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추천 설교/나무목교회

[스크랩] 아버지께 나아감 / 엡 2:14-18 (신 312쪽)

오늘은 드디어 엡 2장 14절에서 18절 까지 말씀의 결론 부분입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은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들을 이렇게 잘게 부수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 이유가 다 있습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이 

오늘 우리가 행하고 있는 교회 중심의 신앙생활에 대한 정의를 

상당하게 많이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바라보고 사는 교회가 이 세상 가운데서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 

또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성도는 어떤 자세와 태도를 갖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장 정확하게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때문에 에베소서의 내용만 잘 듣고 배워도 

이 세상 살면서 가져야만 하는 교회 생활을 제대로 잘 할 수 있습니다. 

이 땅에서의 교회생활은 곧 영원한 천국에서 사는 삶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은 고작해야 백 년이지만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혹시라도 나는 그런 교회 생활을 안 하니까 배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은 버려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받은 계급장을 가지고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서도 살게 되는 겁니다. 

그 계급장은 전혀 바뀌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서 우리가 더 이상 세우게 될 공로가 없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여기서 잘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잘하는 것을 뭐라고 표현을 하고 있습니까?


18절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기준이 아주 정확하게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입니다.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는다는 것은 그것이 책임이라는 말입니까? 

아니면 특권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는 장면 중에 대표적인 것이 

아마 모세가 시내 산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의 모습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출19:9-1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 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는 백성들에게 성결을 요구하시고 

함부로 산에 오르지 못하도록 경계를 정하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자들은 돌로 쳐 죽이거나 화살로 쏴서 죽인다고 하는 아주 엄한 명령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뵈러 나가는 것이 특권입니까? 

아니면 책임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엄청난 특권입니다. 

그런데 이 특권이 지금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아주 무거운 짐이 되어 버렸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무거운 짐이 되다 보니까 이제는 나오는 횟수를 서로 간에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자랑이 되다 보니까 이제 서로 경쟁하게 되었습니다. 

경쟁을 하다 보니까 시샘도 하고 질투도 하고 무시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오는 신앙생활이 

이제 우리 사이의 또 하나의 벽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마27:50-53절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다 아시다시피 성소는 원래 일반인들에게는 열려 있지 않던 곳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달려 나갈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성소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길게 찢어졌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는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을 했습니다.


히10:19-20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찢어주심으로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앞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 얼마나 영광되고 자랑스러운 은혜입니까? 

아무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다 받으려고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역시 그런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와 다름이 없이 

한 성령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 나가는 것은 다 특권입니다. 

여기서 특권이라는 의미는 남들보다 내가 더 낫고 잘 나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강조하는 의미에서의 특권입니다. 

결코 내 실력으로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아 누린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특권입니다. 

때문에 누구에게도 자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서는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다 동등하게 받은 것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중에 자랑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뭡니까? 

한마디로 하나님의 은혜를 제대로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랑하고 있는 것은 몽땅 다 이 세상 중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 중에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있습니까? 

어느 것 하나라도 하나님의 것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이 세상의 것을 가진 것을 자랑합니까? 

내가 가진 것을 자랑한다는 것은 이미 그 삶이 하나님 나라의 삶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러워해야 맞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구분이 없고, 차별이 없고, 제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세상에서부터 벌써 하나님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때문에 본문에 “한 성령 안에서” 라고 하는 단서조항이 붙어 있는 겁니다. 

같은 성령 안에서, 

하나의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 안에서 사는 삶이 벌써 이 세상에서부터 우리에게는 허락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만 허락된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우리 삶이 얼마나 영광된 것이고, 

감사한 것인 줄을 제대로 알고 있어야만 합니다. 


혹시 누가 자기 가진 것을 자랑하더라도 너그럽게 봐주세요. 

그런 사람을 꼭 야단을 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 없습니다. 

아직 믿음이 무엇인지, 

은혜가 무엇인지, 

우리가 받은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는 겁니다. 

그냥 너그럽게 웃어주시고, 축하해주세요. 


쉽게 생각해서 

그냥 그 사람이 교회에다가 자랑하지 않으면 누가 그 자랑 받겠냐고 하시면 됩니다. 

다른 사람한테 못하는 자랑 내가 좀 들어주는 것도 좋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아직 신앙이 세상에서 가진 것으로 자랑하는 정도라고 여기시면 됩니다. 

굳이 그것을 제가 설교한 내용까지 들먹이면서 

‘우리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넌 뭐 잘났다고 자랑하고 난리냐? 

오히려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하실 것 없습니다. 


그래봐야 달라지지도 않고 그 손에서 라면 한 그릇도 안 나옵니다. 

좀 더 세월이 가야만 하는 겁니다. 

세월이 가야만 한다는 것이 시간한테 맡긴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가 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야만 변하는 겁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냥 변한 척은 할 수 있겠지만 결정적일 때는 다 자기 본성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시면 아무도 할 수없는 겁니다.


저도 가만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목사님들께서 거 가만 놔둬야 한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상당히 반발을 했습니다. 

성도라고 하는 사람이 저 모양이면 목사가 뭐라고 해서 가르쳐야만 하는 거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달라지고 변하는 것은 모두가 다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었습니다. 

사람이 달라지게 하는 것은 

그저 달라진 척만 하고, 

사람인 목사의 눈치만 보는 것일 뿐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으로 커 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하나님의 때에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전 3:1-11절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일하는 자가 그의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나도 좀 더 일찍부터 예수 믿고 예수 안에서 좋은 성도로 자랐더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그건 틀린 말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부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고 열심히 하나님 앞에 서도록 하는 겁니다. 

남의 것을 쳐다 볼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 열심히 나아가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예배의 자리에 오는 것으로만 하나님 아버지 앞에 나아가는 것을 다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더욱 하나님 아버지 앞에 서야만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행사적인 삶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와 냄새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려면 내 판단과 내 가치와 내 생각을 버리고 

온 세상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만 합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의 구분 없이 하나로 연합하게 해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하는 삶이 되어야만 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상징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지금 이 세상 가운데서 욕심이 목구멍 바깥에까지 차버린 

예수 믿는다는 교인들을 나타내고 있는 오늘의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삶이어야만 합니다. 

자랑할 것도, 드러낼 것도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사는 착하고 충성된 나무목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 : 나무목교회
글쓴이 : 뜨거운얼음 원글보기
메모 :