때문이라고 하는 변명과 핑계거리를 만들고, 

결국 사탄과 마귀의 조롱거리와 장난거리가 될 때도 많은 겁니다.


요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결국 내가 해결해야만 하는 겁니다. 

내가 먼저 사람에게서 돌아서야만 하는 겁니다. 

사람 쳐다보고 힘들 것 없습니다. 

사람 쳐다보고 기대할 것도 없습니다. 


창세 이래로 지금까지 

나를 묵묵히 바라보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나를 위해서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당하시고, 

절망의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가는 길 외에는 평안이 없습니다. 

어디든지, 

누구든지 

평안을 누리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주목하고 묵묵히 달려가시기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